'라디오 스타'는 작년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
무료한 주말을 보내다 문득 다시 틀게 됐다. 여전히 좋았다.
그리고 세 곡의 노래가 귀에 들려왔다.
'넌 내게 반했어'와 'Video killed Radio star'를 거쳐 '비와 당신'까지.
'넌 내게 반했어'는 극 전반의 분위기를 확 끌어당겨다 바꿔준다.
이 노래를 기점으로 최곤은 갈 데 없는 막장 인생에서 차츰 살아나고,
'Video killed Radio star'를 통해 옛 것을 어루만지는 경쾌함이 뒤섞이더니,
마침내는 '비와 당신'을 통해 옛것에 대한 희미한 추억의 그림자를 절절히 부여잡는 거다.
물론 이 영화는 온전히 안성기와 박중훈, 이 명콤비에 대한 헌사다.
영화가 88년에서 시작되는 것부터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88년이라면 안성기와 박중훈의 첫 만남, '칠수와 만수' 때니까. 이건 이준익의 '센스'일 거다.
극중 '이스트 리버'의 비틀즈 따라하기나 구식 벤츠를 봐도 그건 알 수 있다.
'투캅스'의 당대 최고 흥행스타였던 그들이 세월 흘러 펼치는 '라디오 스타'의 최곤과 박민수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인 듯 자연스럽다. 팩션에 가까운 스토리 라인이다.
'투캅스'의 폭소/광소가 '라디오스타'의 은근하고 아련한 미소로 바뀌는 과정은 그대로 조금은 빛바랜 그들의 인생판이자, 두 작품 사이에 낀 세월의 무시못할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간과 그만큼 변한 삶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그게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러니까, '라디오 스타'는 소통과 정(情)에 관한 오래된 믿음을 다룬 영화다.
바로 내 곁의 사람들, 그 친근하고도 소중한 관계맺음을 찬찬히 돌아보자는 단순한 얘기.
따라서 주인공들의 근시안은 '뒤쳐짐'보다는 '눈물어림' 때문이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라디오 주파수에 맞춰 털어놓는 강원도 영월, 소도시의 수수한 사연들이란.
'서울-현재'의 사람들은 누구도 최곤을 기억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해주는 사람은 오로지 사람좋은 매니저(라기보다는 그저 '형'이 걸맞은) 박민수 뿐, 흘러간 영광을 추억하는 최곤에게 강요된 것은 그저 "찌그러지는 맛"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영월-과거'의 사람들에게 다가갈수록 최곤은 추종자 '이스트 리버'와 다방 김양과 중국집 배달원 청년, 식당/세탁소/철물점 주인들, 내기화투 치는 할머니들에게서 수수하고 친근한 관심을 받으며, 지나간 세월을 거슬러 그시절 최곤으로 돌아온다.
말없던 그가 사람들을 넉살좋게 불러가며 슬몃 웃음을 되찾는 게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모든 것을 어르고 달래서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 박민수.
그도 영월에서 활기를 되찾는다. 포스터를 제작해서 뿌리며 소박한 '마케팅'도 펼치고, 최소한 서울에서 최곤의 사건 뒤치다꺼리나 도맡던 것보다는 훨씬 '매니저'답지 않은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박민수, 하회탈 같은 속깊은 웃는 얼굴 속에 감정의 미묘한 간극을 담아내는 안성기의 연기에는 정말 감탄밖에 안나왔더랬다. 인생의 어릿광대 역할은 사실
안성기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박민수를 연기하는 안성기는 확실히 전성기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주절주절 설명할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인상 깊었던 한 대목만은 짚어두고 싶다.
최곤은 '그냥 아이'다. 박민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담배가게도 혼자선 못 찾는다.
"오늘 안에 온다고 했는데 왜 안오냐"고, 떼쓰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아이일 따름이다.
그 본질적 관계맺음에 비하면 두사람이 평소 주고받는 농지거리는 차라리 양념일 뿐.
식당집 아이가 아버지를 찾을 때, 최곤도 박민수에게 돌아오라고 하소연하는 그 장면.
교차해서, 박민수가 김밥을 꾸역꾸역 삼키며 눈빛으로 모든 대사를 대신하던 그 장면.
그리고 아이 아버지가 돌아와 노래를 신청하자 최곤은 라이브로 '비와 당신'을 부른다.
100일 기념 공개방송에서도 "다시 노래하고 싶어질까봐" 끝끝내 사양하던 최곤인데 말이다.
그러니 최곤은 그때 가수가 아닌 아이로서 '비와 당신'을 불렀다는 얘기다.
'가수' 최곤이라면 이미 "왜 이렇게 됐냐"는 강PD의 술주정 때 벌컥 화내고 봤을 것을.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이'의 마음이 그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노래 가사도 구구절절,
형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박민수에게 하고픈 말들. 그 애증의, 하지만 '애>증'의 관계.
혼자서 빛나지 못하는 별. 언제나 최고라고 말해줬기에 '88년도 가수왕'을 스스럼없이 자랑하는 최곤이 있었고, 그 부족하지만 따스한 현실은 박민수가 늘상 부르는 노래처럼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속깊은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게 긴 세월 둘을 지탱하는 힘이었음은 '영월-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내내 확인했던 바, 둘은 재기가 아니라 '익숙하고 친숙한 우리 사람들'과 함께 영월에 남기를 택한다.
그리고 마침내 빗속에서 박민수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 그건 최곤이 목놓아 부르던 '비와 당신' 그대로였다. 그 세월 속살이 드러난 마지막 멋쩍은 웃음은 그들만의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