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안 변윤재 기자]서울대 교수 124명이 현 정부에 '소통'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 각계각층과 소통·연대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에 대해서도 사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서울대 교수들은 정치적 개입으로 비춰질 것을 우려, 사회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을 경계했으나.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이명박 정부 비판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날 발표현장에는 김인걸(국사학과), 최갑수(서양사학과), 최영찬(농경제사회학과), 이준호(생명과학부) 교수 등 12명이 참여했으며, 시국선언 서명에 참여한 교수는 총 124명이다.
지식인들의 시국선언은 타 대학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 중앙대 교수 50여명도 이날 오후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이 대통령의 사과 발표와 함께 내각 총 사퇴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연세대 등 타 대학 교수들도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지식인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 전환을 정면 요구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이명박 정부, 국민에 사죄하고 소통해야"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서울대 교수'들이 3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 신양인문학술정보관에서 기자회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직 대통령에 관한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며 "이 대통령이 스스로 나서 국민 각계각층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정치를 선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지난 2004년 88명의 교수들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한 후 5년만이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에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또다시 이념-세대 갈등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이날 기자회견장에서는 보수성향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반대'의사를 밝히며 교수들을 비판, 한때 소란이 일기도 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 20여명은 시국선언 발표 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만 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반대구호를 외치거나, 기자회견에 참석한 교수들에게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겠다면서도 국민의례조차 하지 않는 국가관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비리의혹이 있는데도 조사하지 않고 넘어갔어야 했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서울대 교수측은 "여러 어르신께서 지적하신 대로 오늘 이 모임의 형식과 절차에 대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으로 어려운 자리를 마련한 것에 대한 충정도 이해해달라"고 말함으로써 일단락됐다.
민주주의 원칙을 광범위한 자유에서 찾고 있으므로 법치와 준법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고 있다는 보수우파측과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역사적 후퇴이자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진보좌파측의 입장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서울대 교수들은 "작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소환장이 남발되었고 온라인상의 활발한 의견교환과 여론수렴이 가로막혔으며, 이미 개정이 예고된 집회 관련 법안들의 독소조항도 시민사회의 강한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면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집회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및 독립성, 사법부의 권위 및 독립성, 인권 존중 등 민주주의 원칙이 훼손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서울대 교수들은 "우리 국민은 누구나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큰 아픔을 겪고 있다"며 "전국 각지에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은 단지 애도와 추모의 물결만은 아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착잡하기 이를 길 없는 심경으로 나라의 앞날을 가슴속 깊이 걱정하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미디어법과 관련해 "주요 방송사가 바람직하지 못한 갈등을 겪는가 하면, 국회에서 폭력사태까지 초래한 미디어 관련 법안들은 원만한 민주적 논의절차를 거쳤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여야의 동의로 지난 3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출범했지만, 여당 측 위원들이 회의 공개나 국민여론 수렴을 반대함으로써 위원회는 표류하고 있다. 국민의 여론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흐름은 민주주의의 기반인 언론의 자유를 허물어뜨리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서는 "국가원수를 지낸 이를 소환조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3주가 지나도록 사건 처리 방침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추가 비리 의혹을 언론에 흘림으로써 전직 대통령과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인격적 모독을 집요하게 가했다"며 "이는 엄정한 공직자 비리 수사라고 하기 곤란하며 상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개입 △4대강 살리기의 대운하 사업 연관 의혹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자살 △용산 참사에 대한 책임론 △'상호주의'적 대북정책에 따른 남북관계 경색 등을 들면서 "구시대적이며 퇴행적인 현상에 대해 이명박 정부의 근본적인 자기 성찰을 기대한다. 기본적인 인권 존중과 민주적 원칙의 실천을 위해서 모든 국민의 삶을 넉넉히 포용하는 열린 정치를 구현하는 정부의 노력이 참으로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 애도 속에 주어진 국민적 화해의 소중한 기회를 잘 살리고 국민의 뜻에 부응하기를 우리는 간절히 희망한다"며 이명박 정부에 △대통령 스스로 나서서 국민 각계각층과 소통·연대하고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노 전 대통령 관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용산 참사 피해자에 대해 국민적 화합에 걸맞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다른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를 진심으로 국정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명박 대통령과 현 집권층이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있는 민주적 요구에 대해 진지하고 성의 있게 대응함으로써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국민적 화합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큰 길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삼을 것을 간곡히 바란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번 시국선언에 대해 이호준 교수는 "5월 25일 교수들이 모여 처음으로 논의를 했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게 좋겠다고 동의한 뒤 여러 번 수정을 거쳐, 지난 2일 저녁 최종안을 완성했다"며 "(시국선언이) 안 된다는 분은 없었다"고 밝혔다.
최갑수 교수는 "서울대 교수들의 의사표현이 아주 구체적인 것을 가지고 강력하게 반대하는 경우는 없었다"며 "새는 두 날개가 있어야 하듯이 여러 의견들이 공존하고 화합 조정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일해왔는데, 민주주의가 후퇴되는 것 같아 균형을 잡는 면에서 누구든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어렵지만 의사표현을 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구체성을 떨어지지만 정책의 구체적 내용까지 개입할 생각 없다"며 "연구와 교육하는 입장에서 현 정권이 심기일전하라는 충정의 뜻"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성명과 관련해 "서울대 교수 총원이 몇 분인줄 아나, 1700명 되는 것으로 안다"며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