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버호벤이 네덜란드에서 헐리우드로 진출하려고 고심할 무렵 그는 한 편의 시나리오를 받습니다.
그는 그 시나리오를 쓰레기통에 쳐박습니다.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은 자신에게 3류코믹같은 SF시나리오라니.
하지만 그걸 쓰레기통에서 다시 집어들어 읽은 그의 아내는 폴에게 말합니다.
"이 작품, 당신이 좋아할만한 게 다 있는데 왜 안하려고 해요?"
시나리오를 다시 읽어본 폴 버호벤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리고는 영화화를 결심합니다.
(아........예술가는 정말로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스티븐 킹도 그랬고........근데 어차피 일반인도 마찬가지 아닌가.....ㅋ)
그렇게 해서, 1987년 로보캅은 탄생했습니다.
서두부터 폴 버호벤의 일화를 꺼내는 것은,
그가 만든 그 명작, 로보캅이라는 작품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주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이크의 스토리적 전략은 어떠했는가가 더 선명해지니까요.
로보캅이라는 캐릭터는 폴 버호벤의 손에서 일종의 전체주의와 싸우는 영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전체주의의 또다른 이름은 천민자본주의입니다.
로보캅을 탄생시킨 자나 시스템, 언론이 나팔수 정도밖에 안되는 등등의 사회 속에서
로보캅은 캐릭터적으로 철저히 고립무원이 됩니다.
악당이나 자본가나 별 차이가 없는 사회 속에서 폭력에 당하고 로봇화되어 버리고 가족까지 떠나버린 그 처절한 운명의 상황.
폭력적인 디스토피아 속에서 이 정도의 위치면 로보캅이라는 캐릭터의 무게 자체는 그럴싸하게 확립된 거나 다름없죠.
게다가 디트로이트라니!
자본주의의 이기적 폭력으로 지역적 사회적 집단 자체가 위태해진 그 공간배경 (최근 있었던 디트로이트 파산사태를 떠올려 봅시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로보캅이 걸어야 할 길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자본의 손에서 태어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의 논리에 이용당하는 상황을 극복해내는.
그리고 3편에서는 유치하나마 그런 자본에 미친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의 편이라는 위치까지 확장도 이뤄내죠.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리메이크의 전략이란 것으로 오게 되면.
일단 디스토피아라는 것부터가 낡고 부담되는 개념입니다.
매트릭스 이상의 파격으로 구성해주지 않을 바에야, 사람들은 감흥도 못 느끼죠. 그래서 일단 제외합니다.
그러자니 디트로이트의 우울한 분위기나 디스토피아적 모습, 힘없이 휘둘리는 소외자들의 비주얼 같은 건 배제됩니다.
두번째로, 자본주의에 대한 폴 버호벤식 문법을 제외합니다.
그것도 왠지 쌍팔년도 운동권 식의 낡은 느낌이 나니까요.
대신, 언론의 위치를 격상시켜 자발적으로 우경화된 위치로 수정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풍자도 해결되고 상대적으로 로보캅은 진보의 위치를 점하게 되리라는 계산이었겠죠.
세번째로, 좀 더 차별점의 매력을 두려다 보니, 조력자라는 것들의 위치가 필요해집니다.
그 때문에 폴 버호벤이 온전히 세상과 싸우는데만 열중하게 로보캅에게서 가족을 배제시키는 대신
동료이자 이성애의 미묘한 관계로 여자 루이스를 집어넣는데 반해,
리메이크작은 가족이라는 위치를 그대로 두고 로보캅과 만나게도 해주고 번민의 핵심에 놓기도 하며
노튼이라는 캐릭터를 조력자로까지 격상시킵니다.
네번째로, 또 다른 무게를 높여주려는 장치로서 로보캅이 느낄 수 있는 개인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부분들이 적게나마 있습니다.
이런 전략들의 총평은.
죄다 너무 펀치력이 약하다, 라는 겁니다. ㅠㅠ
첫번째, 이건 로보캅이란 캐릭터의 에너지, 그 근간이었습니다.
무게의 근간을 배제하겠다면 그만큼의 에너지를 어딘가에서 보전해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만한 동력원으로서의 가치와 의미가 너무 희석되고 희화화된 시대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 결과 작품의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의 질감이 하락하는 느낌입니다.
두번째, 언론이 우경화됨으로서 반어법으로 폭력적 힘을 원하는 그들의 모습을 풍자한다고 한들,
로보캅의 위치가 상대적으로라도 진보를 획득하지는 못합니다.
로보캅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그것을 획득하려는 씬이 없는 이상은 말이죠.
폴 버호벤 판, 세상의 중심에서 내가 머피다 회장놈아를 외침으로서
니들 따까리도 생산제품도 아닌 머피라는 인간임을 어필하던 그 유명한 라스트씬을 떠올려 봅시다.
그 정도의 카타르시스를 뿜어내기 위한 에너지가 없는 상태.
세번째, 가족들과 만나는 씬이나 노튼 박사 같은 경우는 참신했지만
(폴 버호벤이 더욱 잔인하게 가족이 로보캅을 거부하는 걸 넣으면서 좀 더 로보캅의 고립을 어필했다면 하는 아쉬움도 존재하긴 했죠)
가족들의 위치 자체가 로보캅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고 그냥 극적 장치로만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선 죽도 밥도 아니되고.
네번째, 이런 좌충우돌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감정을 증폭할 수 있는 아들과의 만남씬 같은 것들을
너무 띄엄띄엄 가버리니 그 효과도 미미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큰 문제가 있는데,
이러다 보니 클라이맥스로 회사 건물에 돌진해 싸울 때는 도대체 왜 싸우는지 잘 와닿지 않는 애매한 지경까지 간다는 거죠.
단순히 경관살인미수? 그게 이유?
큰 흐름이 쌓여진 게 없으니 중요한 클라이맥스 전투의 동기가 희박해지고,
독수리 5형제 같은 스피드의 비주얼 (로보캅이 달리기도 한다는 정도의 신기함 ㅋㅋㅋ) 만 남게 되는 상황이라는 건 상당히 아쉽습니다.
내부의 흐름들은 마치 미드같은 느낌들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겹쳐 JJ 정도의 아기자기한 연출이 살아있었다면 꽤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족으로,
1. 총기매니아다 보니 로보캅이 쓰는 새 총은 뭘까 궁금해졌습니다. 탄창 각도로 봐선 개머리판 들어낸 UMP 같기도.....
2. 중간에 로보캅 원조 디자인이 디스플레이로 잠깐 등장. ㅋㅋ
3. 시작부터 1편의 테마음악이 나오는 것에는 쵸큼 감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