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극을 꾸밀 때는 감정적인 선을 들었다 놨다 하며 관객을 몰아치고 싶은 유혹이 강해집니다. 관객은 또 그런 것에 재미를 느끼며 엄지를 치켜들죠. 하지만 원래 진실에 대한 극화는 그와 반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에서 대가는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드라마가 있더라도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야 한다는, 일종의 작가주의적 고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스탠리 큐브릭의 전기를 읽으면서 꽤 오래 전의 헐리우드 기자가 평했던 구절이 기억에 떠오릅니다. 지금의 헐리우드는 작가주의보다는 그저 헐리우드에 데뷰하여 그 시스템에 편입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안도하는 감독이 너무 많다고. 그런데 그 풍토는 지금도 가속화되면 되었지 나아지진 않지요.
그런 위치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현대의 얼마 남지 않은 보석과도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의 대가들 같은 영역까지 들어갔다는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그는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고집을 그대로 살리는 영화들을 만들어왔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특히 '보여주기'라는 지점에서 놀라운 위치에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부분은 큐브릭의 사상과 닮았지만, 큐브릭이 극의 아이러니나 충격파적인 지점들을 자아내는 과정상의 모습과는 달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최대한 관객들을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려는 화면 샷을 자제합니다. 심지어, 마이클 베이 정도라면 누구나 환장해서 달려들 전장씬 같은 경우에도 그는 절대 감정적 장난을 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쓴맛과 고통이 진실이라는 듯 천천히, 담담하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애초부터 그런 군더더기가 필요한 극을 고르지 않기 때문인 탓도 크겠지만,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캐릭터 자체에 항상 깊게 천착된 포커스를 맞춰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영화에서는 특이하게도, 스나이퍼로서의 대결구도 같은 박진감 라인까지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이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맞는가 싶을 정도의 생각까지 들게 하지만, 캐릭터의 완전히 뛰어난 모습 자체가 아닌, 결점의 표출 같은 부분들까지 그대로 오픈한다는 것은 그의 공력 정도가 아니면 그렇게까지 자연스러운 모습은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