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행진곡

syweon 작성일 08.08.31 12: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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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이란게 한없이 가볍고 간사한 것이라서, 아무리 예쁜 얼굴이라도 하루종일 쳐다보고 있으면 질리기 마련이다..영화라고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되는 국산영화나 헐리우드 영화의 경우 차별화되지 않는 진행 방식이나 스토리에 금세 식상함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영화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의 경우 숨겨진 명작(?)을 찾아 방황(?)아닌 방황을 하기 마련인데, 그러다가 자신의 맘에 드는 영화를 발견했을 때 희열이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

거두절미하고, 이번에 소개할 <누들>은 이스라엘에서 만들어진 보물같은 영화다...

어깨에 힘 들이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해 나가는 스타일이나, 행동(액션?)을 중시하지 않고 표정연기를 포착하는 섬세한 연출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는데, 그래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아닌게 아니라 여성 감독의 작품!!

<누들>을 찍은 '아일레트 메나헤미'는 < Divorce>로 이스라엘 오스카상이라고 일컬을만한 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있는만큼 자국에서는 이름 꽤나 알려진 명사인데, 하지만 정작 그녀가 유명해진건 영화보다는 동부 아시아 지방을 여행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 Doing Time, Doing Vipassana>를 통해서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하여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Golden Sipre를 수상했으며 미국 범죄와 비행 자문회로부터 PASS Award를 받았다. 그래서 그럴까?

<누들>은 화려한 볼거리 보다는 조밀하게 짜여진 사람과의 관계에 더욱 더 치중한 듯한 느낌을 갖게한다.

따라서 사건 위주로 전개되는 종적인 배열 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화합의 과정들로 이루어진 횡적인 배열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자칫 이런 배열은 짧은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해야하는 영화의 특성상 산만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이 여류감독은 자신의 가진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이런 단점들을 훌륭하게 극복해 나간다..

굳이 <누들> 뿐 아니라 요즘 국내에 소개되는 이스라엘 영화들을 보면 헐리우드 영화들처럼 단편적인 감각에 치중하기 보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소소한 삶을 주로 다루면서 그들만의 언어로 새롭게 승화시켜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영화에 대한 흥미가 단순히 낯섦이 주는 신선함 때문이 아니라, 꽤나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확보하면서 얻게되는 감동이라는 점이다.

나의 경우 영화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척도는 영화가 주는 감독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얻게되는 상상적 경험의 밀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감독의 전언보다는 그 표현을 내 것으로 되돌려줄 수 있는 강력한 정서적 감염력을 가질 때에 좀더 의미롭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베를린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레몬트리>, <오르>에 이어 3년 만에 칸 영화제의 황금카메라 상을 수상한 <젤리피쉬>, 그리고 이미 국내에 개봉했던 <밴드비지트>등이 매우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는데, 혹 이 영화들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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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계가 주는 오묘함..

 

<누들>은 갑자기 엄마와 생이별하게된 꼬마 이방인의 '엄마 찾아주기' 프로젝트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묘사에 더욱 주력하는 듯한 느낌이다.

스튜어디스로 근무하고 있는 미리(밀리 아비탈)는 두 남편과 아이를 잃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자신이 '재수없는 여자' 때문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불행을 부른다는 인식은 세상과 어떤 의미있는 접점도 마련할 수 없다는 자조를 낳게되고, 타인(하물며 가족까지도)과의 관계에 대해여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렇듯 그녀의 잠재 의식 속에는 세상과 타협을 거부하는 허무주의적 환멸의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까칠한 언니 길라(아낫 왁스만)는 남편과의 불화로 현재 별거 중에 있으며, 동생 미리의 집에서 딸과 함께 얹혀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길라의 남편과 미라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공유할만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두 자매는 그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고 있다..

따라서 두 자매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삼각관계' 쯤으로 오인하기 십상이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하고 오묘하다..

예컨데 두 자매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 '사랑 불감증'을 앓고 있다.

둘은 '방문을 안에서 걸어잠그는' 유폐의식의 심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미리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이별이고 길라의 경우 자신이 선택한 이별에 속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가족이면서도 '소통의 단절'을 느끼는 미묘한 상황이다.

둘은 분명 같은 공간,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조금도 타인의 틈입을 허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고독한 삶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리와 형부의 관계도 애매하다.

미리가 형부에게 다정하게 대했던 것은 자신이 겪었던 '이별의 아픔'을 언니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상황이었지, 결코 남녀 간 애틋한 마음 때문은 아니다.

따라서 두 자매의 '소통 부재'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부족에서 생긴 오해 때문이라는게 감독의 전언이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길라가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그녀의 별거는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뚜렷한 이유 때문이지만, 다른 사소한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자신의 부정을 은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과 동생 미리와의 관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예컨데 세상의 보편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가족'을 해체할 용기는 자신에게 없고, 다른 핑계 거리를 찾고 있다면 이해가 될까? 그녀는 이 과정에서 정상과 비정상, 참과 거짓의 기준이 마구 뒤섞이고 전도되는 '사랑의 정체'에 대해 '냉소주의'로 일관한다.

가령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게된 것은 한순간 착시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이지만, 그렇다고 그것과 화해하거나 타협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로지 점점 황폐해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거나, 혹은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손톱을 기르는 일 뿐이다.

따라서 두 자매가 보여주는 불화 양상이야말로 무기력과 불감증에 빠진 채 소통의 부재를 겪는, 현대인들의 상실감을 보여주는 한 극단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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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꼬마 이방인

 

그런 두 자매의 삶에 난데없이 한 이방인 꼬마가 끼어들었다.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여섯살의 중국인 꼬마..

미리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한시간만 맡아달라 부탁하고선 행방이 묘연하여 떠맡게된 애물덩어리...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관계를 풀기도 어려운데, 또 다른 가닥의 인연이 어설프게 끼어들 채비를 하고있는 셈이다.

이놈이 아는 유일한 언어라곤 '나는 중국 어린이입니다'라는 말 뿐..

그나마 언니하곤 같은 세대,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소통 부재의 상황이었지만,

요 꼬맹이는 국적과 언어, 사고방식이 자신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소통 방법 자체를 고민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몇시간씩이나 꿈쩍도 하지않고 엄마를 기다리는 의뭉덩어리..

제목으로 사용된 <누들>은 중국인 꼬마가 국수를 곧잘 먹어 미리 가족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하지만 국수의 어원인 'Noodle'이 라틴어 'Nodus(매듭)'에서 온 걸 감안하면 관계의 매듭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처럼 영화의 초반부는 엄마가 아닌 그 누구와도 소통을 거부하는 꼬마의 반항적인 모습과, '중국어 사전'을 준비하면서까지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미리와 그의 가족들을 대비시키면서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의 '답답함'을 설파한다.

이때 미리 가족이 느끼는 '답답함'이란 포크를 사용하던 그들이 처음 젓가락을 접했을 때의 답답함이다.

국수를 포크로 찍어먹을 수는 있지만, 국수는 역시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제격이다.

젓가락은 음식물을 찍어먹는 포크와는 달리 두 짝이 힘을 모아 음식물을 집어드는 도구다..

굳이 비유하자면 포크가 동물의 날카로운 발톱을 연상시킨다면, 새의 부리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은 서양인들에게는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물론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등장한다)

음식들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기 위해선 약간의 정성(?)이 필요한데, 그것은 두 개의 젓가락을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음식을 소중하게 들어올려야한다.

따라서 <누들>이라는 제목에는 위에서 언급한 '관계의 매듭'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음식을 먹는 수단인 젓가락에까지 '너와 나로 대변되는 관계의 미학'으로 의미를 확장시킨 셈이다...

젓가락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선, 가늘고 기다란 막대 한쌍을 서로 어긋나지 않게 잡아야한다. 그리고 그 접점을 가운데 중지를 사용하여 절묘한 균형을 맞춰야하는데, 이때 음식을 들어올리려면 너무 세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적절한 힘의 배분이 중요하다. 따라서 감독은 '젓가락 사용'에 동서 문화가 충돌되는 접경지역을 설명하면서, 인간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나갈지에 대한 이중의 재료로 활용했던 것이다..

더구나 감독의 탁월한 센스를 느낄 수 있는 건, '국수 먹는 방법'에까지 메타포로 사용한 점...

미라 가족은 성급하게 국수룰 잘라먹으려고 하지만, 꼬마 이방인의 경우 긴 가닥을 자르지 않고 후루룩 삼킨다..

이런 행위를 두고 '어지럽게 얽힌 인연의 매듭'을 성급히 끊지 말라는 감독의 의도로 해석하려 든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미리와 꼬맹이(누들)간 무차별적 나열로 환기되는 소통 부재의 상황이 아니다.

꼬마의 엄마를 찾아줘야한다는 지상 명제를 두고, 그동안 심각한 소통 장애를 겪었던 가족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의 과정을 더 주목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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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는 만났지만, 우리가 만났을까?

 

오늘의 인간은 소통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정작 소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기묘한 증상을 앓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내적 분열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누들>이 인간 중심적인 시선은 현대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골자가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실은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 '소통'을 전제로 한다면, 인간의 소통이야말로 삶의 진실을 구현하는 시발점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가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언어의 의미는 규정되고 통제받는다..

통제된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일상적이고, 사무적이며, 실재하는 세계에 맞춰 규정되고 정리된다.

하지만 상세하게 규정된 언어에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

객관의 세계에 분리되지 않는 주관적인 생각이나, 흔히 우리가 추상명사로 정의하는 감정 같은 것이다...

실제 '언어'로써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면, 진정한 의미는 실종되고 허무함만 남게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소통을 위해선 일반적으로 규정된 언어 이전에, 상대를 고려하는 진정한 마음이 선행되어야한다...

<누들>에서 중국인 꼬마를 등장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것이다..

소통이라는 단어는 서로 뜻이 통하여 오해가 없는 것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다.

소통은 단위가 크든, 적든 관계의 기본 전제라 할만큼 서로의 열린 마음을 요구한다....

서로의 뜻이 통하기 위해선 우선 언어 이전에 상대를 고려하는 마음이 있어야하며, 오해가 없기 위해선 자신도 진실해야하고, 상대도 진실한 것으로 믿어야한다..

<누들>과 미리의 경우 언어의 차이로 인해 생긴 '소통 단절'이지만, 미리와 길라는 서로의 상처와 사연을 드러내기 싫어 마음을 닫아버린 소통의 어려움이다..

따라서 감독은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가 더 심각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의미가 결국 '나'라는 존재와 변별되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면, 이말은 결국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절대불명의 진리와 맞닿아있고, 이것이 바로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셈이다... 

문득 어린 왕자에 나오는 '우리는 만났지만, 우리가 만났을까?'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는 나(1인칭)-그것(3인칭)의 관계로 만났지만, 나-너(2인칭)의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는 언제나 사막같았고, 우리는 언제나 외로웠다라는 구절...

외로움의 원인이 '사람이 없음'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 즉 '관계의 부재' 때문임을 알려주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은 수없이 많은 인연과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지만, 상대를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3인칭으로 취급해버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건 아닐까?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응답하며 배려할 때, 비로서 우리가 사는 이세상이 '사물의 세계'에서 '의미와 가치있는 세계'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누들>의 대사 중 '네 언니라서 미안해'라는 길라의 말에 가슴 뻑뻑한 통증을 느꼈던 것은 지금껏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관계'에 대한 반성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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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

 엄마를 찾아 떠난 베이징의 레스토랑 이름이 더블 해피니스(이중의 행복)였던 것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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