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서 지원되는 식량은 원산항에서 내려지자마자 어김없이 자강도 군수기지로 들어간다고 김씨는 전했다.
“외부 세계를 속이기 위해 군부대 차량이 민간 번호판을 바꿔달고 군인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 입고 실어 나르지만 인민들에게 나눠지는 쌀은 한 톨도 없습니다. 후방 군부대에도 배급되지 않기는 매 한가지여서 민가의 가축이며 쌀 등을 빼앗아 갑니다. 식량난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에는 사람도 잡아 먹었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유엔 등에서 확인차 나올 때는 배급 받는 장면을 ’연출’하지만 감시단이 돌아가면 그 순간 배급이 중단된다는 것이 김씨의 전언이다.
일터에 나가도 일감이 없고, 배급이 나오지 않은지도 오래됐다. 그럼에도 통제를 위해 출근을 엄격히 체크하기 때문에 밥벌이를 위해서는 뇌물을 주고 2--3일 휴가를 내 장사를 하거나 파지나 고철을 주워 팔아야 한다.
농촌의 협동농장 역시 오래 전에 배급이 끊긴 대신 수천㎡의 땅을 떼어주고 식량을 해결하도록 하면서 한 달 2-3일 쉬는 날에는 온 가족이 이 밭을 가꾸는데 매달린다.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넉넉지 않은 비료 확보 경쟁을 하다 보니 비료 값이 쌀 값 수준까지 치솟았다.
외신에 보도되는 평양 주민들의 ’부유한 생활’에 대해 김씨는 “평양 주민 상당수가 외국 주재원으로 나가는데 할당된 달러만 바치면 얼마를 벌어와서 어떻게 쓰든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특히 군수품 공장 일꾼들에게는 매일 쌀과 고기는 물론 김치까지 나눠주고 있으니 평양은 북한에서는 별천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재일교포로 1960년대 북송선을 탔던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초단파 라디오로 남한과 북한의 실상을 잘 알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북한은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무슨 수를 쓰던 북한을 떠나라’는 말을 남겼다.
원산에서 살던 김씨는 이때부터 접경지역인 두만강으로 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감자를 훔쳐 먹고 물건을 훔쳐 장마당에 팔아 노자를 마련, *와 동생을 데리고 지난해 어렵사리 백두산 부근에 도착해 발전소 공사 돌격대에서 수개월을 일하며 기회를 봤다.
돌격대 역시 대대장과 반장, 후방참모 같은 윗선에서 배급 식량을 빼돌리는 바람에 한 겨울에도 꽁꽁 언 보리밥 한 끼로 버텨야 했고 동상으로 퉁퉁부은 발 때문에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이렇게 사느니 잘못되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말로 탈북을 주저하는 *를 모시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밤을 택해 탈북에 성공했다는 그는 “일만 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이제야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남은 소원은 한국에 가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 북한에 남아 있는 여동생도 빼*는 것이다.
출처 -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