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맨 -다크나이트- "왜 대작인가?" (쓴물 단물 다 빨리고 끝물 탄 조낸 긴 리뷰)

세일러 작성일 08.10.21 10: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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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맨 -다크나이트- (1)

 

캐릭터를 통해 살펴본, 베트맨 -다크나이트-


 베트맨 비긴즈를 기억하는가? 크리스토퍼 놀란감독은 전작 베트맨 비긴즈를 통해서

 기존의 팀버튼 감독의 베트맨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베트맨이라는 히어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전작이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이 부모의 죽음을 통해 '악'이무엇이며,

악과 내면의 어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지에 대한 고찰로 이뤄져 있었고,

'비긴즈'라는 부제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베트맨 시리즈의 출발을 위해 일종의 전초기지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그 사전작업은 고담시티에 미래지향적이고 가상적인 건조물들을파괴함으로써

무대배경을 조금더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당겼으며,계속해서 좌절과 실패 또, 극복이라는

도식을 통해서 베트맨이 그저 평범한 인간. 즉, 물리력과 물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한 개인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며 공고히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베트맨은 차별성을 획득하게 된다.

눈알에 총알을 맞아도 튕겨내거나 자동차를 들어올리고 하늘을 날기는 커녕,

허구언날 두들겨 맞고, 똥개한테 물려서 피를 흘리는 점에서 베트맨은 여타의 히어로들과는

다르게 필연적으로 철저하게 물질에 구속된 입장에서 사회의 악과 정의를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그는 히어로들이 볼 수 없었거나 애써 외면하였던 시스템 내부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악에 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혹자는 베트맨 캐릭터를 이중인격으로 빚대곤 하는데, 이는 명백하게 오류에 속하는 해석이다.

이중인격이란 두가지 상이한 인격이 한 개인안에 공존하며 그 별개의 인격이 자의적인 통제를

벗어나고 충돌하는 증상 혹은 완전히 A와B의 인격으로 나뉘어져 A의 인격일때의 행동을 B의 인격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아분열증으로 규정되는 경우다.

 

 베트맨의 경우 '브루스 웨인'의 사생활은 베트맨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연막에 불과하다.

이는 이성적인 판단에 기반한 행위이며,의식적인 통제하여 놓여있는 상황이다.

고로 이중인격이라고 말하기엔 언어도단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세계제일의 부호라는 점이다.

그는 지구상의 그 어떤 인간보다 쾌락과 물질속에 살아온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선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길가메쉬 서사시를 떠올리게 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텍스트인 길가메쉬 서사시의 백미는 아래와 같다.

 

 친우인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한 길가메쉬는 그 충격에 영생을 찾아 모험을 계속하게 된다.

그런 그의 앞에 이슈타르의 변신인 시두리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길가메시여 어디로 급히 가려 하십니까? 
    당신은 생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도록 남겨두었습니다. 
    길가메시여 당신에게 충고를 드리죠.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낮으로 밤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줄

    어린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 안에 꼭 안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길가메쉬는 폭군이였다. 그는 원하는 여자는 모두 취했으며,

항상 최고의 음식과 화려한 옷에 둘러쌓여 철저하게 물질적인 삶을 살았던 왕이였다.

그런 그의 삶과 시두리의 말에도 불구하고 길가메쉬는 물질 이상의 것을 찾기위해

헤매이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수 천년 전의 고대 수메르 인들은

이미 물질과 삶의 불모함을 노래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브루스 웨인은 쾌락과 향락에 둘러쌓여 평생을 풍족한 물질속에서 안온하게 살 수 있었다.

물질을 넘어서 '이상'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물질로만 만족 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베트맨의 탄생을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브루스 웨인이라는 한 개인이

'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 이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베트맨의 캐릭터에 비판해야 하는 점이 있다면, 그가 세계에 만연한 악에는 집착하면서

인간을 악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적요인에 대해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흑인 범죄율이 높은 것은 미국 사회에서 극빈자들의 비율중 유색인종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가난이 대물림되고 계급이동의 기회가 단절되면 범죄율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물론 세계 제일의 거부라도 기아와 가난은 물리칠 수 없겠지만, 그정도의 권력을 손에 쥔

웨인이라면 하비덴트에게 제안한 것처럼 빈민들을 위한 양심적인 정치인들의 지원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베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게 되는 상징성을 획득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인 방편이였다.

여기서 브루스 웨인은 부모님의 사건을 변명삼는다. 그의 부모는 부호로서 사회적 자선활동에

많은 공헌을 하였음에도 결국 범죄에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선활동이란 결국 불우이웃돕기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사회적 약자를 대량생산하는 구조에 대한 개선이 없다면 그건 돈지랄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또한 베트맨은 법이 처단하지 못하는 악.

즉, 시스템이 처벌하지 못하는 공생적인 악을 처단하기 위해 그 테두리 밖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한다.

그러한 악이야말로 진정으로 사회를 병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스스로 시스템 밖의 범법자가 됨으로써 최대의 라이벌을 불러들이게 된다.

바로 베트맨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있는 '조커'다. 그 둘은 비록 태생은 다르지만 사회적 쌍생아다.

 

 

 

사건으로 바라본, 베트맨 -다크나이트-

 

 

 1.탈시스템적 실존.

 

 탈시스템적 인물들인 '조커'와 '베트맨'의 가장 큰 무기는 무엇일까?


 답은 '익명성'이다.

 

 그들의 진정한 무기는 시스템내에 존재하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예를들어 영화내 범죄자들은 아마도 이름과 사회보장번호 주소와 휴대폰 번호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범죄자는 개인으로서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며, 이것은 사실상 구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추적가능하다.

또한 범죄자들은 체제내 개인에 대한 폭력행사를 통해 권력을 구축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권력이 힘을 발휘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난다면 물리력 이외에

베트맨을 제재 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로 범죄자들의 주특기인

뇌물, 협박, 암살, 고문, 납치등은 베트맨이나 조커같은 이에게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베트맨이 범죄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이것에 있으며,

일반 범죄자와는 다르게 조커를 상대하기 힘들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처럼 마찬가지의 조건하에서 조커는 베트맨과 게임을 벌인다.

조커는 베트맨 앞에서 무력한 범죄자들을 규합하여 무차별적으로 보이나 사실은 치밀한 테러를 감행한다.

조커는 시스템 내부의 베트맨에게 협력적인 주요 인사들을 살해하고, 고담시 전체의 민간인을 인질로 삼아 협박한다.

 

 -베트맨 짓거리 관둬라. 아니면 얘네들 다 뒈진다.-

 

 이러한 조커의 횡포를 TV를 통해 지켜보던 베트맨은 이렇게 얘기한다.

 

 "조커는 선을 넘었어."

 

 그리고 알 프레드는 이렇게 답변한다.
 
 "선을 먼저 넘은 것은 주인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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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선을 지키기 위해 공공선 테두리 밖에서 싸워왔던 베트맨은 이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베트맨의 가면을 쓰는가? 그리고 왜 그것을 유지해야 하는가?

조커는 베트맨의 고뇌와 결단을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기에 그에게 질문한다.

3천만 고담시의 목숨이라는 담보앞에서 베트맨이 그의 가면을 벗지 않는다면,

베트맨은 조커와 다를바 없는 시스템의 사생아가 된다. 똑같은 혼돈일 뿐이다.

따라서 베트맨은 조커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신념이 명징한 선의 확립이기에

베트맨은 스스로를 타락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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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브루스웨인의 고백에 앞서 고담시 청렴검찰의 표상이자 '화이트 나이트'로 불리우는

하비 덴트는 스스로가 베트맨이었음을 밝히고 그를 지켜낸다. 둘의 협력으로 조커의 계획은 무산되고,

혼돈과 질서의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한다. 혼란한 상황 만큼 관객들은 화면에 몰입되어 간다.

 

 

 2.가치의 파괴 
 
 영화내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조커는 돈을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돈, 명예, 권력, 여자등 일반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조커를 단순한 미치광이 범죄자로 폄하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관객은 고뇌하게 된다.

 

 아마 조커는 베트맨이라는 타자를 통해 시스템이란 것이 한편으론 얼마나 허약한 체제인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너와 노는게 너무나 재밌어!"

라고 스스로 베트맨에게 밝혔듯이 조커에겐 그것만이 진실하고, 즐겁고, 가치있는 행위이다. 

그러한 발판 위에서 시스템을 파괴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개인들에게 질의하는 것이야 말로 그의 목적이자 향흥이다.

 

 조커가 테러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가치의 파괴'에 있다.

조커는 시스템이 낳은 공리, 권력, 화폐, 법으로 대변되는,

어찌보면 허황된 가치들을 허물고 그 폐허위에서 알맹이가 된 개인에게 질의한다.

 

 "인간은 왜 선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간소하게 설명한 사건을 통해 조커는 베트맨에게 묻는 것이다.

 

 "너의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이 죽는다.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롭기 위해 불의하겠는가?"

 

 그리고 하비 덴트의 연인이자, 브루스 웨인의 친구인 레이첼의 목숨을 놓고 벌인 게임에서

베트맨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하비 덴트를 선택하고 레이첼을 포기한다.

반면 이 사건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도 같았던 연인을 잃은 하비 덴트는 육체적, 정신적 절망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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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모든 것인 레이첼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사실 내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라는 조커의 의문에 하비 덴트는 고뇌하고 결국 타락하고야 만다.

 

 이윽고, 조커는 고전적인 게임이론인 '죄수의 딜레마'(더욱 악질적인)를 연상케 하는 테러를 감행한다.

죄수들이 수용된 선박과 민간인이 탑승한 두척의 배에 각각 폭탄을 설치하고 서로 상대방 배의 기폭제를 쥐어준다.

그리고 00시까지 한쪽의 배가 폭발하지 않는다면, 양측의 배 모두를 터트린다고 협박하였다.

 

 가혹한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은 그 혼란스런 와중에도 투표를 통해 상대방 배를 터트려야 할지 결정하기로 한다.

이윽고 약속한 시간이 나가오고 결국, 사람들은 상대방 배를 폭발시키기 위해 기폭장치를 움켜쥔다!

이를 통해 조커는 또다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이 너희들을 보호하지 못할 때에, 그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너희들은 선할 수 있는가?"

 

 대답은 무의미하다.

 

 오직 행위만이 의미를 갖는다.

 

 결국 기폭장치를 손에 쥐고도 그 누구도 상대편 배를 날려버리지 못한다.

비록 그것이 선량함에서 비롯되진 않았지만, 죄를 짓는 행위를 기피하는 것-특히 대량살상의 경우-이 때로는

신뢰를 구축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죄책감이 우리가 선해야만 하는 이유를 증거한다면 그또한 얼마나 허무한 일이겠는가?

 


 3.윤리의 근저

 

 그렇다면 죄책감을 넘어서,

 그리고 논리와 공리를 넘어서,

 우리는 무엇을 윤리의 근저로 삼아야 하는가?

 감독은 영상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베트맨은 조커를 쫓기 위해 핸드폰을 매개로 한 일종의 도청장치를 사용한다.

이것은 핸드폰 감청은 물론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소나(SONAR)의 기술을 응용하여 공간 데이터까지 취합하고,

이를 3차원으로 구성하는 완벽한 추적기능을 갖고 있다. 사실상 모든 고담시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통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베트맨은 최후의 순간에 장치를 파괴함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한다.

 

 이 장면이 의도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오래된 고전 하나를 들추고자 한다.

 

 희랍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 '기게스의 반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게스는 리디아의 왕을 섬기는 평범한 목동이었으나, 어느날 우연히 한 동굴에서 반지를 얻게 된다.

그 반지를 착용하면 놀랍게도 주위 사람들은 그를 '인식'할 수 없었다.

기게스는 여러가지 실험과 행동을 통해 반지의 힘에 매혹되었고, 악행을 일삼는다.

투명인간과 같은 효과를 지닌 반지를 손에 쥐게 된다면,

사용자는 사회적 제재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게 된다.

그 어떤 징벌이나 사회 관습적 도덕이 무의미해 지는 것이다.

이처럼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논리적, 도덕적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아무것도 우리를 강제 할 수 없을 때에,

   인간은 왜 선해야 하는가?"

 

 

 우리는 대답 할수 있는가?

그 무엇도 우리를 제재 할 수 없다면, 당신은 어떠한 논리로 스스로의 도덕심에 호소할 것인가?

저 권력의 첨단에 섰던, 많은 권력자들이 독재와 전체주의로 타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혼돈을 상징하는 조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헐벗은 개인이야말로 가면이 제거된 진정한 주체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감독은 베트맨이라는 영웅을 통해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베트맨은 반박하거나 논증하지 않는다. 아니, 아마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로 베트맨은 침묵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는 묵묵히 자신이 만든 추적시스템을 스스로 파괴한다. 베트맨의 행위가 옳음을 우리는 부정 할 수 없다.

 

 진정한 윤리의 근저는 스스로 세운 규율이다.

그것은 법과 공리, 실용성이나 이해득실과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당하지 않은 눈앞의 이익과 권력을 포기하라! 그 누구도 그대의 죄와 그대의 선을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 강력한 자기절제와 규율이야 말로 진정한 선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란 말과같이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가 사회라는 체제에 종속됨으로서 개인이 그 넘어를 상상한다는 것이

어느덧 반사회적이거나 사회부적응적으로 폄하되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규제는 도덕과 윤리마저도

시스템안에서 규정되졌으며, 개인은 이러한 법률을 준수 함으로써 정의롭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평가되어 진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간혹 '저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거야'라고 타인을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스템이 조장하는 도덕과 윤리가 과연 진실한가?

그것들을 준수한다고 근대적 주체인 우리가 과연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스스로의 선량함을 신뢰하고 있는 것인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체제 속에 길들여진,

이름도 고상한 '근대적 주체'들에게 조커의 질문은 엄숙하기 그지 없다.

우리는 매일 같이 타인의 배를 침몰시킬 목적으로 공부하고, 경쟁하지 않는가?

이미 질의는 우리 삶과 내면에서 매일같이 검증되고 대답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대답은 선했는가?

 

 

P.S 아놥.....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이 보이는군요. 아직 멀었업..ㅜ_ㅠ

      뭐 그래도 대충 의미전달은 될 듯 하오니,

      개인적인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지만, 베트맨이라는 영화를 이해할때

      어느정도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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