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랑크라는 심리학자는 예술가와 신경증 환자의 본질을 같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같으나, 인간의 본질 자체에 내재된 창조성을 건강하게 발현하여 그 고통을 도덕이나 관념으로부터 유리시켜 다시 재조립하고 그것으로 정화의 수순을 거치게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둘을 구분하는 것이죠. 그런데 가끔씩 예술가들에게는 그런 상황이 닥칩니다. 뭔가 얘기는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 영상도 떠오르는 것 같은데, 당최 그걸 표현할 스토리도 구조도 감이 안잡히고 심지어는 얘기하고 싶은 것의 내용조차 감당이 안되고 뭔지도 모르겠다는 상황. 그것들이 자꾸 꺼내달라고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대부분은 이 선에서 삭제하고 포기합니다. 쓸데가 없다는 거죠. 내가 설명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와닿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해보고자 했던 영화들의 선례는 항상 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마지막 부분,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져 헤드,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의 엘 토포나 산타 상그레 (성스러운 피) 같은 경우부터 시작해서. 이런 경우에 빠졌을 때 작가들의 해법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과 최대한 닮은 것들을 찾기 위해 파고 파고 또 파서, 맘에 들건 들지 않건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극단적인 이미지의 경우들을 나열해보는 겁니다. 이럴 경우 전형적인 스토리의 구조나 외형들은 일부 차용되다가 중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아예 처음부터 차용을 거부하는 경우들도 생기죠.
왜 이런 뇌의 고통을 자극하는 얘기들을 서두부터 늘어놓고 있느냐, 처음부터 잘만 방향을 잡았으면 그런 선배격 영화들 정도까지 근접할 수 있었던 루시가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액션영화의 인두껍을 씌워놓고 이것저것 동물의 화면들을 차용해 겉멋을 부려보지만 뤽 베송은 어쩔 수 없는 상업영화 감독입니다. 인간이 100퍼센트의 뇌를 쓴다. 그런 주제는 당최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설 뿐더러 철학적 존재론적으로도 기계적 과학론으로조차도 감당되지 않는 얘기들이죠. 그걸 어떻게든 전달해보려 하는데, 감독 스스로도 감당이 안되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봉합해 보려는 옹졸한 몸부림이 보입니다. 애초부터 학문적인 얘기의 틀을 정해놓고 그것에 맞춰서 결말을 꿰어맞춰 가는 형식이란 거죠. 그것 자체부터가 엄청난 무리수. 선배 감독들처럼 신비하게 표현해볼 사색의 깊이도 무게도 없으면서 힘겹게 열어제낀 판도라의 상자를 애써 덮어보려는 모습이랄까. 오히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다뤘다면 더 신선하고 재밌겠다 싶어질 정도죠. 사색과 상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미적지근하고, 사색의 영역에 신경쓰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호불호의 논란거리만 던져주는 결말은 상당히 안타까울 뿐입니다. 차라리 최대한 외연적 상황이 아닌 인간 내연적 상황의 드라마 영역으로 루시를 끌어내려 시간과 공간을 한정시키고 영화를 진행하며 나아갔더라면 루시는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나갔을 겁니다. 트랜센던스보다도 더. 사족으로, 1. 오토 랑크라는 심리학자는 프로이트 학파의 초기 멤버지만 되레 프로이트 학파의 떨거지들의 합심으로 철저하게 묻히다가 근세에야 각광받기 시작한 학자입니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영향을 받았고, 니체가 언급한 예술 창조나 비극의 기능 등에 대해서 심리학적으로 풀어가는 과정들을 거쳤죠. 실상 아들러나 융이나 프로이트까지도 모두 니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프로이트는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 안하다가 말년쯤에나 언급하는 썩어빠진 면모도 보입니다. 니체는 이미 프로이트가 개척하려던 분야를 전문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단초들을 모두 제공한 상태였습니다. 랑크는 프로이트와 달리 자신의 이론을 위해서 종교, 문화, 사회를 비롯한 각종 분야와 '꿈'까지도 모두 연결된 선상에서 파고든 사람입니다. 바로 이 꿈의 부분에서 프로이트의 해석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 학파에 의해서 파묻혀버렸던 것이죠. 프로이트가 꿈을 좌절당한 성욕의 배출구로 해석한 반면 랑크는 꿈을 인간이 자아를 스스로 재창조하는 영역이며, 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영역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이론은 오히려 현대에 와서 더 적합한 것이라는 평가들을 받고 있습니다. 조만간 그의 저작들도 구해서 읽어볼 예정입니다. 심장이 둑은둑은 ㅋㅋㅋ 2. 같은 안타까움에서, 최민식의 활용도 정말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루시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의 페르소나라면, 최민식은 인간 자체를 대변하는 페르소나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시가 먼치킨이 되어버리니 당연히 최민식은 빛이 바래죠. 이런 관계도를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해해보려 노력했다면 하는 것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