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때부터였던가요.....
일종의 철학적 아이러니를 집어넣어 극을 풍성하게 만드는 경우라는.
물론 그 전에도 수많은 도전들은 있었습니다만,
더 문은 꼭 큰 스케일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로 아기자기 해줄 수도 있구나! 하는 블루오션같은 영화였습니다.
스펙타클이나 액션을 바라는 분들, 혹은 기분 풀려고 극장가셨던 분들에게는 별로 안좋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요란하게 치장된 말의 향연이 아닌
이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같은, 덤덤하면서도 어느 순간 뭔가 확 질러오는 그런 느낌.
설명하자면 느낌이 그런 겁니다.
단순한 상황처럼 보이는데 중의적 느낌을 주는.
예를 들어 감독이 차용한 저 한글, 사랑이라는 말도 의미심장하죠.
감독의 인터뷰 선상에서는 저 사랑이라는 말에 크게 의미를 두었다는 단서는 발견하기 힘듭니다만,
한글의 의미로 그것은 아껴준다, 보살핀다, 등등의 의미가 크죠.
하지만 극중에서는 그러한 의미의 이름이 붙은 기지에서 있으면서도
외로움, 그리움, 그 외 여러가지 개인적 고뇌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상황이 되어버리죠.
거기에 자기 자신과 탁구를 쳐야 되는 황당무계함까지 덤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집에 가고 싶다는 말까지.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네 인생 모든 것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잔인함같은 의미! ㄷㄷㄷㄷ
(이런 의미의 부여는 대부분의 통속적 요소들이 사랑을 너무 미화하는데서 오는 역반응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낄낄낄)
이런 식의 의미가 하나 둘씩 녹아들어 갑니다.
3년동안 성찰 아닌 성찰을 해온 자신과 3년이 지나기 전의 자신이 맞닥뜨리는 상황,
그 성찰해온 자신이 죽음을 예약해놓고 이제 막 태어난 미속한 자신이 딸을 보러 지구에 가는 새로운 상황.
그리고 자신에게 할당된 명제인 인간의 보호와 회사의 명령 두 개 딜레마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스스로 발견해 행하는 인공지능까지.
그냥 스토리는 죽 흘러가는데
그게 작가의 완전한 의도만 나열되어 파고들어갈 부분이 없는 견고한 성이 아니라,
미묘하게 관객이 생각하고 채울 수 있는 빈틈들이 생기는 것.
그게 이 작품의 진짜 묘미라고 생각하네요.
사족으로 :
감독인 던칸 존스는 데이빗 보위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유명세 때문에 이름도 바꾸었지만,
아버지는 필독서를 권장해 줄 정도로 자상했었던 부분이 있네요.
그런 것들 중에는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것도 있고 ㄷㄷㄷㄷㄷ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