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주의입니다 ㅋㅋㅋㅋ
서적에서 발췌했습니다.
네오키즈 생각 : 유념하실 부분
유럽의 지형도에서 읽어낸 판단들이므로 한국이 처한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아직도 북한이라는 부분으로 인해 이념의 문제가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부분,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부분에 대한 문제는 숙고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특징적인 것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고 유럽 포퓰리즘이 포장을 하는 반면,
한국 땅에서는 어느 하나의 지형을 선택받게끔 강요되는 편협성이 있다는 것.
이제 정권이나 정파에서만 나오는, 혹은 언론에서만 나오는
일각의 정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 수집하고 통합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일반시민들의 책임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오고 있던 바에 합치되는
유럽의 예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여기 옮긴 본문 다음부터 펼쳐지는 유럽의 다원화주의에 대한 심각한 정치적 공격의 모순들도 생각할만한 점.
다음 부분을 요약하자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들은 다원화주의에 반대하는,
현정권 총리나 수장의 발언과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메르켈, 사르코지, 캐머런 등등)
심지어 이것은 한국 내의 외국인 노동자 차별에 대한 근거로 쓰여지기도 한다.
민주주의 내부의 적 , 츠베탕 토도로프, 반비, 2012
155-163p 발췌
6. 포퓰리즘과 외국인 혐오
포퓰리즘의 부상
인민주권은 민주주의 제 1 원칙이다. 그러나 진보나 자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 원칙 역시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인민과 천민,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이라는 통상의 구분법에서 이런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여러 나라의 사례를 살피며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자.
최근 몇십 년간 유럽에서는 포퓰리즘 정당의 급부상이라는 새로운 정치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냉전 이후 급격히 나타났다. 대중들이 자신들을 돋보이게 해줄 적대자를 필요로 하는 데서 이런 현상의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대중들이 자신의 두려움, 불안, 적대감을 다른 집단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대상이 바로 외국인인데 이들이 무슬림인 경우 외국인혐오증과 이슬람혐오증이 고조된다. 다양한 출신의 이민자들이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해, 위협적인 요소가 된다. 대다수 유럽연합 국가들 상황이 비슷하다. 예를 들어 간략히 살펴보자.
네덜란드의 격렬한 선동가 핌 포르퇴인은 ‘우리문화의 이슬람화에 반대하여’를 출판한 뒤, 자신의 이념을 수호하는 정당을 창설했다. 2002년 포르퇴인이 어느 네덜란드 젊은이에게 암살당한 뒤 이 정당은 국회 의석의 17퍼센트를 차지했다. 그의 죽음 이후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포르퇴인은 렘브란트와 스피노자 다음으로 네덜란드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뽑혔다. 몇 년 후인 2007년에는 새로운 선동적 웅변가 빌더르스가 등장했다. 그는 반이슬람 선동 영화를 제작했고 코란 금지를 요구했다. 2010년부터 빌더르스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그의 사상은 계속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례로 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전통 우파는 의회의 다수당이 되지 못했다.
이런 네덜란드의 상황은 2011년까지 덴마크와 유사하다. 덴마크 우파 정부는 피아 케어스고르가 이끄는 덴마크 인민당의 장외 지원 덕분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인민당은 ‘덴마크는 덴마크인에게’를 요구하면서 이슬람을 암적인 존재로 여겼다. 같은 시기 벨기에에서는 플랑드르이익당의 지도자가 ‘이슬람은 유럽은 물론 세계 제1의 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런 정치권력의 진술은 일상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브뤼셀 포레스트 지역의 감옥에서 일어났던 작은 사건이 떠오른다. 경찰관은 파업이 있던 날 간수를 교체했다. 10월 30일 복면을 쓴 경찰관 네다섯 명이 수감자를 때리고 독방에 가둔 후 옷을 벗기고 곤봉으로 등과 생식기를 때렸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구타당한 뒤 죄수는 ‘선지자 마호메트는 동성애자다’ ‘나의 엄마는 창녀다’라고 강제 복창해야 했다. 플랑드르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며 포레스트의 아부 그라이브 라고 일컬었다. 이런 사례는 유독 전염성이 강한 것일까?
스위스에서는 중도민주연합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던 크리스토프 블로허의 인종혐오 정당이 외국인을 국외로 추방해야 할 거북한 존재라고 선동했다. 블로허는 2009년에 스위스에서 미나레 (회교사원의 첨탑)를 금지하는 국민투표를 주도했다. 이 인종혐오, 이슬람 혐오 국수주의 민주당은 2010년에 스웨덴 국회에 입성했다.
프랑스인민전선 대표 장마리 르펜은 2002년 대선에서 결선투표에 올라 사회당 후보를 제치고 18퍼센트를 득표했다. 프랑스의 어느 소설가는 이슬람은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종교라고 비난했고 유력지의 어느 기자는 자신이 이슬람혐오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시인했다. 2011년에는 아버지에게 당수 자리를 물려받은 마린 르펜이 프랑스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20%가 차기 대선에서 마린 르펜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인종차별 경향이 약했던 독일에서도 반이민자 정서가 부상하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극우당 조빅이 인종혐오 선전을 강하게 펼치고 있다. (때로는 반유대주의를 주창한다) 2009년에 여러 단체들이 세를 규합하여 유럽민족운동연합을 창설하기 위해 부다페스트에 모였다. 의장은 프랑스인이 맡았다.
아직까지는 이런 데마고그(중요이슈에 대한 선전선동과 유언비어, 몰이해), 인종혐오 정당이 정권을 잡지는 못했지만 정권에 일부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동맹이나 네덜란드, 덴마크의 경우처럼 소수 내각을 지원하는 경우가 그렇다. 프랑스의 몇몇 집단도 인종혐오증을 보인다. 독일이나 영국의 우파권력은 이슬람의 위협을 상기하며 미래를 대비한다. 이런 추이가 이뤄진다면 장차 극우정당들이 유럽을 지배할 것이다.
현재의 포퓰리즘은 파시즘의 재출현도, 나치즘의 재등장도 아니다. 포퓰리즘의 역사적인 의미는 다른 데 있다. 포퓰리즘의 부상은 20세기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1차대전에서 시작해 베를린 장벽 붕괴로 마감한, 역사의 한 주기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흥망성쇠, 그리고 파시스트와 나치의 집권과 명멸을 보여준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오갔던 한 주기가 이제 끝났다. 물론 전체주의적인 습성은 남아있고, 우리는 여전히 ‘파시즘에 맞서 싸운다’거나 번식력이 강한 ‘추잡한 짐승’ (1차대전에서 나치즘, 인종차별, 극우파를 의미하는 표현)을 경멸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말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확고히 드러내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전쟁은 정말로 끝났고 새로운 포퓰리즘은 과거 유토피아주의의 부활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에 과거를 적용하지 말고 현실을 새롭게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포퓰리즘 담론
포퓰리즘 담론의 몇 가지 특징을 보자. 주요한 형식적 특징으로 데마고그를 활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다수의 관심사를 확인한 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해하기 쉽지만 적용은 불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은 때로 궤변이다. (프랑스 선동가들의 예를 들고 싶다) 그들은 부분적인 유사점을 모든 경우에 확대 적용한다. “나는 이웃의 아이보다 나의 아이를, 모르는 아이보다는 이웃의 아이를 더 좋아한다. 그러므로 외국인을 냉대하고 자국민을 우선시할 권리가 있다.” 이런 논법은 사랑과 정의를 혼동한 결과이다. 내 주변 사람을 더 사랑하니 정의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예도 있다. “인종은 대등하지 않다. 흑인이 육상경기에서 이기는 것을 보라.” 이 말에는 지능은 자신들이 더 높다는 말이 함축돼 있다! 이들은 모든 유색인종을 하나의 생물학적 범주로 묶고, 신체적 능력의 위계가 지성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실제로 이 둘의 상관관계는 증명된 바 없는데도 말이다.
또 포퓰리스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에는 터무니없는 비용이 든다. ‘제가 당선된다면 경찰력을 강화하고 감옥을 더 지을 것이며 전업주부에게 월급을 주겠습니다.’ 모두 엄청난 비용이 드는 정책이다. 그런데 세금을 줄이겠다는 약속도 한다. ‘당선되면 내수 상품과 경쟁하는 해외 상품 수입을 중단하겠습니다.’ 그랬다가는 다른 나라들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수입보다 수출을 더 많이 한다면? 선동가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비용이 든다는, 정치의 근본 원칙을 무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을 더 안전하게 지키는 동시에 더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강화하면 다른 하나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데마고기는 이름이 시사하는 바처럼 민주주의만큼이나 역사가 깊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현상은 대중매체의 발달, 특히 텔레비전 덕분에 현대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한다. 종이 신문도 모든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람들은 기사를 안읽거나 반대로 여러번 읽고 곱씹을 수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 뉴스는 빠르게 전파되므로 짧고 명료한 언어와 시선을 끌기 쉽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현대인들은 1분 이상 집중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는 잘못된 내용이 두루 퍼질 수 있다. 좌파든 우파든 중도든, 전달하려는 정치적 메시지가 무엇이든 간에,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메시지가 기억에 박힐 만한 선전 문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신중을 기할 가능성은 없다. 의사소통의 형식이 소통의 내용을 결정한다. 텔레비전은 선동적인 매체이고 텔레비전에서 하는 말 역시 그렇다. 이런 경향은 특히 극단적인 연설가들의 경우에 두드러진다. “실업자 300만 명, 이민자 300만 명.” 이민자를 추방한다고 해서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데마고그들은 결론을 낼 필요 없이 이를 시청자들에게 맡긴다. 또한 텔레비전은 논증보다 외적인 매력을 중시한다. (옮긴이 주: 미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간단하게는 한국의 TV토론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이의 이미지가 그가 말하는 내용을 차단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글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누가 목소리가 별로여서, 누가 방어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그의 내용을 곱씹어 보지 않는 경우) 연설가의 외모가 호의적이고 부드럽거나 발음이 좋은 경우, 사람들에게 웃음이나 감동을 주는 경우 유리하다. 카리스마가 없으면 인기가 금세 떨어진다.
포퓰리즘의 표현 방식도 데마고기이다. 내용은 몇 가지로 한정된다. 무엇보다 선동가들은 현실의 시공간에 사는 구체적인 개인에게 다가간다. 추상적 관념, 거리감, 장기적 관점을 피하고 구체적이고 가깝고 즉각적인 것을 추구한다. 이상적인 민주주의자는 루소가 일반의지 (이것은 인민들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가정한 개념이다)라 부른 것을 추구하지만 선동가는 광장집회에서 만난 사람, 텔레비전 시청자와 라디오 청취자와 같이 현재 접촉하는 집단에 직접 호소한다. 민주주의자는 다음 세대를 염려하기 때문에 인기 없는 가치를 주장하거나 희생을 권하기도 하지만 선동가는 덧없기 그지없는 순간의 감정을 이용한다. 또한 민주주의자는 보편 이익을 내세워 소수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도입하지만, 선동가는 다수의 확실한 이익을 추구한다.
민주주의자는 법을 준수하고 찬반을 숙고하는 연구위원회와 검토위원회를 중시한다. 반면 선동가들은 거리낌 없이 의결 집회를 열어 그럴싸한 풍채로 언변을 과시하며 입에 발린 말로 지지를 얻어낸다. 1968-1969년에 좌파 포퓰리즘이 새로 설립된 벵센 대학을 휩쓸었다. 시끄럽고 연기가 자욱한 총회에서 거수로 모든 의사결정을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가장 극단적인 입장이 늘 승리했다. 하지만 콩도르세는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고찰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어느 시대나 진정한 계몽주의는 특별히 뛰어난 사람의 이성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사람들의 공통 이성을 따른다.” 이 말은 데마고그 웅변가와 마찬가지로 공동이성을 파괴하고 뛰어난 개인을 특별 대우하는 신자유주의의 위험을 떠올리게 한다. 선동가들은 식견을 갖춘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묻기보다 군중의 즉각적인 지지를 추구한다.
선동가들은 훌륭한 말과 숭고한 이상은 다른 이들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개인들의 일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외국인 같은 외부인의 비극은 관심 밖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 실행돼야 한다. 그래서 선동가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는 개혁가라기 보다 보수주의자이다. 그들은 자유를 희생해서 얻은 질서를 중시한다. 포퓰리스트는 늘 자기 공간, 습성, 정체성을 보호할 수 있는 반면에 일반시민은 자유를 누릴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포퓰리스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공포를 체계적으로 이용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교육을 많이 못 받고 외국에 대해 잘 모르고 유럽과 세계화에 반대하는 지지자들을 다수 모집한다. 그들이 주로 노리는 대중은 가난한 계층이 아니라, 소외 계층과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계층이다.
포퓰리스트는 스스로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포퓰리스트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다. 전통적인 좌파정당은 우파정당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전혀 끌어들이지 못하는 높은 곳에 고립돼 있다. 포퓰리즘은 경멸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엘리트주의에 반대한다. 포퓰리즘의 엘리트 거부는 재능있는 엘리트들의 교육을 장려하는 민주주의 전통과 철저히 상반된다. 포퓰리즘은 대개 정치의 주변부에 있는 다른 세력과 결탁한다. 그 세력은 극좌파가 될 수도 있으나 오늘날에는 대개 극우파다. 포퓰리즘 운동의 주동자들이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를 호의적으로 여기는 이유는, 이런 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이 중앙의 통제와 민주주의 합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중도에 대한 과격파의 대반격이다. 인터넷에서의 개인적인 말과 행동은 대중 담론에 요구되는 수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프랑스 네티즌들은 가장 열심히 정치사이트에 방문한다.
과격주의 운동은 한 나라의 공공의 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책임자를 식별하여 그를 범죄자로 지목한다. 온건한 정당들은 한 사회 내부의 이익이 다원성과 불일치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래서 힘보다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때 반대파는 적이 아니다. 그들은 반대파와 전쟁을 벌이지 않고 공존한다. 그러나 급진 좌파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죄인을 정의하는데, 그들은 바로 부자, 자본가, 부르주아다. 사회를 치유하려면 적을 무찌르고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아니면 적들을 없애버려야 한다. (공산주의 독재가 이를 실행했다) 극우파들은 더 이상 반공주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신체적 차이에 근거한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로 정의되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는 최근 역사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반공주의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의 극우파는 인종혐오와 민족주의를 단호하게 주장한다. 모든 문제는 외국인들 탓이다. 그들을 몰아내자. 극우파가 일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어휘를 몇 가지 차용하긴 하지만 ETA바스크(바스크 조국과 자유,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약 200만명의 바스크민족 독립추구 단체) 같은 운동은 본래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정치적으로는 극우파와 유사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포퓰리즘 담론의 폐해 중 일부일 뿐이다. 포퓰리즘 때문에 평등원칙과 모순되게도 일부 집단이 소외되고, 외부의 낮선 존재로 낙인찍혔다. 그들은 행정문서상으로는 외부인이고 문화상으로는 외국인으로 인식된다. 이들은 외국인의 후손일 수도 있고, 기독교 전통이 있는 국가에서 이슬람 예식을 행하는 등 유달리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