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언제까지 정의와 시장을 외면할 것인가
이번 판결과 이재용씨의 경영권 승계는 전혀 별개의 문제
삼성 등 재벌 지배구조의 전근대성 개선활동 계속될 것
대법원은 오늘(29일) 삼성에버랜드 사건에서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대표이사에 대한 1, 2심의 유죄판결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하여도 무죄 판결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대법원은 삼성SDS 사건에 대해 제3자 배정 방식의 신주발행에 있어 현저한 저가 발행은 임무에 위배된다는 취지로 원심을 파기했다. 그동안 일반 국민들과 제 시민단체들은 이재용씨로의 경영권 승계 사건을 통하여 사법부가 합리적 시장질서와 사법정의를 확립해 주기를 염원하였으나, 이번 대법원 판결은 대부분에 있어서 납득할 수 없는 법 논리로 이러한 염원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우선 이번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따지기에 앞서 검찰, 특검, 법원과 헌재의 사법시스템 전체의 책무 방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사건은 강남의 고급 아파트 1채 값도 되지 않는 16억원의 세금만을 내고 국내 최대인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토록 한 행위가 주식회사의 일반 법리에 비추어 볼 때 배임이 아니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적인 문제제기가 오늘의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는 짧게 잡아도 1996년 10월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이사회 결의로부터 12년 반, 길게는 1994년 이건희 회장의 60억 증여와 이재용씨의 삼성엔지니어링, 에스원 주식 매입으로부터 15년이 걸렸다.
문제는 단순히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린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검찰, 특검, 법원과 헌재까지 사법시스템 전체가 이른바 이재용씨의 불법 승계 논란과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전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사건을 방치하다가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에서야 편법적으로 에버랜드 전현직 대표이사만을 기소하였고, 특검은 자신의 눈앞에서 삼성 직원이 증거를 인멸하는 수모까지 감내하면서 소극적으로 수사하였다. 대법원은 삼성특검법에 규정한 선고기한을 어기면서까지 장기간 소부에 사건을 방치하다가, 여론의 비판에 직면해서야 이건희 전 회장 사건을 제외한 허태학, 박노빈씨 사건만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하였다.
사법시스템이 사회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이를 방치․조장했던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국민으로 나뉘어져, 보수든 진보든 단 한 걸음의 전진도 쉽지 않은 최악의 불안정 교착 상태에 처하게 된 주된 요인이 되었고, 각 사법주체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우선 통감해야 한다.
에버랜드의 지분획득을 통한 경영권 편법승계를 위해 이 회사의 전환사채(CB)를 저가로 발행했다는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해 무죄가 확정된 가운데 29일 오후 서초동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김상조 한성대 교수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선고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09.5.29 [출처 : 연합포토]
둘째, 이번 대법원 판결은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집단의 초법적 경제권력 앞에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대법원은 유사한 논점을 가진 다른 사건에서는 추상과 같이 배임이라고 힐문하고 엄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성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주주들간에 해결해야 할 개인적인 분쟁사안일 뿐 형벌이 적용되어야 할 공법적 규율대상이 아니라면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축소하였다. 더군다나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는 삼성에 면죄부를 주는 법 논리의 완결성을 위하여 일부 사실관계의 왜곡까지도 묵인하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움과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말미암아, 삼성그룹뿐만 아니라 폐쇄회사인 비상장회사를 통해 그룹 전체의 부를 빼돌리는 한국재벌과 다른 기업들의 수많은 사익추구행위들 전체가 면죄부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향후 이같은 경제질서 교란행위가 시장에서 횡행하게 될 것이고, 사법부가 결과적으로 이를 ‘조장’하였다는 사법 무능에 대한 비난까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법원은 신영철 대법관 사건으로 땅에 떨어진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고, 사회 전체 구성원이 아니라 소수 특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는 불명예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번 대법원 판결로 사회전반에 걸친 삼성그룹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기타 이번 대법원 판결의 구체적인 문제점은 판결문을 분석한 후 차제에 자세히 밝히도록 한다.
셋째,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재용씨 승계 문제와 삼성그룹의 총체적인 불법행위 및 소유지배구조 문제의 종착역이 아니다. 이재용씨 앞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법률적 문제가 산적해 있고, 그 중의 상당 부분은 새로운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이건희 전 회장이 에버랜드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이재용씨가 삼성그룹의 3세 총수로서의 경영 리더십이나 법률적․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삼성그룹 회장’이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거나, 삼성전자 주총에서 등기이사로 선임된다고 해서 삼성그룹의 총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이후 특검과 법원을 거치면서 이건희 회장의 권위와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 체제가 무너졌다. 지금의 사장단협의회와 산하 위원회 구조는 그야말로 과도기 체제일 뿐이며, 이러한 과도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총수일가와 삼성그룹과 국민경제가 치러야 할 비용은 급속하게 늘어날 것이다. 삼성그룹은, 아니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씨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광고를 무기로 일부 비판적 신문사와 방송사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고 해서, 커튼 뒤에서 정부여당에 로비해서 금산분리 규제를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또다시 과거의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2의 에버랜드 사건, 제2의 김용철 변호사, 제2의 삼성공화국 논란을 자초하는 길이다.
이제 이재용씨는 밀실에서 나와야 한다. 열린 광장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그 속에서 자신과 삼성그룹이 가야 할 합법적이고도 합리적인 길을 찾기 바란다. 이재용씨와 삼성그룹이 스스로 그 길을 찾지 못한다면, 지난 10여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제 시민사회단체는 이재용씨와 삼성그룹을 비롯한 재벌 지배구조의 전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후로도 계속할 것이다.
2009. 5. 29.
경제개혁연대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 참여연대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