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뼈 - 괴물이라 불린 남자의 일생

말기암 작성일 08.06.24 12: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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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2번째 영화 리뷰네요. 저번보다는 분량이 많을 듯 합니다.

 

 

 

 

 

1923년. 제주발 오사카행 배를 비추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인 젊은날의 김준평. 그는 다가오는 오사카를 보며 미소짓습니다.

이 짧은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과 가장 끝부분, 두번에 걸쳐 나오는데요. 중요한것은 이 장면만에서만 영화 전체에 있어 유일하게 김준평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문제적 인물의 일대기를 그릴때 그 인물의 젊은 시절은 분량은 적더라도 꼼꼼히 그려지는 편입니다. 주인공의 인격이 형성될 때 처해있던 주위환경이나 행동방식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그것들이 후에 그의 그릇된 행동들을 관객들로 하여금 합리화 시켜주는 완충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구나... 정도의 역할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과정 자체를 과감히 없애고 바로 중년의 악인 김준평으로 건너뜁니다. 무책임할 정도로 그 간의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죠. 그것은 감독이 그의 행동을 합리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 이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에 어떤 연민이나 이유를 부여하려 하는것은 무의미한 겁니다. 말 그대로 '괴물'이지요.

그의 행동을 설명할수 있는 키워드는 성욕과 물욕입니다. 그리고 폭력으로 그것들을 해소하지요. 그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시종일관 폭행으로 군림합니다. 제멋대로 집을 나가고 돌아오자마자 제일먼저 하는 일이란 성욕을 풀기위해 아내를 강간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그의 폭력에 신음하고 또한 한없이 그를 증오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철저히 본능대로 행동합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고 내선일체 사상이 휩쓸던 당시의 혼란한 일본의 시대상은 신기하리만치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는 늘 그래왔듯 공장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사채놀이를 하면서 더 많은 돈을 걷어들입니다. 가증스럽게도 자신의 집 맞은편에 바로 새 집을 지어서 첩을 들여 그곳에서 동거하게 되구요.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어떤 풍족함을 얻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돈을 악착같이 모을 뿐이고 절대 쓰진 않습니다. 어느새 장성한 자식들은 더욱 더 김준평이란 인간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키워갈 뿐입니다. 점점 더 궁지에 몰리는 김준평. 발악하지만 괴물은 늙어가고 몰락합니다.

 

잔인한 인간의 삶.


영화는 단지 그 삶을 눈을 찌푸릴만큼 집요하게 비추어줄 뿐입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영화의 제목이 그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피와 뼈.


김준평이란 괴물의 피와 뼈는 무엇일까요.

 

피는 영화 속에서 그 상징이 정확히 드러나는 편입니다. 김준평은 채무자를 찾아가 그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면서 "내 돈을 빨아먹는 놈은 내 피를 빨아먹는 것과 같다" 고 협박합니다. 절대 흘려서는 안될 것. 삶을 유지케 하는 것. 그에게 돈은 곧 피였겠지요.

 

그리고 뼈. 뼈는 그의 자식들입니다. 가족은 아닙니다. 그에게 여성은 성욕의 해소와 자식을 만들어내는 어떤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는 유난히 아들에 집착하고 자식들에게 늘 복종을 강요합니다. 심지어 불임인 첩에게 자신의 아들을 낳으라고 강요하면서 자신이 늘 끼니마다 먹는 구더기 붙은 고기를 강제로 먹이기도 하죠.

자식은 그의 삶을 지탱케 합니다. 그래서 그의 몰락은 딸의 죽음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장녀가 가혹한 결혼생활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자 그는 몽둥이를 들고 장례식장에 들어와 딸을 내놓으라고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두릅니다. 그리고 갑자기 다리를 못쓰게 되죠. 자식의 죽음와 뼈의 죽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다리를 저는 늙은 노인이 된 김준평의 말로는 처참합니다. 그의 뼈(자식)들은 죽거나 그를 버리고 그의 피(돈)는 첩이 훔쳐가고 남은 피는 북한으로 홀로 이민을 가면서 북한 정부에 전부 바치게 됩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북한의 어떤 노동자 수용소. 피와 뼈를 모두 잃은 괴물은 낡은 침대에 누워 숨을 헐떡이다 생을 마감합니다. 마지막으로 젊은날 처음 오사카를 보았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영화는 김준평의 삶을 조명해주고 저는 그것을 감상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내 피와 뼈는 무엇으로 구성돼있을까. 그것에 대해 여러분들과도 얘기해보고 싶네요.

 

졸문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담 ) 주인공 김준평은 제주도 출신입니다. 그래서 영화에는 제주도 특유의 문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맨 처음 장면에 나오는 민요는 제주도 전통민요 '오돌또기'랍니다. 딸의 결혼잔치에서는 '느영나영'이라는 제주민요가 나오구요. 함께 본 제 여자친구(서울출신)는 제가 따라 흥얼거리니 이 일본노래를 아냐고 묻더군요 하하. 제주 방언은 워낙 지역색이 강하니까요. 그리고 한국어 대사에서도 제주도 방언이 많이 나오죠. 제주 출신이 아닌 한국인도 제대로 하기 힘든데 일본 배우들이 어눌하게 구사하니 더욱 알아듣기 힘드네요. 제주가 고향인 저도 처음엔 무슨 말인지 긴가민가 했습니다. 가끔씩 등장하는 아주머니들은 정말 제주도 출신이신지 제대로 네이티브한 방언을 보여주십니다. 집중하고 보시면 제주의 특징들을 많이 발견하실 수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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