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와 탕진의 시대에 던지는 경고

syweon 작성일 08.08.12 08: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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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경의 폐허..

 

먼 미래...

흥겨운 노래가 흐르면서 카메라는 우주에서 지구로 미끄러지듯이 활강한다..

버드 뷰의 카메라는 금속 파편을 뚫고 잿빛 구름을 지나 흐릿하게 서 있는 거대한 빌딩들을 비추지만, 가만 보면 빌딩들의 모습은 마치 그 외양을 쓰레기로 뒤덮은 듯한 황량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쓰레기 더미 사이로 움직이는 작은 물체...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그 물체는 다름아닌, 가슴에 WALL-E라고 새겨져 있는 작은 로봇..

카메라는 계속하여 이 기이한 물체의 심상찮은 행동을 쫓아가면서 황폐해진 풍경을 비추는데 주력하는데,

초반부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단서를 종합해보면 영화의 배경은 2810년....

당시 쏟아지는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하여 지구인들은 골머리를 앓았던 것 같고, 주유소, 은행에 걸쳐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재벌기업 BnL이 쓰레기 수거/처리용 로봇을 개발했던 것 같다...

WALL-E는 대량생산된 무수한 로봇에게 부여된 단순한 제품명이다.

지구 폐기물 분리수거 로봇이라는 뜻으로 WALL-E , 즉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 Class의 머리글자를 따서 작명했던 것이다...

그것을 개발한 회사가 거대 기업 바이 앤 라지(Buy n Large)라는 점을 고려하면 월마트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주변의 의견도 들린다.

이렇듯 현대의 문제는 소모와 탕진이 긍정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맹목적인 소비와 남용으로 전락한 데 있다.

현대사회에서 소모와 탕진은 사회적 축제와 분배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끔찍한 사회적 폭력이 되었다.

대량소비, 대량 생산, 대량학살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과 행위가 된 것이다.

이 모든 행위의 목적은 단 하나, 자본주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탕진되는 최대의 자원은 인간과 인간의 삶이다.

탕진은 더 거대한 탕진을 낳고, 악순한의 탕진 속에서 생산과 탕진의 차이는 지워진다.

사회에 의해 탕진되면서 스스로를 탕진하는 이중의 불행 속에서 현대인은 파멸과 죽음의 폐쇄 회로에 유폐된다.

자본주의가 양상한 잉여의 욕망들이야말로 진짜 죽음에 맞먹는, 존재의 근거를 사멸하는 무서운 힘이다.

이렇듯 <월E>의 초반부는 죽음의 폐쇄회로에 유폐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황량한 풍경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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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폐허는 폐허의 풍경과는 다르다.

폐허의 풍경에서 폐허가 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안의 그 무엇이지만, 풍경의 폐허에서 폐허가 된 것은 풍경 그 자체다..

폐허에도 레벨이 있다면 그 최후 단계는 폐허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의 폐허이다.

<월E>에서 보여주는 풍경이 바로 풍경의 폐허이다..

더이상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부서질 것도 없는 완벽한 폐허 상태의 지구를 그리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생명'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오로지 영혼이 없는(아니 영혼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로봇 월-E만이 혼자 쓸쓸히 이 버려진 땅덩어리를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인류가 모두 떠나 버린 지구에 남아 홀로 지구를 지키는 로봇 이야기!

과다한 소비주의로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린 지구를 전 인류가 떠나면서 청소용 로봇을 풀어놨는데, 700년이 흐른 다음, 모든 로봇이 멈추었는데 단 한대의 로봇이 남아 멀쩡히 청소를 계속한다는 이 기발한 발상은, 1992년 스탠톤 감독을 비롯한 픽사의 창립 멤버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스탠튼 감독은 '우주에 남겨진 가장 인간적인 존재가 결국은 인간들의 만든 작은 기계'라는 컨셉이 상당히 신선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는데, 하지만 곧바로 영화화되지 못한 채 때를 기다려야 했다..

소재의 특성상 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요구했으며, 그에 따라 예상되는 제작비 또한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픽사의 축척된 기술력은 이 꿈의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고, 올 여름 드디어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월-E>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특히 제작자인 짐 모리스의 노력이 컸다.

그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2 편, <진주만>, <어비스>, <해피포터> 시리즈 세편 등을 통해 시각효과의 새 장을 여는데 기여한 인물...

여기에 관객들에게 보다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려는 픽사의 의지와 맞물리면서 한 차원 높은 시각적 즐거움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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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폐허의 원인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명이 갖는 폐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문명의 최대 향유자이면서도 비판자인 셈인데, <월-E>의 스토리도 언뜻 이런 현대 문명의 갖는 폐단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것으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월-E>가 인간에 의해 창조된 '문명의 부가물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단순한 분류는 실질적인 무엇인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환경 문제만 해도 그렇다..

마치 이 모든 결과가 '문명의 발달' 때문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문명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 문명에 휩쓸리면서 관리를 소홀히 한 우리 책임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문명은 모든 실재와 본질적인 의미를 휘발시키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하기 시작한 우리의 두려운 미래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의미를 희석시키고 더 나아가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허상의 세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모든 문제를 과학이 해결해준다고 믿었고, 그것의 맹신과 시행착오를 통해 환경 파괴와 인간 존재에 대한 경시, 폭력과 파괴의 모습으로 변질되었다.

현대에서도 이런 모습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개인정보의 전산화, 디지털문명, 인간복제와 생명공학 등을 통해 유토피아적 환상을 꿈꾸지만 철학적 고민이 빠진 기술문명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의 절망으로 이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각종 기계들이 인간들의 행위를 대체하면서 겪게되는 필연적인 정체성 부재현상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본질과 인간 주체의 몰락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문명'을 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의 반성 능력은 이에 대한 다양한 저항 기제를 만들어내고, 그 몰락을 지연시키고 차단하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핸드폰이나 이메일 사용을 예로 든다면 '공중전화' '우체국' '편지지' 등의 빛바랜 단어와 연관지으면서 이제 추억은 사라졌다고 탄식을 한다..

하지만 추억은 사라지는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 속에서도 얼마든지 추억은 생성되고, 간직될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그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비록 희망의 차원일지라도 미래의 시간은 시간의 낯선 변형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다른 형태로 흐르게 될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황폐한 도시를 오가면서도 오염된 구름 사이 하늘의 별빛을 동경하고, 무욕의 자연을 갈망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 자연과 문명이 충돌하지 않기를 바라는 감독의 내면 풍경이다...

그렇다면 <월-E>에서 진정 보여주고 싶었던 폐허는 문명의 발달에 따른 폐허 보다는, 각종 편의를 위해, 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인간 본연의 마음을 포기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경고 메시지에 가깝다..

어쩌면 폐허의 풍경 보다는 풍경의 폐허가, 풍경의 폐허보다는 인간 마음의 폐허가 더 심각하다는 감독의 전언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월-E의 러브 스토리가 애뜻하게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기인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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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계 천사 월-E

 

만일 천사가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눈처럼 하얀 살과, 따뜻한 미소를 지닌, 그리고 겨드랑이에는 영락없이 날개를 단 그런 모습?

하지만 천사 본연의 임무가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라면, 더이상 비현실적인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천사의 모습은 시대착오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를 가리켜 '기계가 천사가 된 사회'라는 말로 초월적 실재가 금속성의 물질로 현현되는 현 문명의 특징을 명쾌하게 간파한 바 있다..

막대한 기술력과 냉철한 이성을 지는 금속 문명의 시대에, 우리가 상상하는 천사의 모습이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천사는 차갑게 빛나는 금속의 피부와 정교한 내부 구조를 지닌, 거기에 강력한 엔진까지 탑재했다..

기계의 몸으로 육화한 현대의 천사는 휘황한 상품의 천국에서 일어나 인간의 손을 잡는다.

인간은 '기계 천사'의 헌신적인 수호 속에서 매일 꿈 같은 삶을 구가하고 기계 천사는 최첨단의 실험실에서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

시간을 압축하고 공간을 이동시키는 자동차와 비행기, 무한대의 지식과 환상을 제공해주는 컴퓨터, 어디에 있든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휴대폰, 신이 새긴 생명의 지도를 해석해주는 유전자 기술, 몸의 형태를 원하는 대로 리메이킹해주는 첨단 성형 기구들..

이들을 두고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지는 '천사'가 아니면 달리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지어는 인류를 파멸에서 구해줄 상상의 구제주마저도 기계 천사의 모습으로 예감된다.

영화 속을 누비는 터니메이터, 로보캅 등의 정의의 전사, 천사들!

이 미래의 기계 천사들은 시간과 공간, 생명의 한계를 가로지르며 사악한 무리에게서 인류를 구원한다.

기계와 천사의 비약적인 일치는 천사의 하강이 아닌, 기계의 눈부신 비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제 기계는 기계 자체를 넘어, 근대의 메커니즘을 총칭하는 하나의 메타포가 된다.

하지만 '천사'를 창조한 것이 다름아닌 인간이란 전제에 이르고나면, 인간은 바벨탑에 이어 또 한번 신의 영역을 넘본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신이 존재 유무를 떠나, '천사'는 신에 의한 창조물이어야 한다..

이말은 즉, 천사란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표상으로, 능력에 우선하는 고결하고 순수한 그 무엇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근대의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본 대가는 엄청난 재앙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기계가 천사가 되기 위해 사용한 모델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계와 천사는 모두 인간을 변형하여 창조한, 인간의 확장 파일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예전의 우리가 상상하는 천사는 인간에 우선하는 신성함이 있었다면, 현재의 기계는 인간의 대체품으로써, 훼손된 것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천사란 인간 내부에 스며 있는 신성한 가능성인바, 이 가능성을 기계가 점유함으로써 인간은 저 아름다운 시원의 낙원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월-E는 인간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기계들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기계이면서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만일 기계가 천사가 된다면, 월-E야말로 '기계천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월-E>가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무척 궁금했었는데, 누군가는 자신의 리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감정은 이성의 버그다...사랑은 학습된 감정의 결과물이다"라고..

월-E는 기본적으로 감정을 갖지 않는 로봇이었는데 혼자 700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수도 없이 <헬로 돌리>의 비디오를 틀어봤다..

결국 월-E가 사랑하는 감정이 생긴 것은 비디오를 보는 과정에서 학습된 감정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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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어의 절제, 그리고 그것이 갖는 미덕..

 

영화를 이미 본 분이라면 느끼겠지만, 대사없이 진행되는 초반 30분의 진행이야말로 <월-E>의 백미다.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고스란히 소유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따지기 전에 월-E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관객들의 눈을 사로 잡는다..

쓰레기 더미에서 '추억'이 묻어있음직한 낡은 물건들을 분류하는 그의 투박한 손이나, 혹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면서 사물에 대해 의문점을 갖는 모습 등은, 영락없이 천진한 어린아이의 행동을 닮아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취급하거나, 버렸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게된다..

또 하나의 의문은 과연 우리에게 언어란 꼭 필요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기계의 차이에 대하여 '사고의 능력'을 이야기한다..

기계는 프로그래밍 된 언어를 사용하면서 논리를 판단하지만, 인간은 순간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하지만, 한낱 물질인 기계가 초월적인 천사를 흡수 통합한 근대의 합병 프로젝트는 이런 차이에 대하여 경이로운 성과를 달성했다...

단순히 0과 1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진 언어지만,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고의 능력'으로 구분되던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많이 희미해진 것도 사실이다...

기계는 많은 분야에서 천사의 소임을 훌륭히 해낼 뿐만 아니라, 단지 0과 1의 조합만으로 천사의 텍스트(자연과 우주의 비밀)를 빠르게 번역해 낸다.

여기서 0은 곧 무이며, 1은 유의 최초의 형태임을 환기하면, 기계의 언어가 매우 원형적이며 철학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예컨데 이브라는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월-E의 어눌한 언어로도 이브와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반증과도 같음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기묘한 감정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거나 혹은 남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필요없이 남용하고 탕진되는 언어는 쓰레기와 다름없다.

이때 월-E가 보여주는 쓰레기 처리는 그 행위 자체로 많은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데, 뿐만 아니라 월-E가 이브에게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들, 즉, 손을 잡는데 집착하거나 끊어진 이브의 전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월-E의 모습이야말로  언어가 난무하는 시대에 살면서 행동보다 말이 앞서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언어의 절제'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월-E'와 바퀴벌레의 교감이다..

둘은 단순히 손을 타고 어깨로 올라가는 것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대신한다....

픽사가 '월-E'의 친구로 사람들의 혐오대상인 '바퀴벌레'를 선택한 것은 아마 그들의 지닌 탁월한 생존력 때문일텐데, 바퀴벌레는 가장 성공적인 진화의 예로서 3억5천만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해왔다.

인간들이 '쓰레기'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에게는 최상의 생존 조건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런 점, 즉 우리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픽사는 '바퀴벌레'를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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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폐허를 이겨내는 방법

 

모든 것을 사라진 황량한 시간 앞에 평온하고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설령 감정이 없는 로봇일지라도....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과도 멀어지게 된다고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빠스'가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할 때 빠스는 사랑의 상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랑을 잃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서 길을 잃는 가장 고통스런 방식의 하나다.

이런 연유로 빠스는 '사랑'을 자기 자신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다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가는 치명적 도약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빠스의 명명법대로라면 사랑이라는 치명적 도약의 반대편에 있는 사랑의 상실은 치명적 전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월-E>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지구에 혼자 남아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보다 감정의 교감을 나눌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때 <월-E>로 하여금, 목적없는 임무가 무료하게 느끼게 하고, 시간과의 평화로운 동행을 깨뜨리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치명적 전락의 느낌때문이다..

사랑할 무엇인가를 잃은 시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교란하고 방해하는 훼방꾼이다.

이때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잃은 채 한곳에서 서성이게 된다.

그런 그에게 미끈하게 생긴, 이브가 등장한다..

자신과는 비교가 안되는 최첨단 신예 병기답게 막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월-E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은 매끈한 외모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정다감한 그녀의 성격 때문도 아니다..

그저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것...

이브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곳이 설령 폐허로 변한 풍경일지라도 상관 없었다..

이말은 결국 '사랑'이 없는 곳이 바로 폐허와 다름없다는 의미인데, 모든 것이 풍요롭기만 한 액시엄의 생활에서 폐허의 기운이 감지되는 것도 바로 사랑이 실종된 환경에 기인한다..

사랑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회복되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굳이 이성의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일...

월-E의 행동에 짜릿한 감동이 수반되는 것은 다름아닌 로봇이면서도 인간 본연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다.

기계가 천사의 탈을 쓰고 인간의 몸과 영혼을 삼킨 매피스토펠레스임이 드러난 지금, 유린당한 인간 본성의 귀환은 필연적이고 필수적이다.

물질이 관념을 집어삼킨 시대에 인간 본연의 마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사랑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탈환이 시작되는 지점이면서 인간이 폐허를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

 

 

덧붙이는 말-

월-E 앞에 홀연히 나타나 마음을 사로잡은 이브의 이름은 외계 식물 탐사용 기계를 뜻하는Extra-terrestrial Vegetation Evaluator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더불어 깔끔떠는 귀여운 캐릭터 모(M-O) 역시 미생물 박멸 로봇 Microbe Obliterator이라는 단어에서, 우주정거장의 이름은 자명한 공리를 뜻하는 단어 액시엄(Axiom)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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