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친일파 - 이완용 가문은 풍비박산

lkajs 작성일 09.08.14 17: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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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친일·항일 ‘굴곡진 100년사’]

장남은 요절, 차남은 일본 귀화

증손자 92년 땅찾기 소송 ‘눈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경술국치’ 당시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1858~1926) 가문은 해방 이후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이완용 자신도 ‘대표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던 탓에 살아생전 자객의 습격을 받아 생사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승구·항구 두 아들을 두었지만, 장남이 1905년 요절하는 바람에 차남 항구의 아들인 병길이 가문을 이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는 거부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이후 기록에선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송병준 등 다른 ‘매국노’들의 경우, 자손 간의 다툼으로 재산이 공중분해됐다는 사실을 당시 신문 기사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가 도입되면서 조선 귀족들의 효용 가치는 더욱 줄었고, 일제의 푸대접도 심해졌다. 이완용은 3·1운동 이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4월5일치 1면 톱으로 “동포의 자중을 당부한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듯 2·3차 경고문은 사회면 중간으로 줄어들었다.

해방 이후 이병길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반민특위가 무력화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92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땅 712평(당시 시가 30억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내고 승소해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윤형이 그의 아들이다. 이윤형은 그 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2002년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차남 이항구는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에 숨졌다. 일제 말기라 그 아들인 이병주가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특별한 친일행위가 확인되지 않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는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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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사에 어떤분이 말씀하시더군요...

 

▶ 그때 일본은 한반도 먹으려고 작정했는데 도장 안찍어주면 어떻게 할겁니까? 나폴레옹을 박살낸 러시아군과 동아시아 패자였던 청나라군도 일본과 싸워 모두 졌습니다. 이런 일본군에 당시 대한제국이 선전포고 하고 붙었으면 서울은 초토화되고 제2의 난징됐을겁니다. 이완용은 전쟁을 막고 불필요한 희생을 최대한 줄이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겁니다. 이완용을 욕하시려면 그당시 이완용의 선택보다 더 나은 대안이라도 있다는 겁니까? 일본군과의 전면전?

 

이라고 말씀하시던군요...과연 아름다운 내부변절자...즉 매국노에 대한 미화가 아닐까 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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