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가
나의 테러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이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등은 북한에게 테러의 누명을 씌우는 조작국가"가 되는 것이다
내가 한게 아니라고하면 나는 무죄가 되겠지만 북한은 누명 쓴 나라가되고 한국은 병신이 되고 미국이 북한을 테러국가로 정한 몇십년이 없어진다.. 좌파정권이 자기한테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그렇게하면 그들한테 지는거기때문에........정권이 바뀌면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폭파범이 왜케 나대냐는 분도 계시겠지만요
기자: 결혼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가 '김현희 가짜 만들기' 때문에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좌파 단체뿐 아니라 유족까지 (당신이) 가짜라고 주장했는데요.
"너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결혼 직전에 유가족 분들 뵙고 서로 울며 인사까지 나눴는데, 정권 바뀌고 나서 일부 유가족 분들이 그렇게 나오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좌파 단체가 'KAL 858 대책위' 라고 만들면서 일부 유가족 분들을 회유해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책위' 라고 만들었는데 유가족 분들을 빼낸 명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명목을 위해 유가족을 방패로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했다고 봅니다. 이런 배후 세력들은 유가족뿐 아니라 돌아가신 희생자의 영혼가지 이용하는 질이 나쁜 이들입니다."
*내게 "자동차 바퀴는 네모" 라고 말하게 하려는 사람들
기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후 벌어진 일들을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차분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별난 일이 많았어요. 조작설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MBC 취재진이 아파트까지 들이닥치는 일이 벌어졌죠. 국정원에선 대놓고 MBC에 출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지휘부'가 (MBC에) 총력지원하라고 했으니 무조건 방송에 나가라는 거에요. 계속 거부하니까 직접 못 만나겠으면 전화인터뷰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인터뷰 해 주면 집 공개는 안 하겠다' 는 MBC 기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담당관까지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화가 나서 '담당관이란 사람이 그 소리 듣고도 가만히 있었느냐. 국정원이 MBC에 집 주소를 알려준 것 맞구나' 라고 했더니 아무 말도 못하더군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휴대전화와 집전화를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자: 2003년 11월 MBC 취재진이 집에 온 날 상황은 어땠나요.
"남편이 경기도 모처에서 국정원 직원들과 MBC 출연 문제로 만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출연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고 국정원 내부 설명회에만 참석하기로 합의를 봤답니다. 남편이 그러는 사이 저와 아이들밖에 없는 집에 취재진이 '습격' 을 한 겁니다. 국정원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MBC가 어떻게 알고 남편도 없는 정확한 시점에 집까지 찾아왔겠습니까."
기자: '김현희의 편지' 를 단독 보도한 <월간조선> 2008년 12월 호의 제목이 "나는 법원의 3심, 국정원의 4심을 거쳐, 진실화해위에서 5심을 당하고 있다" 였는데요.
"국정원 과거사위의 경우 고영구 국정원장이 처음엔 안 만든다고 하다가 결국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집요하게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건 조사를 위한 조사가 아닙니다. 이른바 '의혹' 은 구실일 뿐이었고요. 국정원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짜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저는 자동차 바퀴가 동그랗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제 입에서 (자동차 바퀴가) 네모란 말이 나올 때까지 흔들어대려 했어요. 그들은 제게 절대로 '바퀴가 네모라 말해' 라고는 하지 않죠. 스스로 말하게끔 괴롭히는 게 그들의 공작입니다. 끈질기게 (저에게) 찾아온 수사관들 중에는 폭파사건 당시 저를 직접 조사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자기가 파해쳐낸 진실을 스스로 뒤엎으려 하는 게 놀랐습니다."
기자: 국정원 직원들이 어떻게 설득하려 했습니까.
"회유, 설득, 위협, 협박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남편의 친구, 친척까지 동원해서 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쉽게 살지 왜 그렇게 사느냐' 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나중엔 (저희) 가족을 죽인다는 소리까지 나오더군요. 아이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시커먼 사람들' 이 집 앞에 와서 문 열라고 소리칠 때마다 종일 바깥으로 못 나갔죠. 외출 중 마주친 남자들과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봐서 (아이들은) 한동안 양복 입은 사람만 봐도 '나쁜 사람' 이라며 기겁하고 울 정도였습니다."
*아이들, 유치원도 못 보내
기자: 25년 전 사건 땐 혼자였지만, '김현희 가짜 만들기' 몰이 때는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했는데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최악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배신감과 비참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등에 칼을 꽃힌 심정이 그런 거였을 겁니다. 나중엔 이민 가라는 얘기까지 나오더군요. 처음엔 2년만 이민 가 있으라고 하다가 안 되니까 1년만 가라는 식으로 기간을 줄이면서요. 그 난리통에 아이들 유치원도 못 보냈습니다. 요즘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나는 왜 유치원 못 갔어' 라고 묻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녁에 애들 자는 모습 보면 부모 잘못 만나 이렇게 고생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납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어머니였다. 격앙되어 피를 토하듯 말을 쏟아내던 그녀였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는 다시 눈물을 보였다. 오늘 인터뷰 중 몇 번째인가? 우리는 또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채 창밖으로 내리는 가을비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기자: 이민 가라는 얘기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제가 마음을 잘못 먹든가, 멀리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게 바로 그들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죠. 한국에서 '증거' 가 눈 뜨고 버티니 노골적으로 조작을 못 했지만, 만약 그때 이민 갔다면 그들 마음대로 이 사건을 뒤흔들었을 겁니다. '가짜라서 도망갔다' 고 하고 귀국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외국으로 나갔다가 청부살인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어도 죽겠다는 각오로 목숨 내놓고 한국에서 버텨야 했습니다."
기자: 이민 가라는 얘기는 직접 들었습니까.
"국정원 측은 저를 만나기 전에 먼저 남편에게 접촉합니다. 남편에게 두 번에 걸쳐 이민을 가라고 얘기했다고 해요. '가짜 만들기' 내사 결과도 보면, (이민 가라고 한) 직원 이름도 다르게 나오더군요."
(중간 생략)
기자: '가짜 만들기' 당시 노무현 정권의 의도가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KAL기 사건 때문에 북한이 테러지원국이 됐으니 이를 뒤집어 정상회담도 추진하고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이는 이적행위에요. 안보의 최전선에 서있는 정부기관이 이적행위를 하는 일은 세계 정보사에 남을 일입니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일, 아니 이미 된 일입니다. 그걸 아직도 반성 안 하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 사람으로 25년을 살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25년을 살았습니다. 소회가 어떻습니까.
"25년 살면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됐습니다. 그걸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할 일이 아직 남은 것 같습니다. 요즘 TV조선에 출연하는 이유도 이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제가 '진짜' 라는 것, 북한이 무엇을 했다는 것, 일부 남한 조직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사건을 뒤집으려고 했다는 것. 작은 외침이지만 조금이나마 안보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기사 <사건 25주기 맞는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