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래입니다....이 양반이 정말 죽을 작정을 했구나!

가자서 작성일 08.09.08 06: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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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입니다....이 양반이 정말 죽을 작정을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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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과 신부, 노고단서 오체투지

 

 

안녕하세요. 정청래입니다. KBS에서 막 들어 왔습니다. 예고해 드린대로 지금 <오체투지>중인 문규현신부님에 대한 이야기 2탄을 올립니다. KBS 앞에서 들은 얘기인데 몇분이 문신부님을 9일 찾아간다고 하네요.

 

저는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또 문신부님 그 처절한 모습을 안 보고 싶은 마음 절반입니다. 지난 3보1배 때도 한번 가 뵈었는데 마음이너무 무거워 혼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감히 할 수 없는 문신부님과 수경스님의 오체투지에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1945년 1월 1일이 땅에 태어난 해방둥이 문규현 신부님.

 

그는 어쩌면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안고 고행의 길을 가야 할 운명을 갖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온몸으로 생명존중과 민주수호를 위해 오체투지를 하고 계십니다.

 

문신부님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제가 만나 본 문신부님 글을 올립니다. 아래의 글은 2003년에 제가 쓴 졸저 <사람만이 사람사는 세상을 만든다>의 문규현 신부님 편입니다.

 

1탄을 먼저 보실 분은 이리로 들어 가세요.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929462&pageIndex=1&searchKey=subjectNcontent&searchValue=정청래&sortKey=depth&limitDate=0&agree=F

 

낮에 쓴 <신부님 나의신부님> 1탄에 이어 2탄을 올립니다.    

 

드디어 결혼 당일, 예식 시간이 다 되도록 신부님이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자까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사회자가 나타나고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신부님이 보였다. 토요일이라 길이 많이 막히자 택시에서 내려 1킬로미터를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온 것이다.

 

그런 신부님을 보자 긴장이 풀리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옥에 있을 때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신부님이 깔끔한 신부복을 입고 단상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터지는 웃음을 참을 길 없었다. 신부님의 주례사 가운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두 사람의 결합이 진보의 세계로 나가는 데 기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주례사치고는 아주 거창한 이야기다. 그러나 신부님이 진정 우리 부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전해졌다. 미사를 세 건이나 ‘`펑크`’ 내고 김제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주례를 서준 신부님은 누가 잡을세라 조용히 식장을 떠났다.

그후로 몇 차례 신부님을 만나러 갈 때마다 매일 보는 사람처럼 편하게 맞아주었다. 신부님은 욕쟁이로도 소문났다. 우선 웬만한 사람에게는 반말부터 나간다.

 

“`야 이놈아, 밥 좀 가져와라.`”
술 좋아하는 신부님은 “`술 좀 그만 드시라`”는 신도들의 핀잔에도 기가 죽는 법이 없다.
“`지랄하네. 한 잔 더 가져와.`”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상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까르르 웃으며 재미있어하는 것이 이상했다. 여러 차례 오가는 대화를 곁에서 들으며 깨닫는 것이 있었다. 신부님의 욕은 너무도 정겨운 대화의 양념이자 넘치는 사랑의 언어였다.

 

똑같은 말이라도 마음가짐과 소통의 정도에 따라 흉도 되고 정도 되는 모양이다. 권위를 가장한 허위의식은커녕 스무 살 아래인 내게도 친구의 정을 느끼게 하는 신부님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도 “`미친 놈`” 하는 신부님 목소리가 이토록 그리운가 보다.

신부님이 형인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한겨레21』이 정한 ‘`올해의 인물`’로 뽑히던 날의 일이다. 전주 서학동 성당에서 만난 문 신부님은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었다. 농담 삼아 나이도 새파랗게 젊은 분이 수염은 뭐냐고 묻자 국가보안법이 철폐될 때까지 깎지 않을 거라고 했다.

 

무슨 말씀인가 했더니 앞으로 반전평화와 주한미군 문제는 문정현 신부님이 주력하고, 자신은 새만금 반대 투쟁에 전력을 다할 텐데, 그래도 ‘`국보법 철폐`’를 위한 간절한 마음은 내려둘 길 없어 수염을 깎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자리를 가진 사람이 이끈 새만금 반대 투쟁. 당시 어느 누구도 80퍼센트 이상 공사가 진행된 새만금 개발이 ‘`꼴통 신부`’의 합류 정도로 중단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부님에게는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두려움 없이 싸워가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신부님이 수경스님과 함께 부안부터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양반이 정말 죽을 작정을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래전 함평 고구마 싸움 때도 보았듯이 신부님은 아무리 얻어맞아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말한 것은 꼭 해내며, 해야 할 일에 핑계가 없고 두려움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가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른다.

‘`오래오래 살면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 분인데, 이거 하다 죽으면 어떡하려고!`’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올라오는 속보와 손과 무릎이 해진 사진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게다가 삼보일배에 묵언수행까지 하며 서울에 진입해 국회를 거쳐 신촌을 지나던 그 행렬을 맞으러 가자는 사람들의 권유에 나는 선뜻 나설 수 없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 앞에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를 어떻게 꺼내며, 어찌 얼굴을 들고 쳐다볼 수가 있을까. 몇 년 동안 이 일을 입에 담는 것조차 힘들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언제나 가장 뜨거운 투쟁의 한가운데서 신부님을 볼 수 있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신부님의 성당이다. 새만금 투쟁 뒤 부안성당으로 옮긴 신부님에게는 위도 핵폐기장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시 뼈만 앙상한 몸에 쇠사슬을 감은 신부님을 TV에서 보았다.

 

 ‘`그래, 신부님은 이렇게, 이렇게 살다 가시겠구나….`’

신부님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아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저 나는 신부님의 깊이를 100분의 1이나마 배우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스무 살이나 어린 내게 항소이유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책을 추천해달라던 겸손한 사람도, 감옥에서 김치 먹으라며 손을 잡아 끌어주고, 내 결혼식을 위해 먼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와준 사람도, 우스갯소리 잘하고 신도들에게 욕하며 사랑받던 사람도,

 

인간의 경지를 넘는 삼보일배와 쇠사슬을 감내하고 큰 나무처럼 서 있는 저 사람도 바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문규현 신부인 것이다. ‘`못 말릴 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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