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말았어야 할 비밀

한여름눈사람 작성일 08.06.08 10:4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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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걸륜은 놀랍게도 신인감독, 게다가 영화와는 전혀 무관한 뮤지션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않을만큼 훌륭한 데뷔작을 연출했다. 영화는 이미 우리가 수도 없이 보아온 청춘 로맨스의 뻔한 클리셰와 그야말로 한번만 더 보면 백번째인 그 흔해빠진 장면들을 쉴 새없이 반복하지만 주걸륜은 신기하게도 그 뻔한 교실 한귀퉁이에서, 그 흔해빠진 자전거시퀀스에서, 그 뻔한 소나기 아래에서, 결코 뻔하지 않은 감수성과 신비로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해낸다.
이 놀라운 능력은 이미 고등학생때부터 작곡가와 뮤지션으로 대만과 아시아를 주름잡은 주걸륜의 음악적 감수성과 천재성에서 비롯된 듯 하다. 영화 곳곳에서 주걸륜이 직접 연주하는 신들린듯한 피아노 연주도 그동안 밥먹듯이 반복된 청춘멜로의 식상함을 감쇠시켜주는 일등공신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달랑 피아노 한대 만으로 그 흔해빠진 쇼팽의 왈츠를 전혀 다른 곡으로 변주해내듯이 주걸륜은 청춘로맨스라는 악기를 자신만의 섬세한 감성으로 연주해내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주걸륜의 독창적인 연주는 끝이 난다.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의 전개에 부담이 없었던 전반부에서는 음악으로 쌓아온 주걸륜의 감수성과 감각이 빛을 발하지만 드디어 비밀이 밝혀지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야하는 후반부부터 안타깝게도 주걸륜은 흔해빠진 악기로 흔해빠진 연주를 해댄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밝혀진 이후의 순간들은 비밀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순간들보다 아름답거나 가슴아프지 못하고, 비밀이 밝혀진 후 한꺼번에 몰아닥칠 감정의 태풍을 기대했던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엔 비밀의 강도는 너무 빈약할뿐더러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는 뻔한 이야기를 풀어가던 호흡에 비해 숨가쁜 이야기의 속도를 쫓아가기에도 벅차보인다.
처음부터 아예 말할 수 없는 비밀따위는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끝까지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비밀과 반전의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음악적 감성으로 충만한 주걸륜의 영혼이 중간에 갑자기 날개를 접어야 하는 일따위는 없었을텐데.
그리하여 혹시 여러분에게 그럴 용기만 있다면 비밀이 밝혀지기 전에 용감히 극장에서 빠져나오기를 감히 권해드리는 바이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당장 누군가 발뒤꿈치를 들고 여러분의 귓가에 그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저절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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