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사회학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주제로 발표수업을 했던 때에 (무려 90년대로군요 ㄷㄷㄷ)
저의 입장은 분명히 '파시즘은 현대의 복잡해진 사회구조 안에서는 애매모호한 테제일 수밖에 없다' 라고
무려 서적을 통해서까지 표방했던, 우리 안에 파시즘이 있다는 논설을 부정해본 적이 있습니다.
2차대전 전후로 파시즘이란 것은 사회적 흐름으로서 간주되었고, 현재도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사회학자들의 고답스런 정의에 갇혀 변화된 상황을 논외로 한 채 파시즘을 논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도 여전히 미디어적 파시즘이란 것이 존재하고 있긴 했습니다만.....
파시즘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아주 간단한 설정상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파시즘 전파자가 정보와 상황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파시즘을 받아들이는 자가 인지구조가 단순하여 받아들인 정보에 대한 비판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정보수집에 게으르고 단편적이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상황만 되어도 파시즘은 쉽게 구현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파시즘의 작동구조를 와해시키는 가장 큰 요소가
다양한 정보의 공유와 확산, 그리고 개인의 노력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사회학 수업을 듣던 그 당시 쯤이면 막 PC통신에서 넷브라우저를 이용한 인터넷 개념이 나왔을 때고,
저만 해도 그 때 당시 넷츠고(!) 때부터 인터넷 토론을 거치면서 제 말들의 무게를 실감하곤 했지요.
뿐만 아니라 정보수집의 손쉬워짐으로 인해서 그만큼 토론에서 나올 수 있던 정보들도 많아졌구요.
과거, 사회학자들이 파시즘이란 유형을 내놓을 때만 해도,
미디어라는 것의 양방향성이 전혀 구현이 안되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미디어의 양방향성이 충분히 구현되고, 정보들이 공유되는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과연 이것만으로 파시즘이란 것이 소멸되었는가를 따지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정보를 쥐고 있는 자들의 통제권이 더 강화되었고,
둘째로 정보의 신빙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셋째로 개인의 경험적, 교육적 트라우마에 따라 정보를 선별하는 '취향'이
수많은 정보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기준으로 더 크게 자리잡았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정보취득의 게으름이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취향에 따른 정보취득의 문제는 다양한 정보의 취사선택을 막고,
역설적으로 인지구조를 더욱 단순화시킬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게 되었던 거죠.
결론적으로, 파시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만,
적어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 라고 정리될 수 있겠네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그래서 더욱 그 말을 꺼내는 자가 스스로 무게감을 느껴야 합니다.
누군가를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것 자체가 파시즘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