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11-20 03:05 |최종수정2008-11-20 07:15
대기업은 취업문 좁아 결국 비정규직 선택 많아
"취업 공부에 들인 돈 아까워… 그래도 中企는 싫어"
금융 위기로 더 악화… 세대 간 일자리 경쟁 양상
화창했던 지난 6일 오전 11시쯤 서울 강동도서관 앞 공터. 체육복 차림의 20대 여성 한 명이 쌀쌀한 날씨 속에서 벤치에 홀로 앉아 삼각김밥 두 개와 빵 한 개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취업 준비생 강모(25)씨다.
"취업요? 정말 힘들죠. 남들은 취업 안 되면 중소기업 가면 된다지만 맘대로 안 되네요. 지금까지 취업 준비하느라 가져다 쓴 돈이 얼만데…."
능력도 없는 강씨가 눈높이만 높은 것일까. 서울 소재 중위권 대학을 졸업한 그의 학점은 3.3, 토익 점수는 955점이다. 지난해 3000만원을 들여 영국으로 7개월간 어학 연수를 다녀 왔고, 한 유럽 국가의 관광청에서 인턴 직원으로 일하며 경험도 쌓았다. 취업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청년 백수'로 동네 도서관을 전전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올해 대기업에 25번 입사 원서를 냈지만 면접은 고사하고 서류 전형도 통과해본 적이 없다. 강씨는 "가끔은 내가 사회에 쓸모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학원에서 면접 기술까지 배우기도
올 하반기 극심한 취업난을 겪고 있는 20대 구직자들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치열하게 취업 준비를 한 세대다. 한 해 300만~1000만원에 이르는 비싼 대학 등록금을 내며 학교를 다녔고 어학 연수, 자격증, 공모전, 학점에 이르기까지 취업에 필요한 '스펙'에 목숨을 걸었다.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강남 파고다어학원’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영어 강의를 듣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com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하루 평균 4시간20분을 전공·외국어·자격증 준비 등 취업 공부에 투자한다. 대학 등록금이나 어학 연수 비용, 생활비를 제외하고 월 평균 약 17만원을 학원비와 독서실비 등 취업 준비 비용으로 쓴다.
술집과 당구장, 데모로 대학 시절을 보내다 졸업장 하나만 달랑 들고서 기업의 문을 두드리던 예전과는 전혀 다르다. 최근에는 취업 시험에서 면접 비중이 높아지면서 돈 주고 면접 기술을 배우는 학생까지 생겨났다.
지난 4일 오후 7시쯤 서울 안암동의 면접 전문 학원인 혜안문제해결스쿨.
"현대그룹 정몽구 회장이 요즘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왜일까요?" (강사)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요. 글로벌 경제위기 때문에…." (학생)
"그렇게 대답하면 면접관들은 '역시나'라고 생각하지. 자,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북경에 현대차 현지 공장이 있죠…." (강사)
강의실에 앉은 6명의 학생들은 강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 내용을 받아 적었다. 이 학원 송영상 원장은 "취업난이 심화되고 대기업 면접의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학원을 찾는 취업 준비생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고려대를 졸업한 수강생 이모(여·26)씨는 "상반기에만 면접에서 두 번이나 떨어져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나 싶어서 등록했다"며 "면접 스터디만으로는 면접 준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고 말했다.
◆몸부림치지만 취업문은 좁다
20대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예전과 비교하면 실망스럽다. 임금 수준이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 전체 근로자의 임금 수준을 100으로 봤을 때 지금 25~29세 청년들이 받는 월급 수준은 1993년 89.3% 수준에서 2000년 82%, 2005년 81.1%로 하락했고, 지난해에는 76.7%까지 떨어졌다.
200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실업률은 3.2%, 청년 실업률(15~29세)은 그 두 배가 넘는 7.2%다. 전체 실업자 78만3000명의 41.9%가 청년층이다. 이미 노동시장에 진입한 기성세대들은 경력직으로 직장을 옮겨 다니며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학과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 구직자들은 아예 진입을 못하고 겉돌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들도 마음 편치 않아
정규직을 포기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구해 들어가지만 불만이 가득 찰 수밖에 없다. 지난해부터 경기도의 한 공기업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박모(여·28)씨의 토익 점수는 905점, 학점은 3.4점이다. 그는 졸업 후 정규직 일자리를 2년 가까이 찾아다니다 실패하고 일단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박씨는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과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고 솔직히 능력으로 볼 땐 정규직 직원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월급은 정규직의 60% 정도에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다. 그는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40·50대 정규직 아저씨들을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성질만 난다"고 말했다.
인터넷 유통업체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지방 국립대 무역학과 출신인 한모(30)씨. 이 회사 경력 3년차인 그의 월급은 200만원이 채 되지 않지만 그는 이미 비정규직 인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한씨는 "주변에서 '너 정도면 더 좋은 곳에 취직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요즘 같은 상황에서 그런 소리에 귀 기울여 봤자 나만 괴롭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경기도 수원의 이동통신회사 대리점 관리 업무를 하고 있는 한모(41)씨는 전문대를 졸업한 여직원 2명을 용역회사에서 파견받아 고용하고 있다.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용역직을 뽑은 덕에 인건비는 월 100만~120만원만 주면 된다.
한씨는 "정규직들이 하는 일이 그다지 전문적인 일은 아니어서 용역 직원을 가르치면 되지만 다른 정규직 직원들이 싫어한다"며 "사실 우리 세대(40대)들은 억세게 운이 좋아서 그렇지 능력으로만 보자면 요즘 같은 시절이면 비정규직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대 간 일자리 경쟁 더 치열해질 것
청년층이 극심한 취업난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세대 간 일자리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서울산업대 기초교양학부 정이환 교수는 "이미 일자리를 잡은 기성세대들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면서 자리를 지키려 들고, 기업은 이 때문에 쉽게 신규 채용에 나서지 못하게 된다"며 "이런 현상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일자리 경쟁을 가져 오고 앞으로 이런 현상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 금재호 박사는 "무직(無職) 기간이 길어질수록 구직 가능성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청년 구직자들은 일단 저임금 직장이라도 진입해 좀더 나은 직장으로 차근차근 옮겨가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