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니싱(Vanishing), 제목 그대로 어느 순간 사람들이 없어지는 이야기 입니다. 정체 불명의 정전이 일어난 후 도시 전체는 어둠에 잠기게 되고, 빛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입고 있던 옷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지게 됩니다. 말 그대로 허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셈입니다.
정체 불명의 어둠은 태양이 뜨는 시간까지 빠르게 잠식하여 하루의 대부분을 어둠에 휩싸이게 합니다. 또 그것들은 살아 있는 듯 사람의 형체를 이루며 극중 주인공들을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건전지 하나 들어있는 손전등에 의지해 어둠에 잠긴 도시를 정처 없이 헤매는 인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긴장하게 합니다. 언제 어디서 건전지가 방전돼 어둠이 주인공을 집어 삼킬 수 있다는 긴장감은 그럴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어둠이 자기 마음대로 전기를 켰다 껐다 하는 부분(예를 들면 가로등을 키거나 끄는 것)은 어설픈 귀신 놀이로 보였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미스터리 물로 가려면 귀신 놀이 보단 실체가 없는 어둠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좀 더 괜찮았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살아있는 어둠들이 인물들을 그들의 그리워하던 과거 기억 속 사람의 형체로 어둠 속으로 유인하는 장면은 여러 귀신 영화에서 등장하는 장면과 얼추 비슷한 부분들입니다. 차라리 도시 전체가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며 생존한 사람들의 패닉 상태와 분열 그리고 미지의 존재에 대한 극한의 공포심을 묘사했으면 좀 더 재미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수백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에 10명 내외의 사람들만이 마지막 생존 했다는 것(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보자면)은 어느 정도 억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요즘 휴대폰 없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면 고작 몇 명만이 손전등을 들고 있는 상황은 좀 처럼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화 설정상 모든 전자제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시적 방전이 되어 모든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라고 하면, 도대체 손전등과 영화 속 바(BAR)에 등장하는 발전기는 어떻게 작동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전체적으로 여러 가지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특정 상황 설정 아래의 긴장감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어느 정도 몰입해 볼 수 있으실 겁니다. 저도 영화의 극중 설정이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지, 어둠 속 빛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불나방들처럼 이리저리 다크 시티를 돌아다니는 주인공들의 심리적 묘사와 패닉 상태는 꽤 몰입해서 보았습니다. 특히 주인공들이 계속 되내이는 자신들의 이름과 존재성은 자아를 가진 개별 존재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우리들의 삶과 죽음을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상당이 오싹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허무의 공간만 존재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있다는 점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죽어서 아무것도 없다면 지금의 고뇌도 죽어서 할 필요 없겠죠.
결론적으로 미스트와 사일런트 힐 종류의 미스테리 극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라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개중에 지겨운 분들도 있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