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어디 한 번 또 우리를 가지고 놀아 보시지

운장모 작성일 11.10.26 10: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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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에서 대개 OK의 뜻으로 사용되고, 우리 나라에서는 한때 김영삼 대통령의 선거의 상징처럼 쓰였던 손가락 표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펴는)를 브라질에서 했다가는 칼을 맞을 수도 있다. 매우 극심한 손가락 욕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표현은 나라마다 대륙마다 매우 다양하다. 전 세계 공용처럼 쓰이는 승리의 V도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야지 손등을 내밀면서 V자를 그렸다가는 매우 심각한 분위기와 마주할 수도 있게 된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모욕 행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손등을 내밀면서 그리는 V가 상대방에 대한 조롱으로 쓰인 유래는 1415년 10월 25일 오늘 일어난 중대한 사건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 사건이란 잉글랜드 왕 헨리 5세가 프랑스 군을 크게 무찌른 아쟁쿠르 전투다.

1415년 8월 프랑스에 상륙한 헨리 5세의 잉글랜드 군은 잔뜩 지치고 병들어 있었다. 성 하나를 뺏기 위해 공방전을 벌였지만 전투보다는 이질 등의 질병으로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월동 장비를 구하기 위해" 또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헨리 5세의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북부의 칼레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행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창투성이의 땅 아쟁쿠르에서 그만 절치부심 영국군을 전멸시키리라 맹세하던 프랑스 기사군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양측의 병력 추산은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병력 수가 많았고, 뭣보다 영국군들이 갑옷은커녕 가죽 누더기를 걸치고 길다란 활을 둘러멘 보병들이 주종을 이룬 반면, 프랑스 군은 당시의 최고급 장인들이 만들어 냈으며, 눈이 부셔 쳐다보기에도 휘황한 갑옷을 차려 입은 기사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귀족들이었다. 몇 시간 뒤 그 전장에서 죽어나간 프랑스의 귀족만 해도 공작이 3명, 백작이 5명, 남작이 90명이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영국군 보병들을 한껏 조소하며 저들을 쓸어버리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친과 할아버지 가운데에는 100년 전쟁 와중에 영국군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해 전사한 이들이 많았다. 그 복수심까지 겹쳐져서 프랑스 귀족 기사군의 전의는 비정상적으로 불타올랐다.

영국군 진중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새벽에 프랑스의 사자가 와서 항복을 권했지만 왕 헨리 5세는 단호하게 그를 물리쳤다. 이제는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그들의 앞에 뾰족한 말뚝을 박아 방호벽을 쳤고 프랑스군의 돌격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에게는 비장의 무기 하나가 있었다. 일찍이 웨일스 지방에서 쓰였으며 웨일스 토벌 작전 와중에서 잉글랜드가 얻은 비장의 무기 장궁이었다. 누더기 가죽 옷을 걸친 궁수들은 대개 웨일스인이거나 하층 농민들, 심지어 감옥에서 참전을 댓가로 풀려나온 죄수들도 있었다. 저 앞에 진을 친 프랑스 귀족 기사단의 위용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도 못되는 그들 앞에서 헨리는 그 심금을 울리는 연설을 한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으로 더욱 극적으로 윤색된 그의 연설 중 일부는 이렇다.

temp.gif "몇 안되는 우리, 그러나 소수이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나와 함께 피 흘리는 자는 모두 내 형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한 자라도 오늘 그의 지위가 고결해지리라. 그리고 지금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을 영국의 귀족들은 이 자리에 있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리라. 그리고 성 크리스핀의 날 (10월 25일) 우리와 함께 싸웠던 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인격이 부끄러워진다고 느끼리라..... 이 이야기를 선량한 사내들은 그의 아들에게 전하리라; 그리고 크리스핀 데이는 오늘부터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들을 기억하지 않고는 그냥 흘러가지 않으리라."

비천하고 볼품없으며 거지이기도 했고 도둑이기도 했던 자들, 항상 마상의 기사들에게 경배해야 했고 그 천지를 진동하는 말발굽과 햇살 받아 번쩍이는 갑옷 앞에 주눅들기 일쑤였던 영국 보병들은 자신들을 형제라 부르는 왕에게 환호한다. 이제 이 전투는 그들의 전투가 되었다. 영국 보병들은 그들의 키 만한 장궁을 굳게 움켜쥐고 프랑스 군의 돌격을 맞는다. 엉기적거리는 보병들쯤 단번에 밟아버리겠노라고 기세 좋게 돌격해 오던 프랑스 기사들 앞에서 영국군은 화살 잰 시위를 귓밥까지 잡아당겨서는 힘차게 놓았다. 화살의 소나기가 아쟁쿠르의 하늘을 가렸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재앙이 시작됐다. 진창밭이 된 아쟁쿠르의 벌판에서 프랑스 기병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1진과 2진이 뒤엉키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위풍당당하던 귀족 병단은 '상것들'로 구성된 장궁 보병대에 의해 짓뭉개지고 만다.

얄밉게도 화살을 쏘아 대는 영국 보병들에게 프랑스군은 잡히기만 하면 화살을 쏘는 검지와 중지를 잘라 버리겠다고 악을 썼고, 전투 후 포로가 된 프랑스 기사들에게 영국군 보병들은 온전하기 이를데없는 그들의 두 손가락을 내밀며 조롱했다. "어디 한 번 잘라가 봐라. 프랑스 돼지들아." 이것이 손등을 내민 V가 조롱과 욕설로 쓰이게 된 유래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설도 많다) 아쟁쿠르 전투의 전설 가운데 하나이다.
아쟁쿠르 전투는 중세 시대 내내 전장을 지배해 온 귀족 기사들의 중장 기병 중심의 전투의 패러다임에 평민 보병들이 일대 충격을 던진 전투였다. 돌진해 오는 그 육중한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 그들의 화려한 갑옷과 강철로 된 창과 칼이 내지르는 공포를 견디고, 냉철하게 기사들의 대열에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었지만 영국 장궁대는 마침내 그 일을 해 냈고 하늘같던 귀족들이 자기 앞에서 기어다니게 만들 수 있었다.

10월 25일은 성 크리스핀 데이, 아쟁쿠르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진 날이다. 하지만 10월 26일은 어쩌면 우리에게 아쟁쿠르의 전장이 펼쳐지는 날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 앞에 선 사람이 저 유명한 연설을 남긴 헨리 5세만큼 카리스마 있는 인물은 분명 아닌 것 같지만, 아쟁쿠르를 벗어났을 때 헨리 5세 역시 형제애를 발휘하지는 않았다.

비슷한 것이라고는 우리 앞에 선 저쪽의 대열이 철저한 귀족 군단이며, 99퍼센트를 등쳐 배를 채우는 1퍼센트의 기사들의 대열이라는 것. 갑옷은 오색으로 찬연하고 햇살에 반사된 창칼에는 무지개가 뜨며, 자신들의 긍지 높은 부와 권세에 대한 일점 손상도 거부하는 완강한 기득권층의 집결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앞에 선 우리는 검지와 중지로 만든 활과 붓두껍 비슷한 화살 하나만 가진 누더기 입은 보병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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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쿠르의 영국군은 1분에 15발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서울의 평민 부대는 단 한 번 쏠 수 있는 화살을 가졌을 뿐이다. 그래도 화살을 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살 하나씩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더 많은 화살의 빗줄기를 만들어내고, 기세 좋게 돌격해 들어오는 저 돈과 기득권과 나으리님들의 병단 머리 위로 퍼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국 보병들은 헨리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위해서도 싸웠다. 살기 위하여,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싸웠다. 우리가 쏘는 화살도 어느 변호사를 위해 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쏘는 화살이고,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으리라.

"사회의 대다수인 우리, 그러나 다수임에도 불행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나와 함께 활을 쏜 이는 모두 형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싸움의 시작, 우리와 함께 싸운 이가 늘 때마다 그러지 않은 이들이 부끄럽게 되리라. 이 이야기를 선량한 사내들은 그의 아들에게 전하리라. 그리고 10월 26일은 오늘부터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들의 첫 화살이 귀족들의 말머리에 꽂힌 날로 기억되리라."

"손등을 내민 V 대신" 이 자국을 들이밀자. 이 붓두껍 자국을 들이밀며 귀족들을 조롱하자. "어디 한 번 또 우리를 가지고 놀아 보시지!"
 
http://www.ddanzi.com/news/370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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