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선택으로 광주사태 선동한 김대중

후장킴 작성일 09.08.13 00: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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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선택

 

김대중씨가 3월부터 자유스런 몸으로 정치현장으로 되돌아오게 되면서부터 신민당내에 잠재해 있던 김대중씨 지지세력과 김영삼씨등 주류계의 알력은 표면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야권의 단결을 위하여 신민당은 초당적 차원에서 유신체제하에서 고생한 재야인사를 대폭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신민당내에 재야세력이 우위를 점함으로써 당내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무혈입성작전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씨측의 당권파는 당헌에 따라 부총재 1명, 정무위원5명, 중앙상무위원회에 30명의 범위내에서 재야인사를 영입하겠다고 맞서고 있었다. 3월 중순경에는 신현확국무총리가 유신체제를 비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물의가 일어났으며, 정부헌법개정심의 위원회에서는 2원집정부제를 구상하고 있다는 등 밑도 끝도 없는 갖가지 풍설이 나돌고 있었다. 아무렵 동교동에서는 연일 김대중씨 주재하에 정책연구실과 비서실 그리고 민주헌정연구회 간부들이 회합을 거듭하며 정국의 추이를 예의 분석, 검토하고있었다.

 

김대중씨는 신민당에의 무혈입성을 위해 매수공작도 병행시키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비서실장 예춘호씨에게 1천만원, 이용희 의원등에게 1천만원을 주어 공작을 벌였으나 당권파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김대중씨와 참모전에서는 신민당에 편승하여 정권획득기반을 구축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과도정부에서는 기득권을 이용하여 계엄을 장기화시킨 가운데 정권을 계속 장악하려는 것으로 동교동측은 분석하고 있었다. 야당측이나 정부측이나 그 어느 쪽도 동교동측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시점에서 그들은 답답하고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만약 헌법이 어떤 형태로든 개정이 되고 선거가 치러진다 하여더라도 정당조직을 갖지 못한 동교동측으로는 열세를 면치 못할것은 불을 보듯 빤하게 내다 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집권경쟁은 김영삼 신민당총재와 공화당총재 김종필의 대결장으로 화해 버릴것이고 조직을 갖지 못한 김대중씨가 소외될 것이라는게 동교동측의 정치계산이었다. 사태는 명백해졌다. 이제는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동교동은 정권을 획득하느냐, 낙오가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것은 제3의 선택을 불가피하게 요구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거를 통한 정상적 방법을 가지고는 정권획득이 어렵다는 전제위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상대방보다 힘이 약할 때는 정공법으로는 승리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변칙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교란시킨 다음 헛점을 노려 맹타를 가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

 

먼저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신민당총재 김영삼씨도 "총재직 직무집행정지 가처분"파동, 국회의원직 제명파동등으로 선명성에 있어 어느 정도의 평가와 국민적지지를 받고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하에서는 항상 체제내에 참여 하였으며 투쟁경력으로 보아도 감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못해 본 정치인들이다. 그에 비하면 김대중씨는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데다 가택연금, 교도소등 유신체제하의 가장 큰 피해자라는 점을 내세우면 별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다음 공화당총재 김종필을 보면 그는 유신체제하의 국무총리로그 체제의 제2인자이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듯이 새시대의 창조에 유신잔당은 물러가라고 몰아 붙이면 그 사람도 간단히 끝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다음에 제일 어려운 상대는 정부이다. 정부는 "10.26사태"로 바야흐로 민주화의 열망이 국민들 가슴속에 열화처럼 타오르고 있는 때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이키려는 음모가 있으므로 우리 국민은 단결하여 이를 분쇄하자면서 먼저 궁지에 몰아 넣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약점을 찾아 공격을 시작한다. 계엄령의 즉각해제, 정부주도하의 개헌작업포기, 유신잔존세력의 퇴진과 민주화일정에 따른 조기 정권이양등...

 

공격목표는 설정되었다. 남은 것은 이것을 어떠한 수단을 동원하여 실행하느냐의 방법론뿐이다. 그것은 별로 힘안들이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기자회견, 시국선언문, 성명발표, 학원내의 시국강연, 4.5월에 많은 각종 문화행사에의 참여와 즉석연설등 주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선전, 홍보전을 동원한다.

 

그 다음은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면서 민중이 자신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유도하고 이를 거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간다. 이때 민중운동의 주체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농민등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촉발하기 쉬운 사회계층으로 한다. 이같은 민중운동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은 이미결성된 "민주헌정동지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을 활용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그것을 민중운동의 모체로 전환시킨다...

 

정권획득전략은 완성되었다.

 

작전계획이 완성되자 김대중씨는 계획의 첫번째 실험장소로 매주정기적으로 수요강좌를 여는 서울 명동소재 ywca를 택했다. 디데이는 3월 26일, 강연제목은 "민족혼과 더불어"라고 결정했다. 정치활동이 허용된 후 처음 갖는 대중연설인 만큼 김대중씨는 이날 강연이 대성공을 거두도록 용의주도한 세부계획까지 스스로 지시했다. 비서진에게는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민주헌정연구회 회원들을 동원하고 요소요소에 사람을 미리 배치하여 자시의 강연내용이 절정에 다다를 때에는 "옳소"하는 함성을 지르게 하거나 박수를 치도록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렇게 까지 않더라도 전 대통령후보까지 했던 네임 밸류나,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김대중씨의 첫연설이 라면 많은 사람이 모여 들 것이었다. 또한 알아주는 김대중씨의 말솜씨로 보아 박수도 제법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수년만에 처음하는 대중연설이라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정치가 그런것인지 모르겠으나 무엇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미는 것은 내 성미에는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김대중씨를 따라 ywca강당에 도착했을때는 그런 방법으로 동원된 탓인지 문자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청중이 장내를 꽉 메우고 있었고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박수소리에 묻혀 연단에 오른 김대중씨는 특유의 억양과 제스추어로 청중들을 휘어 잡기 시작했다. 자신은 현재 법적으로 복권은 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복권이 되지 않아 tv, 신문과의 단독 인터뷰는 보도가 되지 않으며, 일본에서의 납치사건은 쓰지도 못하에 하며, 3 김대중씨에서 자신의 책만 팔지 못하게 한다면서 현정부가 자신과 다른 두 김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장관, 총리, 대통령등 몇사람이 몇백억, 몇천억의 부정축재를 하고 있다고 성토한 김대중씨는 현정부의 참여자들을 유신잔당으로 몰아 퇴진을 요구하고 민주세력이 다음 정권을 담당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다 함께 결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씨는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그나라 국민의 피를 마시고 자라며, 민주주의는 국미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 말은 결코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라 진실인 것"이라고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 동원된 사람들의 선창에 따라 수시로 "옳소!"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처럼, 이나 재미 있었던 것은 김대중씨가 뜻하지 안은 실수를 범한 대목이었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나머지 "예수는 나의 형님"이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또 자신은 "원할 때면 언제나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한다"고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좁은 명동거리로 빠져나온 청중들은 자연히 데모군중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중에는 "김대중만세"를 외처대는 청년도 있었다. 물론 비서진에서는 청중들의 반응이나 태도와 여론등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다. 이날 밤 동교동에서는 ywca강연이 대단히 성공적 이었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앞으로 전개해 나갈 민중운동에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신민당내 김영삼총재 지지세력과 김대중씨 지지세력간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고 폭력사태까지 일으키게 되자 시중에서도 이를 우려하는 여론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같은 사태를 의식한 듯 김대중씨는 4월 4일 김영삼총재를 단독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자리에서 두 사람은 앞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신민당과 재야세력이 단합한 모습을 보여 줘야하며 잘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론에만 합의했을 뿐 재야인사의 신민당 영입범위에 대하여는 여전히 의견을 달리하여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미 예견된결렬이었다. 벌써부터 참모진들과 민중운동에 기반을 둔 정권획득투쟁에 나서기로 방침을 굳힌 김대중씨는 처음 열린 ywca강연을 통해 민중운동방향에 관한 자신감을 갖고 있어 이런회담은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이날 회담은 재야인사를 영입하지 않는 책임이 신민당에 있음을 분명히 해 두자는 전술에 불과한 것이었다.

 

회담결렬 3일후인 7일 김대중씨는 비서진에게 언론기관에 연락하여 기자들을 동교동집으로 모이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 날은 신민당 중앙상무위원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중앙상위가 열리기 앞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김대중씨는 신민당입당 포기를 선언했다.

 

김대중씨는 기자들에게 "신민당이 재야인사의 적극적인 영입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입당교섭 포기가 불가피했다"고 입당포기 이유를 설명했다. 그 3일후 나는 김대중씨를 모시고 "국민연합"공동의장의 한 사람인 윤보선씨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윤보선씨를 비롯하여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함세웅, 김종완, 김승훈, 계훈제, 박형규, 이우정씨등이 모여 있었다. 김대중씨는 이자리에서 신민당입당을 포기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앞으로 "국민연합에 복귀하여 민주회복투쟁에 전념하기로 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국민연합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김대중씨의 신민당입당포기 지지 및 국민연합 복귀환영성명을 발표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으나 윤보선씨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윤보선씨는 기자들에게 "김씨가 국민연합에서 활동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신민당을 성급하게 이탈한 것은 잘못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윤보선씨는 또 정치인은 정당을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주력하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었다.

 

윤보선씨가 김대중씨의 신민당 입당포기에 반대하자 김대중씨는 윤보선씨를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과 저녁8시 북악파크호텔에서 다시만나 이들을 설득하여 만든 김대중씨의 신민당입당포기 지지와 "국민연합"복귀환영성명을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씨는 "국민연합"을 주체로 한 민중운동 투쟁전열을 정비 강화하기 위해 국민연합기구를 개편, 보강토록 지시했다. 개편된 국민연합 기구에는 중앙상임위원장에 문익환목사, 부위원장에 시인 고은씨와 함세웅신부, 중앙상임위원에 예춘호, 이문영, 계훈제, 김승훈씨등 김대중씨 개인의 비서실, 정책연구실 인사들을 선임토록 했다. 그것은 물론 김대중씨가 "국민연합"을 마음대로 조정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개편된 "국민연합"기구의 총무국장에 서울대 복학생인 이현배, 조직국장에 장기표, 홍보국장에 심재권씨 등을 임명하고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했다. 나는 김대중씨가 이들 세 복학생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학원에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이들을 민중운동의 전위로 삼으려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와같이 "국민연합"의 조직정비를 끝낸 김대중씨는 1일 대전에서 열린 한국카토릭농민회주최 민주농정실현을 위한 농민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기점으로 대중연설에 돌입하였으며, 나는 김대중씨를 따라 각지역에서 열리는 대중강연에 자주 나가게 되었다.

 

한국신학대학 개교 40주년 기념행사의 연사로 초청을 받았다.

행사일인 4월 16일을 앞두고지난번 ywca 강연때와 마찬가지로 대회에 많은 인파가 모이도록 비서진에게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때에도 청중동원에는 민주연합 청년동지회등 김대중씨의 사조직이 전단 10만장을 인쇄하여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내 요소 요소에 뿌렸었다.

 

내가 김대중씨를 수행하여 수유리에 있는 한신대 캠퍼스에 들어가니 과연 강연장에는 수만명의 청중이 몰려 들었고 주최측도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릴 줄은 예상치 못했던지 그때에야 옥외확*를 몇개더 가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날의 강연제목은 '도덕정치의 구현'이었는데 김대중씨는 특권층은 수억 혹은 수십억의 호화주택에 살며 몇백만원짜리 비단잉어를 기르고 고래수염으로 이쑤시게를 한다면서 부유층의 부도덕성을 신랄히 비난했다. 김대중씨는 이 무렵 신민당총재 김영삼이 "민주화의 구심점은 신민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반해 "재야세력이 민주세력의 구심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강연에서도 독재하에서 감옥에 가고 고문, 연금, 공민권박탈을 당하고 학원과 직장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민주정부의 횃불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김대중씨는 또 정권의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가운데 "박정권은 정적을 살해하기 위해 자동차충돌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물론 71년 8대국회의원 선거당시 지방유세를 나갔던 자신이 무안부근에서 대형트럭과 부딪친 교통사고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제2장에서 썼듯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김대중씨의 주장을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틀 후 동국대학 학생회측은 4.19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4.19혁명과 민족통일"이라는 제목으로 김대중씨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이때도 청중 동원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였는데 김대중씨는 자신의 사조직인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박정훈 부소장에게 지시하여 확*를 가설하도록 했다. 나는 김대중씨를 수행하고 다니면서 자연히 김대중씨가 다른 곳에서 했던 강연내용과 비교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약5만여명이 모인 동국대학 강연에서 김대중씨는 "10.26사태는 어떤 단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독재에 항거해 온 전국민의 혁명"이라고 찬양하면서 "탄압을 받더라도 우리가 끈질기게 저항하면 기필코 성공 할 것이라"고 열번을 토했다.

 

김대중씨의 강연내용은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강경해 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날의 강연도 듣는 사람에 다라서는 "10.26사태"와 같은 것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할 만큼 선동적이었다. 강연이 끝난후 청중들은 빠져 나가면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여러가지 구호를 부르는 청년들이 눈에 띠었는데, 청중에 선두에 선 학생은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연신 외쳐 대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다른 곳 강연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청중속 이곳 저곳에 몇사람씩 끼어 구호를 외쳐대면 그 청중의 행렬은 영낙없이 시위 대열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 시위행렬과는 대조적으로 동국대학 강연에서는 또 색다른 데모가 벌어 져 청중들의 눈길을 끌었다. 김대중씨의 강연이 시작되기 30분 전쯤 이 대학 승가과 학생 몇명이 승복을 입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불상앞에서 피켓을 들고 데모를 벌였다.

 

학생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예수동생 김대중씨, 대한민국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 됩니다"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동국대학 강연도중에는 학교기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하여 김대중씨는 비서를 보내 "강연회로 인해 기물이 파손되는 등 물의를 빚은 데 대해 깊은 사과의 뜻을 표한다"는 사과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주일후 나는 김대중씨와 서울 태평로에 있는 코리아나 호텔로 갔다.

 

중견언론인들의 친목단체인 관훈클럽 토론회에 초정을 받은 것이다. 오후 6시 반쯤 호텔 글로리아룸에 우리가 도착하니 각 신문, 방송, 통신사의 중견기자 3백여명이 꽉 들어차 있었고 동교동에 취재차 자주 들르는 낯익은 기자들도 많았다.

 

김대중씨는 동국대학 강연에 이어 여기서도 "10.26사태"의 의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0.26사태는 민중이 주체였던 동학농민혁명, 민족이 주체였던 3.1독립운동, 민주학생이 주체였던 4.19혁명을 총괄적으로 계승한 민중, 민족, 민주의 국민적 의지의 집약적 표현이라 하겠읍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유, 통일을 거부해 온 반민중 반민족, 반민주 세력에 대한 국민적 투쟁의 결과였읍니다."

 

김대중씨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10.26사태"는 국민투쟁의 시작이지 결코 그 완결은 아닙니다. 유신체제의 장벽을 헐고 민주체제를 열기위한 돌파구의 구실을 한 것이지 그것이 바로 민주대로를 닦아 놓은 것은 아니며 민주대로는 이제부터 온 국민의 새로운 각오와 결단에 의해 마련되어야 합니다"라고 해ㅤㅆㅏㄷ.

 

이렇게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을 계속하는 한편 김대중씨는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강연하는 장면을 비디로 테이프에 담거나 강연내용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하여 이를 산하 조직을 통해 전국의 대학가와 지방에 배포토록 하고 있었다.

 

관훈클럽 토론회 4일후 우리는 윤봉길의사 서거 48주년 기념추모제에 참석하기위해 충남 예산으로 내려갔다.

 

그곳 덕산여관에 투숙한 김대중씨는 추모제에 참석하기에 앞서 서울에서 수행해 내려 온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①계엄령해제 ②정부개헌작업포기 ③정치일정단축 ④연내정권이양등을 위해 "국민연합"을 주축으로한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체는 "국민연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자신의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민연합" 3인 공동의장의 한 사람인 윤보선씨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입후보 하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가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돌아 다니는 것을 누가 국민운동이라고 보겠느냐"고 못마땅하게 말했다. 윤보선씨는 또 "국민연합은 순수한 국민운동이지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고 김대중씨의 발언에 반대의 뜻을 표시하면서 민주화 운동은 시기도 적절치 못하며 운동이 지나치게 되면 계엄연장의 구실이 될 것"이라는 우렬르 표명했다. 그러나 대권이 눈앞에 보이는데 노정치인의 충고가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김대중씨가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등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학생운동의 임무를 부여하고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방침을 결정한 점, 정부전복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 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의 구성을 서두르는 점등이 그런 전망을 가능케 하는 것들이었다. 김대중씨는 샤도우캐비넷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민주제도연구소의 이사장에 예춘호씨, 소장에 이문영씨를 선임하고 각 분야별 전문위원 위촉을 서둘러 일부 인사로부터는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었다.

 

대중연설을 위한 김대중씨의 발걸음도 잦아지기 시작했고 학원가의 소요도 날로 격렬하기 시작했다. 5월 8일 경주에서 열린 김유신 장군 추모행사에 참석한 뒤 김대중씨는 11일"동학제"에 참석하기 위해 전북 정읍으로 내려 갔다.

 

5만여명의 청중앞에 선 김대중씨는 "동학혁명이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를 하고 주의주장을 건의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라고 강경한 어조로 연설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민주주의 하에서도 정부가 재야세력의 민주화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중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정읍 유사이래 초대의 인파가 모였다는 이날 강연장에는 김대중씨의 3개 산하조직에서 동원한 청중과, 전라도지방 정치지망생들이 버스를 몇대씩 대절하여 동원한 광조, 전주 지역 주민들도 많았다. 이 호남지방 주민들에게 김대중씨는 "박정권 18년간 가장 큰 과오는 신라통일 이후 지방색을 다시 불러 일으킨 것"이라고 지역감정에 호소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서울을 깃점으로 충정도, 경상도, 전라도등의 순회강연을 마친 김대중씨는 다음날 북악파크호텔로 "국민연합"과 재야인사 들을 불러 모았다. 5백21호실에 김대중씨를 중심으로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동, 문익환, 심재권, 계훈제, 김종완, 이현배, 장기표씨등이 좌정하고 있었다. 이날 회의는 마치 그동안 전개해 온 작전 결과를 점검해 보는 전략회의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씨는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궁극적으로 반민주 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분쇄한 다음, 민주주의에 역행하여 온 독재정부를 무너뜨려 우리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대중씨는 또 동석한 장기표, 심재권씨등에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잘 살필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13일밤, 그동안 교내에서 시국성토를 하던 대학생들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동국대, 서강대 등 서울시내 6개대학 3천여명이 도심진출을 *로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4일에는 서울시내 29개 대학 4만여명의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나섰으며 지방에서도 부산, 대구, 광주등에서 학생데모가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15일에는 전국 66개 대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진출하여 학생데모의 결정을 이루었다. 서울역앞 광장은 서울시내 35개 대학의 10만여 학생들로 꽉 메워진 가운데 밤늦게까지 큰 혼란을 빚었다. 이날 데모대에낀 청년 1명이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데모진압경찰대열로 차를 난폭하게 몰고 들어가 전경대원 한명이 차에 치어 숨지고 네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낮 2시쯤 동교동에는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서남동, 이해동씨등이 속속 모여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민주화촉진국민대회 선언문"초안이 검토되었다. 동교동은 이제 숨쉴 겨를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뭔가 막바지에 온 느낌이었고 비서진은 바쁜 가운데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다음날인 16일 언론기관과 각 대학에 배포된 "국민연합"명의의 선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국무총리의 퇴진, 정부 개헌 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등에 대해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의 명확한 답변을 국민앞에 밝힐것을 요구하며,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국민연합"은 5월 22일부터 국민과 더불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는 민주화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이 경우에 발생되는 모든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음을 경고해 둔다. 그것은 "민중봉기"를 앞둔 "최후통첩"이었다.

 

그 아래에는 국민들의 "민주화투쟁"동참을 위한 행동강령이 여러개 나열되어 있었다.

 

17일 아침 8시 김대중씨는 북악파크 호텔로 갔다.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씨등 7.8명이 모여 있었다.

 

김대중씨는 이 자리서 "민주화촉진 국민운동본부"를 빨리 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최규하대통령이 시국대책에 관한 태도가 불투명하면 선언문에서 예고한 것처럼 전국민적 궐기를 결행할 것을 결의했다.

 

"민주화촉진 국민운동본부"  - 그것은 김대중씨가 실행해온 민중운동의 지휘본부와 같은 것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북악산 산록 너머로 "서울의 봄"은 천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10.26이후 우리에게 주어졌던 민주화의 가능성과 함께...

 

이날 밤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었고, 나는 계엄군들의 총뿌리 앞에다 가슴을 들이밀어야 했다.

 

(출처 : 함윤식, 동교동24시 - 191~295p 발췌)

 

 

 

 

 

 

 

김대중의 공작으로 비극을 당한 당시 광주 시민들께 심심한 애도의 마음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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