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완 (black swan)
‘블랙스완’이라는 영화는 어느 발레리나의 완벽에 대한 열정과 동시에 무용계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캐스팅에 대한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영화 자체는 주인공 니나의 완벽에 대한 집착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광기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극단에 4년째 몸담고 있는 니나는 전직 무용수였던 어머니와 함께 살며 작품의 주인공으로 발탁될 날을 기다린다. 그녀는 주인공을 동경하며 그의 역할은 완벽함에서 나오는 거라고 확신하며 오로지 완벽함 그 자체를 위해 연습을 한다. 그녀에게 있어 perfection은 예술적 모토이며 절제와 교과서적인 규칙에서 나온다. 이는 흡사 피겨 스케이팅과 같은 느낌을 풍긴다.
관람을 위한 무용 예술에서 국제적인 경기로 발돋움 하며 교과서적인, 소위 말해 정석 예술로 바뀐 피겨 스케이팅은 예술적 아름다움 보단 기계적인 체조에서 완성되는 극도의 절제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신체의 유연성을 극한으로 발휘해 이상적인 동작을 완성하는 피겨 스케이팅은 선수 본연의 표현과 플롯에 대한 감정 이입도 중요하지만 동작 자체의 완성에 대부분의 비중을 둔다. 사람들은 무용수 자체의 감성적 표현 보단 그녀가 이루어낸 극한의 신체적 표현에 경이를 보낸다.
발레리나와 같은 무용 예술도 같은 종류의 경쟁을 거친다고 생각한다. 무용 예술 자체가 집단 예술이기 때문에 다른 영역과 비교했을 경우 개개인의 표현에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발레리나의 경우 수십명의 무용수에서 주인공 하나를 발탁하기 때문에 개인의 표현보단 작품 감독의 기준에 주안점을 둔다. 결국 극단내의 경쟁은 수직적인 기준을 위한 경쟁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작품에 참여하는 모든 무용수는 개별 특성 보다는 감독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니나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영화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에 대해 주로 말한다. 하나는 주인공이 되기 위한 무용수들의 갖은 노력이고 두 번째는 오로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승리하려는 니나 자신의 투쟁이다.
전자의 경우 영화 속에서는 몇 분의 scene으로 표현되지 않는데, 사실 이 문제는 최근 불거지고 있는 국내 무용계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
한 예술 대학 교수의 폭력 사건으로 표면에 떠오르게 된 관련 예술 분야의 어두운 단면은 씁쓸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교수가 학생들의 졸업 작품과 공연 티켓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교수가 원하는 데로 해야 한다. 어떤 교수는 학생들이 그의 개인 비서가 되기도 하며 생활비 전체를 부담하기도 한다. 이는 중세시대 봉건 귀족들이 누리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다를 바 없다. 한 왕국(해당 교수가 근무하는 학교)에 들어간 가신(고학력 학생들)과 종(새로 들어온 학생들)들은 철저히 그들의 군주(교수)에 복종하며 공통적인 집단을 형성한다. 그들 집단은 서열에 대한 구분이 확실 하며 이는 어느 범죄조직 못지 않다. 군주에 대한 도전은 그들이 향후 일하게 될 왕국들(예술 분야)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 인생이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학생은 교수와 잠자리를 갖기도 하며 심할 경우 학생 전체일 수도 있다. 혹자는 매우 과장된 이야기라며 고개를 젓지만 이번 사태로 언론의 도마 위까지 올라온 예술계 추악함은 사실 그대로일 가능성이 크다.
영화 속 주인공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뇌한다. 소녀적 감성을 지닌 그녀에게 있어서 성적 매력으로 자신의 배역을 노리는 것은 자못 충격적일 것이다. 특히 소녀들이 흔히 겪는 성인 여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대로 적용된 니나는 성인 여성의 매력을 가진 릴리를 질투하고 경계한다. 결국 흑조의 역할은 소녀에서 여성으로 탈피한다는 일이며 이는 따뜻한 요람에서 차가운 세상으로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소녀의 순수함을 버리고 흑조의 타락함을 갖는 것은 작품내의 일이 아니라 그녀 본성 자체를 바꾼다는 일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자체가 그녀에겐 매우 큰 스트레스를 주게 되었고 급기야 그녀는 영화 중간 중간 정신분열증적인 태도를 보인다. 영화에서 마이클은 이번 작품 백조와 호수가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고 그는 니나에게 흑조 연기를 위해 그녀 본연의 감정에 충실 하라고 한다.
마이클의 태도도 영화 내내 이중적으로 보인다. 그는 다른 단원들의 평가로도 꽤 호색한으로 그려진다. 처음 니나가 그에게 주인공 발탁을 위한 부탁을 하러 왔을 때도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요구하는 대신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녀에게 *어필한다. 흡사 첫경험을 겪는 여자를 잠자리에서 리드하듯 그녀가 조금씩 이면의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사실 그의 방법은 니나에게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다.
성적 쾌락에 눈을 뜨게 된 니나는 이제껏 살아온 생활 패턴에서 탈선하여 여러 가지 사건을 체험한다. 그리고 기존에 가져왔던 규칙을 조금씩 버리며 완벽한 흑조에 한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
고상하게 비유 해서 백조,흑조라 부르지만 단순히 백조는 순결한 여성 흑조는 창녀를 뜻한다. 감독은 백조인 니나에게 강제적으로 흑조가 되도록 하고 이는 그녀를 간접적으로 겁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personality가 손상되는 일은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며 또 매우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영화 속 니나는 소녀에서 점점 현실적인 요소와 개인적인 갈망으로 타락해간다. 영화는 한 배우의 예술적 성취와 아름다움을 그리지만 현실에서 보면 그저 직업적인 슬픔뿐이다. 이제껏 걸어온 길이 출발지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면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이는 무용수뿐만 아니라 어느 직업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무용수와 같은 예술인들은 그들의 일 자체가 사회적 부산물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이다.
무용과 같은 폐쇄적인 분야는 더욱 그렇다. 무용수들에게 있어서 공연 티켓 커미션(commission)은 그들이 버는 돈의 액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커미션은 맡은 배역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커미션이라는 무기를 손에 쥔 감독, 공연주는 이들 위에 영원히 군림할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배우의 정신분열적인 고뇌와 열정 등을 보여주었다. 이면의 어둠은 표면상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무대 앞 관객들에게 무대 뒤의 어수선함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관객은 그저 아름답게 화장된 배우들의 기계적인 웃음만 볼 뿐 뒤쪽 상황은 관심 없기 때문이다
끝에서 니나는 자신을 줄기차게 괴롭히던 또 다른 자아, 즉 흑조의 본성을 향해 징벌을 가한다.
이는 자기자신에 대한 징벌이며 결과적으로 그녀 자신의 절반을 죽이는 것과 같게 된다.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대립에 관한 해묵은 논쟁일 수도 있고 미숙한 어린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죽음으로서 이중적인 선과 악에 도달한 니나는 진정 승리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주변 상황에 의한 강합적인 희생일까?
마지막에 니나는 완벽함의 경지에 올랐다며 무아지경의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만큼 그녀는 행복하다. 릴리와 같은 방법으로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만의 예술적 완벽함에 도달해 관객들의 기립 박수를 받아내었다.(마지막에 니나가 과다 출혈로 죽는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투쟁이 실패 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엔딩 순간에 완벽함에 도달했다며 기뻐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머지 인생을 포기하게 되었으므로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생을 승화한 예술적 경지를 단순히 수적인 양으로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배우는 작품에 동화되어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연기를 할 뿐이지 작품의 줄거리 대로 실제의 인생을 살 필요는 없다. 실제의 플롯대로 자살을 해야 완벽한 완성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좀더 고상한 자살 쇼일 뿐이다. 보는 이의 말초신경을 만족시키는 단순 유흥거리 밖에 안 된다. 니나의 죽음이 그래서 좀 더 그럴싸하게 포장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꽤나 멋있게 들릴 것이다. ”발레는 고상하니까 역시 배우도 고상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어, 그녀는 결국 현실과 타협하느니 그녀 내부의 어둠을 스스로 죽이고 저 정도 경지에 도달했어!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물론 니나 본인은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외부 현실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녀의 캐릭터를 바꿨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녀가 죽지 않고 극을 마무리 지었다면 오히려 그녀가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강박관념에 의해 본의 아니게 자살까지 하게 된 것이다.[ (현실의 스트레스->강박증->신경 쇄약->정신분열->자살) 이는 우울증 환자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녀가 정신과 치료를 적절히 받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요약해서 블랙스완은 발레리나들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그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인 상황까지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아름답게 포장만 할 뿐이지 현실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은 채 허무하게 끝이 난다. 여러모로 뒤끝이 찝찝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