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김종인, 안철수-이헌재, 문재인-윤여준의 차이 [늙은도령님 글]
문재인 캠프에서 윤여준을 영입한 것 때문에 여러 가지 얘기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의 뿌리가 안기부에서 출발해 이명박 정권까지 이어진 한나라당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박근혜-김종인에서 출발해, 안철수-이헌재를 거쳐 문재인-윤여준에 이르는 부적절한 조합이 완성됐다.
얼핏 봐도 이 세 개의 조합은 형용모순이 가득하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조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 개의 조합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과정이 조금씩 다르다.
첫 번째 박근혜-김종인 조합은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에 집착하는 박근혜 후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인 김종인은 박정희 시절에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1987년 헌법 개정 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삽입시킨 당사자다.
하지만 할아버지와는 달리 만주국 출신의 박정희 정권에서 일을 했고 노태우 시절에는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대표적인 경제 관료이자 보수 인사로 박정희와 군사정권의 향수가 강해 박근혜 후보와는 충돌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이 조합은 얼핏 보면 형용모순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의 통치를 위해 전 국민적 차원의 복지를 처음 도입한 비스마르크처럼, 독재자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노리는(또는 노렸던) 박근혜 후보의 입장에서는 최적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조합에서 엄청난 것을 기대할 것도, 진실된 의미의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도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
박근혜-김종인 조합은 위로부터의 경제민주화에 가장 적합한 조합이기 때문에 99%(파레토의 법칙에 따라 최대한 양보하면 80%)에 속하는 사람들이면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다.
두 번째, 안철수-이헌재 조합도 분명 형용모순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헌데 이 조합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가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가장 구조조정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이헌재 전 부총리라고 말한 금태섭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안철수 후보는 어떤 것은 좌파의 가치를 따르고, 어떤 것은 우파의 가치를 따르는 이중이념자, 즉 중도 성향의 후보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제적인 성향으로 한정하면 안철수 후보는 분명 합리적 보수주의자이다.
그가 각 분야의 성공 사례들을 찾아다니며 혁신 경제를 강조하는 것을 볼 때, 김종인 후보와 마찬가지로 슘페터의 경제학을 추종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경제학의 이단아로 불리는 슘페터는 시장 내부에서 일어나는 혁신을 통한 ‘창조적 파괴’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는 경제학을 제시하면서, 오너(자본가)보다는 전문경영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게다가 그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자연적으로 사회주의로 넘어간다고 주장했으니 안철수 후보의 지향점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창조적 파괴’라는 것이 기업 현장에서 각광을 받으며 전문경영인에게 힘을 실어주었지만, 신자유주의가 득세를 하면서 전문경영인마저 오너 못지않은 부와 주식을 챙기고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주주 자본주의적 성향에 함몰되면서 그의 경제학은 시대의 이면으로 사라졌다.
성공한 기업인인 안철수 후보처럼 자신이 일군 사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겨주고 뒤늦게 경영학 공부에 뛰어든 사람에게는 여전히 슘페터의 이론이 유효하며, 특히 혁신경제를 가로막는 재벌체제를 깨는 데는 이헌재 전 부총리만한 경험자가 없다는 것이 영입 이유의 핵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제는 좌파적 성향이 강한 제도주의 경제학자(라이너트와 장하준 교수가 대표적이다)들의 지적처럼, 재벌체제라는 것이 자유 무역 하에서 국가의 이익을 지키는데 매우 효율적인 체제이며, 내수기업의 행태와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에 반대하는 안철수-이헌재의 만남이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조합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의 거대 투기 및 금융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자유주의 세력들이 공격목표가 재벌체제이고, 안철수 후보가 지향하는 혁신 경제라는 것이 재벌체제의 해체나 완화에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교집합이 형성된 것인데, 경제사와 현장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조합이다.
안철수-이헌재 조합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또 있다.
재벌개혁론자들(김종인과 민주통합당 내의 좌파 신자유주의자)은 다국적기업의 효시인 록펠러 그룹처럼 지주회사 체제의 재벌은 슬며시 빼버린다는 것이다.
현대의 경제체제에서 지주회사와 순환출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금산분리도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투명성을 전제로 일정 부분 완화되는 추세이며,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경제 위기를 일으키거나 서민들의 지갑을 털어간 금융업체들이 재벌 소유의 금융사들이 아니라 대부분 대형 민간은행과 저축은행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재벌 소유의 금융회사가 문제가 된 적은 김대중 정권 시절의 카드대란인데, 이것도 IMF가 요구한 신자유주의 처방인 대규모 구조조정 때문에 국내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져들자 내수 활성화를 위해 이헌재 부총리가 중심이 돼 진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처방(부채의 경제학)에서 나왔다.
따라서 둘 간의 시너지 효과가 순방향에서 일어나면 문제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역방향으로 가기 시작하면 한국 경제를 외국의 투기 자본과 다국적기업의 수중으로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중국과 인도, 베트남, 방글라데시,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터키, 파키스탄처럼 저임금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고 환경규제에서 탈피하는 등 모든 생산을 아웃소싱으로 돌리고 본사는 마케팅이나 핵심 부분에만 치중하는 신자유주의적 기업들이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내수산업과 함께 대규모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재벌체제의 해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달콤한 결과만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사실 삶의 질을 빈곤선 이하로 떨어뜨리는 부의 불평등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주로 내수경제에서 그 원인 발생함을 알 수 있다.
비정규직의 대부분이 대형마트나 SSM, 프랜차이즈, 용역업체, 건설업체, 학원이나 미용실, 병원, 방문판매원, 교환원, 다단계업체 같은 서비스업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히 입증된다.
물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이 ‘내가 부자가 되지 못한다면 다 같이 못 살자’라는 것에 국민의 뜻이 모인다면 최상의 조합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문재인-윤여준 조합인데, 사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선거 전략통이자 책사’에 가까운 사람이며 합리적 보수주의자에 속하지 신자유주의자는 아니다.
윤여준이 안철수 후보의 멘토로 회자됐던 것도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써의 두 사람의 지향점이 비슷했기 때문이며, 두 사람 다 이명박 정부에서 일정 기간 일했고 매우 실망했다는 점에서도 일치점이 분명하다.
‘친노’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로 대표되는 문재인 후보가 이른바 가치 공동체로써의 노무현 정권의 2인자였고, 아직도 그 운명에 갇혀 있다면 이중이념자, 즉 중도적 성향의 인재 중에서도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인물을 영입하는 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또한 그 인물이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데 도움된다면 짧게 봐서 일석이조의 묘책이라 할 수도 있다.
김종인과 이헌재에 비하면 윤여준이란 인물의 무게감도 캠프 전체의 색깔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음도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번 결정이 민주통합당 경선을 참여 정부 실패론과 친노 프레임으로 덧칠한 매스 미디어의 융단폭격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용광로 선대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보수 성향을 띠고 있는 민주통합당 인사들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면 악수라 할 수 있다.
정체성이란 타자가 강요하는 경우(이를 테면 사뮤엘 헌팅턴처럼 이슬람 종교와 무슬림, 중국과 아시아적 가치를 미국의 적으로 특정 짓는 것)에는 차별과 폭력의 근거가 되지만, 자신의 추구할 가치를 견지하고 실현하기 위해 타자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때는 조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김종인과 이헌재는 철저한 기득권자들이고 그들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상위 0.1%에 속해 있는데 비해, 윤여준은 안철수 현상이 만들어낸 또 다른 수혜자라는 것을 빼면 그 영향력이 제한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상의 것들을 종합하고 대선에 승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라면 확장성이 부족한 박근혜-김종인 조합은 하(下)이고, 성향이 비슷한 안철수-이헌재 조합은 하(下)이면서도 상(上)이고, 문재인-윤여준 조합은 윤여준의 활용도에 따라 중(中)이 될 수도 상(上)이라 할 수 있다.
판단은 구체적 정책에서 나올 것이며, 지지자의 성향에 따라 선택은 다를 것이기 때문에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가 한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