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릭트9은 안전합니다. 그래서 안전할 뿐입니다.
제가 쓴 이 문장을 더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매트릭스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살펴보죠.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다른 아닌 가상실재, 즉 시뮬라크르의 미혹속인 것이다.---
장자의 나비와도 일견 통하는 부분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제로 전환된다' 이 부분입니다. 장자의 나비는 실재와 파생실제가 혼재된 부분에만 주목했지만, 보드리야르는 파생실제가 언젠가는 실제를 대체한다고 믿고 있는 의미의 부분. 이런 거죠.
그런 의미에서 디스트릭트9은 어떻게 보면 가장 추레한 시민사회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작품 자체가 그런게 아니라, 작품과 작품 외부의 현상들로만 연결지어 보자면, 시민이 실재에 대해 냉담한 모습이 극렬화된 현상이랄까요.
디스트릭트9은 외계인을 차별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요소로 만든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업적으로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일단 차별이라는 부당한 모순을 내세워 극을 이끌어나가려는데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극에서 외계인의 역할은 생각보다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외계인이라는 것이 주체로 스며들어오지 못하고 객체로만 남기 때문입니다.
외계인들은 디스트릭트9에서 삶을 영위하지만 그건 우리 지구의 슬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슬럼에서 살아가는 입장들도 첨부되어 주면 좋겠죠.
그런데 문제는 외계인들의 외양과 행동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그 외계인의 입장에서 심화되고 공유되는 시각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일견 그 브라질의 특수경찰들을 중점으로 맞춘 영화 엘리트 스쿼드에서 보이는 입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외계인은 한 번도 자신들이 처한 입지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상황, 그 외 어떠한 에피소드들도 외계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골때리는 것은 그런 표현의 입장이 인간들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 차별하는지, 어떻게 차별하게 되는지, 뭐가 싫은 건지, 그들과 이야기는 할 수나 있어봤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 따위는 이미 은하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별이라는 주제는 점점 희석되고 안전한 영역으로만 남게 됩니다.
즉, 차별의 폭력적 외양에만 집착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차별은 나쁜 것이라는 단순한 메세지만 전달합니다.
그러다보면 차별이라는 상황의 복합적인 내면들을 무시하게 되버리는 겁니다.
차별을 하는 주체나 차별을 당하는 객체나 다 껍데기만 남는 거구요.
태생 자체가 어차피 사건 위주의 구성으로 흐르게 된 것도 있고, 피터 잭슨이 극비로 했다! 라는 슬로건도 있으니만치 어차피 그렇게 흘러갈 극 구성인것도 뻔히 알고, 나름 역지사지 플롯이나 희생이라는 플롯으로 꾸며넣은 것도 어느 정도 영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차별'을 논한다는 건,
말 그대로 매트릭스의 배터리가 되기 위한 초기단계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실제의 상황을 보죠. 지금 한국에서도 외국인 차별반대 운동과 외국인 차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문제는 서로 다른 측면을 보고 있습니다. 외국인 차별반대쪽은 나름대로 국가시스템화된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깊숙히 자리잡은 미개에 대한 파시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반면 외국인 차별 쪽은 그들이 한국에서 실제적으로 시민에게 해를 입힌 것과 그들이 노동력을 바치고 해외로 빼내는 재화라는 측면을 바라보죠.
이 둘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국 내에서 다문화가정을 만들고 난리를 치고 해도, 그 둘에 대한 문제가 희석되고 어느 정도의 법 혹은 정서라는 접점을 마련하지 않는 한, 이 두 움직임과 견해는 계속 평행선을 달릴 겁니다. 그렇다면 실제 문제에서 이 두 카테고리의 접점은 과연 어떤 것이 마련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외국인들이 이 상황에 어떻게 스며들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겁니다.
만약 작가가 이러한 부분에서 인간과 에이리언을 다루고, 파고들어갔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은 훨씬 더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진짜 실재에 내재되어 있는 동인들, 혹은 요소들이 상업적 의도에 의해 배재된 결과물을 가지고 진짜 '차별'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죠. 즉, 차별이란 요소는 그저 그저 포장지에 불과할 뿐 그렇게 큰 의미도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 논쟁의 핵심들을 지나쳐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일견 봉준호의 괴물을 떠올리게도 하는 구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뮬라시옹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일단 사람들이 그 주제나마 환기를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역설적으로 시민사회의 냉담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구요.
사족 1. 주인공은 아무런 현실의 존재감이 없는 NGO적 띨빵이로 보이다가 역지사지의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역지사지를 제대로 체험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실에 대한 순응으로 끝나는 것은 그래서 희한합니다. 자신의 급한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그렇게 극중에서 노력했던 자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외계인이 된 현실상황에 대해서 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꽃이나 접는다는 게 되려 우습습니다. 그런 캐릭터라면, 이제 좀 더 고뇌의 부분과 함께 외계인에 대한 권익 향상에 대해서 행동하는 장면이라도 나왔어야 할 겁니다.
이런 부분에서 캐릭터들이 껍데기가 되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헉 스포가 되어버렸다)
사족 2. 전 오히려 왓치맨의 메타포들이 훨씬 더 차별이란 명제에 복합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희한한 건 '그 분'의 작품은 왜 영화로 만들면 당대엔 재미없다가 나중에 씹을 수록 재미가 있는 것인지 ㅋㅋㅋㅋㅋ
사족 3. 더 희한한 건 무기가 정말 대박으로 강한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학살에 실험까지 당하는 외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