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무 복무’ 주장 공론화 분위기, 전국 성인 1천명 여론조사
군사주의 문화를 뒤집는 대안인가, ‘우익 마초’에 휩쓸리는 위험한 발상인가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헌법 제39조 1항은 지켜지기도 하고 안 지켜지기도 한다. 국방의 의무를 대표하는 병역 의무에서 여성은 ‘면제’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성은 병역 의무에서 ‘배제’돼 있기도 하다.
병역법 제3조 1항은 “대한민국 국민인 남자는 헌법과 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여자는 지원에 의해 현역에 한해 복무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여성은 선발 과정을 거쳐 장교나 부사관으로 복무할 수 있지만, 의무 복무가 아니라 지원 복무다.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는 동시에 배제되는 ‘이중의 정치적 부담’을 지고 있는 셈이다.
여군 간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논의
수많은 남성들에게 ‘영광’이자 ‘상처’인 병역 의무를 여성들이 같이 수행한다면? 다소 생뚱맞아 보이겠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군 안팎에서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난 7월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안보포럼(대표의원 송영선)의 ‘안보! 남성만의 영역인가?’ 토론회에서는 ‘여성 의무 복무’ 주장이 제기됐다. 대령 출신의 김화숙 재향군인회 여성회 회장은 “만 18살 이상 여성이 1년에서 1년 반가량 병역 의무를 지는 것을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면서 “시대가 변한 만큼 적극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시대 변화’의 근거로 “사회적으로 양성 평등이 뿌리내리고 있고, 군 내부에서도 여군들의 능력이 검증됐다”는 것을 들었다. 공식 석상에서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또 다른 발제자였던 독고순 한국국방연구원 국방사회조사통계실장은 “국방의 의무에 여성도 동참해야 한다고 보지만 남성과 똑같은 형태의 병역 의무를 지는 것은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유보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이날 토론회는 여군 간부 비율 확대가 주제였으나, ‘여성 의무 복무’ 주장이 더 큰 관심을 모았다.
그동안 ‘여성의 국방의 의무’는 우리 사회에서 지극히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전개돼왔다. 군가산점 논쟁 전후로 “남자만 군대 가는 건 억울하다, 차별이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대해 “왜 여자를 트집 잡냐. 여자가 남자 군대 보냈냐’는 반박이 따랐다. 남녀 감정 대립으로 치달으면서 “그럼,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이 남성들 사이에서 터져나왔고, 일부 여성들은 “그래, 우리도 군대 가서 똑같이 갈궈주마”라고 맞섰다. 이성적으로 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2003년 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여자, 군대를 말한다’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내보내면서부터다.
이김정희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기고문에서 ‘양성군대’ 유지 방안으로 “징병제인 상태에서는 여자도 함께 징병 대상이 돼야 하고 모병제가 되면 어느 한 성의 비율이 70%가 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여자가 군에 가서 군을 바꿔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이김정희 교수는 이런 주장의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군 문제가 안티 페미니즘의 온상지가 되는 것에 비해 ‘여성도 군대에 가자’라는 담론이,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왜 이제껏 하위 담론으로라도 선보이지 않았을까? 내심 ‘그 끔찍한, 비인간화의 온상지인 군대에, 그것 말고도 받는 차별이 얼마나 많은데 여성이 왜 가?’라는 여성들의 집단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군에 대한 근원적이지 못한 이런 편의적 발상이 ‘성차별이다. 여자도 군역을 해라’라는 남성들의 철학 없는 반발을 재생산하는 것은 아닐까? ‘혹여’ 하는 의구심에서 해보는 소리이다. …우리 사회가 군사정권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군 문제에 대한 담론화의 부재가 타성화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른바 ‘신의 아들’이 못 되는 ‘어둠의 아들’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 그들이 당하는 무의미한 고통과 모욕에 대한 대안을 함께 모색할 때가 된 듯하다.”
‘효과’에 대해선 긍정적 여론이 우세
이 글은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평화·군축의 가치를 간과했고, 군사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적절치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여성이 당하는 이중·삼중의 차별을 건너뛰고, 형식적인 남녀평등을 내세웠다는 비판도 따랐다. “안티징병제가 훨씬 더 현실적인 양성평등의 대안이다”(권혁범), “군대라는 상태가 남성화된 권력의 형태로 유지돼왔는데 여자가 30% 이상 들어간다고 과연 바뀔까”(권김현영), “성별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여자도 군에 가야 된다는 논리는 자칫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문제 등) 나머지 사회적 관계를 가릴 우려가 있다”(윤정은)는 것이 대표적인 비판 의견이었다.
<이프>의 논의가 군 밖에서 이뤄진 것이라면, 군 안에서는 어땠을까? 김화숙 회장은 “90년대 초반부터 여군 내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부’를 튼튼히 할 수 있을까 하는 논의를 줄곧 해왔고, 그 가운데 여군병 제도도 검토했다”면서 “윗선까지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여군들은 많이 고심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군 출신 인사는 “특정 성에 치우친 군 조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책 결정 과정에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했다”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려면 국방부 장관이 여성이 돼야 하고, 여성 장교들이 많아져야 하고, 병사 100%가 남성인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여군병이 있었다. 1950년 여자의용군 491명이 배출된 이래 1970년대 초반까지 중졸 이상의 학력자를 지원자에 한해 선발했다. 이들은 각 부대에 배속돼 타자·통역·교환 등 행정 보조 업무를 맡았다. 간혹 심리전에 투입되기도 했으나 철저히 ‘성별 분업화된’ 형태로 ‘(남군) 장병을 돕는 (여군)병’으로 복무했다. 미국을 위시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여군은 간호직으로 출발해 전시 보조 인력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남군 인력이 부족해지거나 징병제의 효력이 상실하면서 역할이 확대된 역사를 갖고 있다. 남군의 ‘대체 병력’이었던 셈이다. 스웨덴과 독일 등 ‘선진 징병제 국가’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서야 ‘성 역할’ 인식의 변화에 따라 여군과 남군을 ‘동등 병력’으로 인정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여성의 국방의 의무와 병역 의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국방의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한 찬성·긍정적 검토 의견이 절반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21>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해 지난 7월25∼26일 전국 20살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1천명 전화 여론조사를 했더니, 응답자의 22.2%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답변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의견은 27.2%로, 찬성과 긍정적 검토 의견을 합하면 49.4%에 이르렀다. “반대한다”는 의견은 27.6%였다. “찬반을 떠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은 21.7%로 나타났다. 찬성 의견에는 남녀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반대 의견은 남성(30.2%)이 여성(24.9%)보다 더 많았다. 긍정적 검토 의견은 여성(29.5%)이 남성(24.9%)을 눌렀다. 이번 조사의 오차범위는 95% 신뢰수준에서 ±3.1%이다.
‘상징적 선언’과 ‘현실적 정책’ 사이
‘국방의 의무’는 군에 가는 ‘군복무’와 다른 형태로 복무하는 ‘대체복무’가 혼합된 개념일 수 있다. 그래서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의무적으로 군에 가는, 즉 징집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다시 물었다. 찬성이 15%, 긍정 검토가 27.6%로, 둘을 합하면 42.6%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 40.7%보다 앞섰다. ‘국방의 의무’ 찬성·긍정 검토 의견보다 수치가 낮아진 것은 ‘징집’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한 탓으로 보인다. 찬반 의견을 떠나 여성이 병역 의무를 지게 된 뒤의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여론이 우세했다. “병영문화 개선 등 군 문화가 발전할 것”(29.9%), “남성 우월주의 문화가 바뀔 것”(20.5%), “병역을 필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해질 것”(19.3%), “징집에 따른 (남성들의) 피해의식이 줄어들 것”(15.7%), “복무 기간이 줄어들 것”(8%) 순으로 꼽았다.
‘여성의 의무 복무’가 현실 가능성은 있을까?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한겨레21>의 질의에 “여성의 병역 의무는 정책적으로 고려하거나 검토한 바 없다”고만 밝혔다. 그러나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국방정책을 입안했던 한 고위 관계자는 “선진국의 특징 중 하나인 여군의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으나, 의무병이 모두 남성인 가운데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을 배치하는 게 우선 과제여서 여성의 역할은 강화하고 싶어도 역부족이었다”고 덧붙였다.
국방정책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군사연구가들은 ‘상징적인 선언’일 수는 있지만 ‘현실적인 정책’이 되기는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다. 이 의견에는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와 ‘여성은 군복무에 부적합하다’는 의식이 섞여 있다. 정창인 재향군인회 안보연구소 연구위원은 “(여성의 병역 의무는) 국민 정서상 맞지 않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일반 의식을 스스로 파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이 지금처럼 직업 선택의 방편으로 지원해서 군에 들어가는 것과 국가가 강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군 출신 가운데 여성의 국방의 의무를 주장하는 분들은 ‘전투업무’에 대해 사치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상징적인 역할과 본격적인 역할은 다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회 안보포럼에서 “여성 최전방 배치”를 주장했던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황진하 의원(한나라당)은 “어느 정도 국민들이 공감하는지는 확인해야겠지만, 충분히 검토 가능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의 병역 의무’에 따른 세 가지 ‘효과’를 내다봤다. △저출산 분위기 속에서 병력 수, 병역 형평성 문제가 해결된다 △여성의 장점을 국방력에 활용할 수 있다 △남성의 우월의식을 해소할 수 있다 등이다. 황 의원은 “적절한 의무 부과 방식과 이를 위한 조건은 세심하게 검토해야겠지만, 법적 절차를 밟을 때 반영할 문제”라며 “이젠 전투력 수행 방법과 목표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사이버 공간을 주축으로 터져나왔던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은 다분히 감정적인 형태였다. 최근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도 포착된다. 20대 남성이 주축이 된 인터넷 카페 ‘남녀공동병역의무추진위원회’(cafe.daum.net/mwdraft) 운영자 김남훈(23)씨는 “여성 대통령이 나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서 여성 군복무를 주창했다. 김씨는 “나는 남성우월주의자도 여성우월주의자도 아니다”라면서 “다 같은 국민인데 특정 성이 배제되거나 특정 성에게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 중지되기 바랄 뿐”이라고 강조했다. 김씨가 유독 ‘치우침 없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난 2003년 이래 2년간 군 경험에 따른 피해의식이나 우월의식으로 입이 거칠어진 ‘사이버 마초’들과 일대 격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하루 100∼200명이 다녀가고, 1천명가량이 꾸준히 활동하는 이 카페는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정회원 ‘등업’ 기준과 개별 아이디부터 표현 수위까지 아우르는 ‘네티켓’ 기준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있다.
치밀한 준비로 양성군대 구축해가는 독일
독일은 1990년대 중반부터 ‘여성 전투병과 배제’의 오랜 밑바탕이 됐던 “여성은 무기를 만질 수(다룰 수) 없다”는 헌법 조항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 2000년 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그 뒤 여성의 군복무가 늘어 4년 만에 여군 수는 6%를 기록하고 있다. 전사회적으로 ‘치밀한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다. 여군 호칭법과 막사 노크법까지 꼼꼼히 적힌 매뉴얼을 기초로 장교 교육부터 했고, 공동 복무를 위한 시설과 교육 체계를 갖추는 데도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올 초에는 ‘막사 안에서의 성관계’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다. 독일 국방부와 공영방송은 ‘날밤 가리지 않고’ 이를 홍보했다. 그러나 독일의 적-녹 연정은 여전히 여성의 의무 복무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모병제 전환’과 ‘국방의 의무를 포괄적 사회봉사로 바꿔간다’는 의견이 나란히 제기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에서 독일 군대와 독일 사회는 양성평등과 새로운 안보 개념에 대한 커다란 ‘국민 교육’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군사주의의 폐해를 경험한 한국의 평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병역 의무’ 주장이 군사주의 논리를 강화한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단지 ‘군에 안 다녀왔다’는 이유로 당하는 여성들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병력 감축을 해야 할 마당에 이런 주장이 제기되는 건 어리석고도 위험하다”면서 “‘우익 마초’ 논리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김재희 <이프> 편집인은 “당장 군대 문을 닫을 게 아닌데 언제까지 여성은 군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하고 영원한 ‘2등 국민’에 머물러야 하는가”라면서 “동등하게 책임을 지면서 군대와 군대에서 파생되는 차별과 폭력을 바꾸는 것도 평화운동이다”라고 반박했다.
대한민국에서 군대 문제만큼은 전문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저마다 ‘할 말’이 있다. 그러나 군 정책에 관한 한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은 늘 ‘분단 현실’ ‘신성한 의무’ ‘부족한 예산’에 묻혀야 했다. 일부 여군 출신들과 여성주의자들이 꺼낸 ‘여성의 동등한 국방의 의무’가 ‘남녀의 공동 병역’으로 이어질지, ‘군사주의 문화의 변화’로 귀결될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의무와 권리는 나란히 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군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은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