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는 거대한 뚜쟁이" 전직 기지촌 매춘부고백 파문

짱드럼 작성일 09.01.09 14: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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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직 매춘부들이 과거 한국 정부가 미군기지촌의 '매춘(Sex Trade)'을 허용하고 미군당국과 함께 매춘부들을 관리했다고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8일(현지시간) A섹션 6면에 서울발 기사로 “한국 정부는 과거 미국의 보호를 받기 위해 매춘부들이 미군들에 몸을 팔도록 허용했다”면서 “한국 정부와 미군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지촌 매춘부들이 미군에 성병을 옮기지 않도록 직접 관리했다”고 크게 보도했다.

이와 함께 타임스는 “한국이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활용된 위안부의 추한 역사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는 또다른 학대의 모습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고 기지촌 매춘부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빗대 새로운 파장도 예고되고 있다.

타임스는 올해 80세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사는 배모 할머니의 사진과 인터뷰를 실어 전직 기지촌 매춘부들의 비참한 삶을 부각시켰다.

신문은 “한국의 전직 매춘부들은 매춘이 강제로 이뤄졌지만 항의 할 수 없었으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자신의 추한 역사를 돌이켜보지 않고 일본에 대해 위안부 배상을 요구하는 위선을 보이고 있다고 비난한다”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매춘부들은 한국정부가 한국전쟁이후 피폐한 경제를 돕는데 자신들을 활용했으며 효율적인 기지촌매춘을 위해 영어와 에티켓을 가르치고 몸 팔아 달러를 마련하는 것을 칭찬했다고 주장했다.

타임스는 김모씨(58)의 말을 인용, “한국정부는 미군을 위한 ‘거대한 뚜쟁이(Big Pimp)’였다”면서 “그들은 가능한 우리가 미군에 몸을 많이 팔도록 독려했으며 달러를 버는 애국자라고 불렀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일부 매춘부들은 “미군과 한국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이들이 있는 집창촌을 단속해 성병의심자를 골라내 단골고객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한국경찰은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매춘부들을 창문이 철망으로 막힌 이른바 ‘몽키 하우스'에 완치 될 때까지 가두기도 했다고 전했다.

타임스는 이들이 2차대전 때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들처럼 보상과 사과를 바라고 있다면서 “그것이 선택이든, 필요에 의한 것이든, 강요이든 우리 모두는 정부 정책의 희생양”이라는 말을 전했다.

한편 뉴욕 타임스가 기지촌 매춘부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한 것과 관련, 논란이 확산될 가능성과 함께 한국 정부의 대응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동맹속의 섹스(Sex Among Allies)’라는 저서를 1987년 출간한 캐더린 문 웰슬리 대학 교수는 “이런 기지촌이 한국정부와 미군당국에 의해 지원됐다면 공범관계가 성립된다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여성문제를 관장하는 한국의 성평등부는 이같은 문제에 대해 논평을 거부했고 주한미군 사령부는 “인신매매나 매춘을 묵인하거나 지원하는 불법적인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타임스는 이번 기사를 위해 모두 8명의 전직 기지촌 매춘부를 인터뷰했다면서 관련 문서와 사진에 따르면 상당 부분 이들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한국과 미군당국은 수십년동안 기지촌의 매춘을 용인했기 때문에 사실 이들의 주장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면서 미군기지가 있는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도 기지주변에 술집과 매음굴이 퍼져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전직 매춘부들은 한국 국민들이 정부가 이 일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06년 한 전직관리는 TV에 나와 정부가 기지촌 매춘부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시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해서 나쁜 일은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인정했다.

국회 기록에 따르면 일부 한국 지도자들은 매춘의 필요성을 용인하기도 했다. 1960년 두명의 의원이 동맹국의 군인들이 일본에서 달러를 쓰는 것을 막고 이들의 ‘자연적 욕구’ 충족을 위해 매춘부 공급을 촉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무부 이성우 차관은 정부 답변에서 ‘미군을 위한 매춘부 공급과 여가활용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1969년 닉슨독트린 선언 이후 미군의 철군 가능성을 두려워했고 이를 막기 위해 주한미군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군 당국은 매춘부들을 등록하고 적절한 성병치료를 받도록 공동 노력을 기울였고 미등록됐거나 정기검진을 받지 않는 매춘부들을 단속한 1976년 보고서 기록도 있다.

이들 기지촌은 현재도 존속하지만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필리핀에서 온 외국여성들로 대체되고 있다. 전직 매춘부들은 주류사회와는 소외된 채 기지촌에서 대부분 궁핍하게 살고 있으며 해외로 입양을 보낸 혼혈자녀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전모씨(71)는 18살이던 1956년 고아가 돼 굶주림을 못이겨 동두천의 기지촌을 찾게 됐다. 전 씨는 60년대에 아들을 낳았으나 아이가 열세살이 됐을 때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훗날 미군이 된 아들은 10년전 엄마를 찾아왔지만 전 씨는 아들에게 “난 엄마로서 실패했다. 나를 잊으라”고 말했다. 정부 보조와 폐품 수집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전 씨는 “아들에게 의존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나같은 여성들은 한미 동맹을 위한 최대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녀는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정부와 미군의 것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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