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와 사법의 빈틈은 현인류의 가장 큰 딜레마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딜레마가 가져다주는 상황을 스토리로 만든 것은 꽤 많습니다.
사실 그런 면에서 모범시민의 이야기가 별 색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른바, 스토리 작법 관련 서적에서조차 기본적으로 가르쳐주는 '복수극'이라는 거죠.
이런 부분에서는 선례가 있기 마련인데,
옛날 영화, 데쓰 위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찰슨 브론슨을 유명배우의 위치에 올려놓고 그 뒤로 시리즈물의 늪에 빠지게 만들었던 이 첫작품은
건설현장 직원이던 사람의 가족이 다 죽자
법의 심판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갱단들을 무참히 죽여버리죠.
그 과정도 나름 지능적이라, 대놓고 쳐들어 오라 한 후 집에다 부비트랩을 설치해서 죽여버리는 방식도 있고.
바로 총으로 쏴죽여버리기도 하고.
평론가들에게서는 유치한 삼류 복수극이라는 평을 들었던 이 작품은 당시 대히트를 쳤죠.
그런데 조금 다르게, 그런 과거의 선례들과 같지않은 느낌, 그래서 놀라운 요소가 있다면,
이건 거의 데스노트에 가깝다는 겁니다.
주인공의 정의가 전부다 라는 개념을 지독하게 맛보았던 것이 데스노트죠.
(물론 영화판이 아닌 만화판의 이야기입니다)
허나, 데스노트도 이 모범시민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권선징악적 결말입니다.
권선징악적 결말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가장 추앙받는다는 결말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하기사, 시나리오를 쓰는 어떤 서적에서든 현실과 관객의 도덕성 이상을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도 많습니다만,
실제로 현실은 스워드 피쉬에 가깝죠.
악한 자도 가책없이 편안하게 늙어죽는.
그게 가능할 수 있는 건 말이죠.
실지로 이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단순한 정글적 논리에서
그 악하다고 평가되는 자들이 자신을 승리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부심의 문제까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부분에서 잠시 이 모범시민은 혼돈을 가져다 주는 느낌입니다.
캐릭터가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꼬리를 잡히는 상황도 그렇고,
캐릭터 스스로가 10년동안 복수심에 불탔는지 어쨌는지에 대한 문제도 명확하게 설명되진 않습니다.
즉, 복수극의 껍질을 쓰고 있는데 캐릭터의 정당성은 사법적 정의의 엉망진창을 논하는 방향으로 간단 말이죠.
그 점이, 아마 일을 저지르는 주인공이 마지막까지 잘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장면에서
묘하게 이건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느낌을 던져주는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결말을 다른 버젼으로 하나 내놓는 것도 재밌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 사족~~
예를 들면 마지막에 검사에게 편지가 오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나레이션으로 깔리면서
클라이드가 살아있음을 암시하는 증거, 팔찌가 동봉되어 있다는 식이면 좋지 않을까용......
그 나레이션이 깔리는 동안,
그가 미리 준비해놨던 다른 루트의 길로 빠져나가는 모습과 함께, 어딘가 공항에서 웃으면서 비행기표를 끊는 결말.
복수심?
그건 이 팔찌와 같았어.
작지만 항상 내 팔에 붙어있는 거지.
그러나 이 팔찌는 내 몸도, 내 심장도 아냐. 하물며 내 머리도.
당신이 그 살인범을 풀어줬을 때 깨달은 게 뭔지 아나?
난 패배했고 정의는 없었어.
누구나 정의는 있지. 심지어는 법도 있어. 그러나 하나같이 쓸데없었지. 달라진 게 없어.
그렇다면 뭐가 그 때의, 또 지금의 나를 달래주겠나?
나를 달래주는 건 지금도 잘났다고 뻗대고 사는 당신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걸 증명해내는 것에 있는 거였지.
난 그걸 해냈고, 내가 승리자야. 당신들은 멍청한 패배자고.
당신의 딸은 잘 크길 바래.
아버지를 닮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