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논리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한나라당과 재벌, 보수적인 움직임은 모두 나쁘다란 전제에서 시작하였는데 과연 재벌이 무조건 나쁠까요? 보수적인 움직임이 모두 나쁠까요? 당장 님부터 시작해서 사회 각계에 이르기까지 보수적인 움직임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을까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과연 절대적인 기준일까요? 뭐 이런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말이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님의 단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님의 정의가 맞다면 지금 정권은 유령이 투표한 셈이니까요.
과격은 안정의 사치다’ (Radicalism is the luxury of security.)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마천은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안다’고 했죠. 님이 이렇게 인터넷을 쓰고 사회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 민주주의는 그래도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토대에 님이 그렇게 욕해대는 기득권과 재벌의 역할이 없었다고는 하기 힘들겁니다. 그것이 현재 바르게 돌아가던, 그렇지 않던을 떠나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과거를 철저히 부정당해야 할 자기모멸적 요소는 아니란겁니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사회의 영웅테마의 부재와 질곡의 근현대사 탓일 수도 있지만 성취에 대한 스스로의 혐오는 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참 기이한 모습입니다.
북유럽 국가들이 살기 좋은 이유는 정치가 안정되어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처럼 미디어법 하나 시행하는데, 나라 전체가 들썩이지 않죠. 그것은 즉 민주적 의사진행과 처리절차가 정치인과 국민에게 내면화 되어있고 또 발달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님이 강조하신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을 기본으로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주권을 주장하고 의견을 내세운다면 그야말로 지리멸렬하겠죠. 정파가 같던 다르던 합의와 토론은 필요한 것입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란 시민이 이러한 민주적 의사처리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참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노조 운동은 한계가 보입니다. 대안과 합의 없는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투쟁과 비난만 앞세우고 있다는 것이죠. (괜히 몇몇 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에서도 드러나듯, 연대해서 힘을 키우고 기득권을 뒤집어 엎은 이후의 비전과 대안은 없습니다. 뒤집어 엎으면 또 다른 기득권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입니다. 이미 200년전 이러한 속성을 간파하여 새로운 사상이 주창되고 그를 바이블로 삼은 국가들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보신 바 대로입니다. 원리주의적 공산주의가 왜 무너졌을까요? 체제자체의 문제로? 그렇다면 맑스를 포함해서 레닌이나 마오는 돌대가리겠죠. 전 인간의 소유욕과 권력욕이란 본능을 오랜기간에 걸쳐 통제하지 못했고,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민중은 물론이고 지도자 스스로마저도 말이죠. 자본주의도 많은 문제를 노출하고 공황과 파국을 겪었지만 지금도 이럭저럭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수정되고 개수되어야 할 이데올로기임을 방증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거국적인 실험이 실패로 끝난 이 마당에 자본주의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코 님이 공산주의자란 뜻은 아니니 오해마시길)
그렇다면 핀란드의 기득권은 누구냐구요? 핀란드 대학생의 대부분은 노키아에 취업하려 합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되므로 이를 흡수하기 위해 노키아는 가혹한 세금에도 핀란드를 떠나려하지 않습니다. 덴마크는 노보노디스크와 같은 세계적 제약회사, 머스크와 같은 초대형 세계1위의 물류기업이 있습니다. 기업형으로 낙농산업을 세계화한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죠. 북유럽은 공산적 지상낙원인듯 자주 묘사되지만 세계 어디보다도 시장개방적이고 또 자본집약적인 곳입니다. 친기업형 정책과 적극적인 외자유치로 어마어마한 경제성장을 이뤘죠. 목장 밖에 없던 덴마크, 나무 밖에 없던 핀란드가 어떻게 그 위치까지 갔는지는 검색해 보시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내 정치문제의 해결에 외국과의 연대를 언급하심은 경솔하다고 봅니다. 세계의 어떤 진보적 조직도 국내 정치적 기득권의 획득을 위해 외국 조직과 연대하지 않습니다. 국내 문제는 어디까지나 자국민의 지지와 동조를 얻어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정간섭 차원이 아니라 외환죄 차원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조직이 있긴 있었죠. 공산당 조직 말입니다.
요슈카 피셔로 유명한 녹색당은 진보적면서도 논리적이고, 게다가 사회의 분위기에 너무나도 잘 부응하는 매니페스토로 승부하여 꽤 성공한 당입니다. 기민, 사민이 이제 녹색당의 눈치를 안볼래야 안 볼 수가 없는 상황이죠. 이렇게 시민을 평화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진보적인 운동이 필요하며 우리의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에 충분한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와 같은 정치운동을 대안으로 내세우고 싶습니다. 물론 이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100년은 넘게 뒤진 것 같은 각기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민주적 시민의식이겠죠. 이는 교육과정 개혁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기존 노조에 가입하여 무조건적인 연대강화만을 외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님이 특정 당원이라거나 기관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식의 오해 말이죠. 기존의 노조가 완전히 일신하여 소모적인 투쟁과 붉은 띠를 버리고 정상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진보적 운동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생명력은 길지 못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단 참여한 이후에 바꾸자는 생각이야말로 저는 위험하다고 봅니다. 일단 참여한 이후엔 조직에 물들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외부에서 끊임없는 압력과 통제로 조직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든 뒤에 그 조직에 참가하는 것이 가능성 면에서도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것도 투쟁과 참여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노동운동 하신 분들 하는 이야기가, 왜 기술을 배웠냐고 물어보면, 내가 하급자에 심부름꾼 (시다) 면 누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겠나 하는 겁니다. 조직 내에서는 실력 있는 사람의 발언권이 큰 법이죠. 이 말인즉, 자기 직무에 먼저 충실해야 그 사람을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기 직무에 충실함은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를 건전하게 합니다. 투쟁, 파업으로 받을 돈 다 받아가면 멀쩡히 일하던 사람들도 상대적 박탈감이 클 것이 자명합니다. 다 투쟁하고 다 운동만 하면 생산은 누가 하겠습니까. 나눠먹을 파이가 있어야 파이 나눌 계획에 참여하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할 말 하려면 자기 의무는 다해야 한다는 것은 참 익숙하고 당연한 전제인데, 이것이 너무 쉽게 무시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