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관계도를 보면서 생각한 건 확실히 시나리오는 잘 빠졌다는 겁니다. 딱 제가 좋아하는 형태의 시놉이죠. 몇 개의 세력이 있고 거기에서 얽히고 섥힌다. 풀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잘만 풀어진다면 최소 기본 이상은 하는 편이죠. 굳이 100억 운운을 하지 않더라도 베를린은 상당히 잘 만든 웰메이드입니다. 부당거래에서부터 꽤 신경을 쓰는 류승완 감독의 미장센이 빚을 발하기 시작하기도 하는게, 몇개의 씬은 국내 세트장이라는데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죠. 심지어 떨어지는 건물씬 자체도 원래 있던 곳을 그대로 살린 세트였다고 하고. 배우들 자체들의 에너지도 꽤 충만하고, 캐릭터들도 잘 빠진 상태로 있고, 류승완은 이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갔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딱히 흠을 잡을 만한 구석이 있다면, 대사가 녹음의 문제인지 발성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북한 말이라는 점에서 전달이 잘 안되고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느낌이 너무 크다는 점이 하나 있군요. 한국형 본시리즈라고 하는데, 사실 표현법으로만 보면 본시리즈와 접점을 찾긴 힘들고, 오히려 한국 주먹영화들 쪽의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한국의 주먹 영화들의 특징은 사정상 항상 고정된 카메라의 앵글 속에서 인간들이 앵글계산을 하며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핸드헬드로 흔들리며 빠른 템포를 잇는 본 시리즈의 표현법과는 확실한 차이가 보이는 편이죠.(재밌는 것은 그런 고정앵글의 문제가 또 과거의 중국무협영화나 성룡 등의 영화에서 파생된 흔적이 많이 보임. 달리도 크레인도 사용하지 않는 형태의....) 부당거래에서는 사실 캐릭터들이 좀 붕뜬 느낌이어서 조금 걱정도 됐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베를린의 구도에서는 그럴 일들이 없어서 오히려 캐릭터 연기들이 빛이 나는 것 같더군요. 전지현의 캐릭터야 어차피 내러티브를 아무리 줘도 본드걸 같은 들러리 수준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 장르의 특징이고, 류승완 감독이 원래 그런 소질도 크게는 없지만, 그런 장르의 특징 속에서도 개성은 충분히 나오는 것 같은 연기라고 봅니다.
사족으로, 1. 한석규가 나오는 초반에서는 마치 쉬리 2 같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습니다. 쉬리 이후 바깥으로 떠도는 나이먹은 노장의 국정원 요원 같은 느낌? 이것은 또 비유하자면 마치, 존 맥클레인이 나이먹고 힘빠진 상태에서 죄수를 데리고 법정까지 가야하는 식스틴 블럭의 느낌같은 거랑 비슷하달까.그런 면에서도 묘한 재미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만 한석규의 연기 페이스도 이제 슬슬 바뀌어야 되지 않는가 싶은 구석이 있네요. 유들유들 닳고닳은 캐릭터라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지만, 너무 틀에 짜인 한석규의 연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 2. 원래 국정원의 정진수역은 없던 캐릭터로, 온전히 북한의 이야기로만 가려는 게 류승완 감독의 생각이었습니다만, 이런 저런 사정들로 정진수역이 생기게 되었다는 후문도 있네요. 3. 이경영은 오히려 나이를 먹고 더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