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유신 두목 딸을 지지했냐고?
진보야,
거지같은 NL-PD 싸움 좀 그만해!"
대표적인 이른바 [진보] 추종 성향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의 21일자 톱 기사에 실린 말이다.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6626
일갈의 주인공은 박상증(83)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대표.
보통 그를 박상증 목사라고 부른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부라는 박 목사는 1999년부터 2012년까지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덕분에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씨 등에 대해서도 잘 안다.
盧정권 시절 [아름다운 재단]을 지원했던 '대기업'도 잘 안다고 한다.
박 목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 차이 3.5% 내에 좌파 진영도 상당히 많았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어 [깡통진보], 특히 민주통합당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이젠 더 이상 민주화 투쟁 했다고 생색내지 마라"고 했다.
[깡통진보]와 민통당이 스스로 국민들의 존경심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민주화]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그 경력을 몽땅 써먹었다는 설명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인 것이다.
이어 소개한 2006년 盧정권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 시절, 박 목사는 대통령 통일자문위원으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기념식 송별만찬]에서 [서울에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박 목사에 따르면, 그는 [조총련 대남공작 보스]였다고 한다.
그를 만나 잘못 했다가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서 17년씩 갇혀 지낸 사람도 있을 정도의 [거물]이, 버젓이 盧정부의 초청을 받고선 우리나라 수도를 걸어다니고 있더라는 것이다.
박 목사는 이 일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오마이뉴스>가 보도했다.
"그때 생각했어."
'아 이건 문제 있다. 북한에 우리 문을 완전히 다 개방해버리는 건 문제다.'
"나는 노무현의 사람들이 안보문제에 무식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저지른,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오마이뉴스>라는 평소 매체 성격을 감안할 때, 인터뷰에서 박 목사가 풀어놓은 이런 내용을, <오마이뉴스>가 과감하게 그대로, 그것도 톱기사로 보도했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박 목사가 [깡통진보]들에게 이렇게 일침을 날린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중도좌파]로 규정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8대 대선에서 박 목사는 등에 출연, [깡통진보]들을 향해 강한 비판을 퍼부으며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말을 들은 [깡통진보] 진영에서는, 그가 "변절했다"며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박 목사는 전향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칭 [진보]라 우기는 [깡통진보]를 걸러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어 보인다.
<뉴데일리>는 <오마이뉴스>의 생각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인터뷰에는 국민 모두가 다함께 진진하게 곰씹어 보아야 할 내용들이 많다고 판단, 아래에 다음과 같이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기사 내용 전문을 소개한다.
"진보다 중도다 했던 사람들, 적지 않게 박근혜 찍어"
"내가 <조선일보> 유도심문에 걸려서 고만 박근혜 지지한다고 얘기해버렸는데, 잘했다 싶은 대목이 있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신학자들이 꽤 많더라. 내가 놀랄 정도야. 나보다 박근혜를 더 반대했을 법한 사람들이 전부 박근혜 찍었대. 그러니까 그 3.5% 중에는 적지 않은 수가 진보다, 중도다, 했던 사람들인 거야. 많이 옮겨간 거지. 민주당 놈들이 이걸 알기나 할까? 나 참."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한 박상증(83) 목사는 진보진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격한 언어로 표출했다. 최근 보수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진보에서 보수로 전향했다며 온갖 비난을 받았지만 그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배경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박 목사는 매우 아프게 진보를 질타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데, 왜 민주당과 진보는 그 옛날 흘러간 '민주화운동 타령'이나 하고 있느냐고 노발대발 했다. 흘러간 '민주화운동 타령'으로는 잃어버린 국민의 존경을 되찾을 수 없다고 강하게 꾸짖었다.
팔순을 넘긴 노인이지만 매우 강단 있는 어조로 1960년대 유럽에서 반독재민주화운동을 벌이던 때를 회고했고, 당시 얼마나 치열하게 '반유신운동'을 했는지 열변을 토했다. 해외에서 반정부운동을 거세게 벌이고 1990년 귀국한 뒤로 참여연대 등 진보적 시민단체에서 활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죽비를 내려쳐서라도 깨우치지 않으면 '진보가 죽는다'고 판단한 탓일까? 박 목사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시민운동에 무슨 정당 지분이 있냐? 참여연대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이태호(사무처장)가 너무 외롭게 보이더라? 고참들 다 정당으로 떠나고 혼자 있는 게 참 외로워 보여. 그래서 내가 물었지. 너는 언제 가냐? 이제 보수파가 참여연대 점령하겠다?
이건 안 돼. 어디서는, 누군가는 브레이크를 걸어야겠다 싶어서 내가 막 떠들기 시작한 거야. 이 늙은이가 건방지게 뭘 하겠어. 그러나 나는 참여연대 개조론을 떠들고 싶었어.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아니? 저 영감, 박근혜 찍더니 돌았나? 허허허."
20일 오전 국회에선 낙마한 김용준 총리 후보에 이어 정홍원 총리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한창이었다. 같은 시각, 박 목사와 나는 그의 서울 녹번동 자택에서 보도전문채널 <연합뉴스 Y>를 거실에 틀어놓고, 주방에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그는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커피를 내려놓고 냉동실에서 얼은 곶감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주었다. 긴 세월 고 이선애 목사의 병수발을 들며 '순애보'를 써내려가 젊은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로맨티스트의 황제'로도 불린 박상증 목사.
묻고 따지지 않고 그의 격정적 토로를 들었다. 반문할 게 없지 않았지만 토달지 않았다. 총선과 대선 양대 선거에서 모두 패배한 민주진보진영이 새겨들을 만한 가슴 속 깊은 울림이 있어서 가급적 질문은 삼간 채 받아 치기 바빴다.
박 목사의 육성을 그대로 살려 옮기려고 노력했음을 밝혀둔다.
[이야기 하나] "내 눈에 비친 안철수란 사람은...."
서울 가회동 아름다운 재단 사무실에 막 물이 샜어. 그런데 이게 전세니까 누구도 고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도 밤낮 이사 다니지 말고 좀 무리를 해서라도 조그마한 오막살이라도 집을 짓자.
내가 이대공(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이를 건축위원장을 시켰지. 왜 시켰겠어? 돈 좀 내라고. (웃음) 그런데 2~3년씩이나 하면서 한 푼도 안 내. 안철수도 마찬가지야. 내가 막판에 돈이 안 모여서 이사들 다 1천만 원씩 내라 그랬어. 이중에서 1천만 원 내고 당장 생활곤란 겪을 사람 나밖에 없지 않냐 말이야. 그랬는데도 안철수는 안 내더라, 끝내 안철수만 안 냈는데 정말 화 나더라고. 젊은 놈이 무에 그리 잘났다고.
그러더니 아름다운 재단 벤치마킹 다 해가지고 나중에 자기 이름 붙여 안철수재단을 만드는데 윤정숙 상임이사를 데려가? 그럼 최소한도 이사장이랑 상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사람 인격이 완전히 장돌뱅이구나 했지.
시민운동 동네에서 그렇게 해가지고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뭐 정치지도자가 돼?
내가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을 10년 했지만 개인적으로 어느 이사와는 밥 먹고 또 어느 이사와는 밥도 안 먹고 그러질 않았어요. 이사회를 열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얘기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관리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재밌는 것은 안철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젊은 간사들은 그가 아름다운재단 이사가 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극도의 흥분상태가 되더라.
사실 나는 안철수라는 사람이 아름다운재단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돕는 자세를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지. 안철수란 사람을 데려온 건 박원순인데, 박원순은 늘 사람 괜찮으면 전부 자기 같은 줄 알아. (웃음) 박원순은 포스코 사외이사 하면서 받은 돈 전부를 기부했어. 안철수가 그 돈 다 기부했다는 얘기 난 못 들었다.
안철수는 뭐랄까. 내가 한참 선배 되지만, 그에게 다가가서 돈 좀 내라 이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인상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어. 젊은 사람이지만 뭐랄까 다가가기 어려운 그런 느낌을 받았지. 쉽게 말하면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야.
네가 제일이다, 이래야 접할 수 있는 사람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무리 안철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려고 노력해도 안 되던데? 안철수의 기본적인 세계관엔 비뚤어진 메시아주의가 있어. 내가 모든 걸 고쳐주겠다! 뭐 이런 메시아 사상이 있는 걸 사람들이 간파를 못하는 것 같아.
[이야기 둘] "노무현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2007년엔 나 투표 안 했어. 정동영이는 도무지 못 찍겠더라고. 이명박도 모르겠고 그래서 투표 안 했지. 2002년? 그땐 노무현 찍었지. 이회창은 아니잖아. 그러나 그가 대통령 된 뒤에 내가 얼마나 노무현 비판을 많이 했어. 1997년에야 당연히 김대중 찍었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예전에 지지했던 그 민주당은 이젠 없어졌더라. 예전의 민주당엔 인물이 꽤 있었어. 소위 고전적 의미의 인텔리겐차. 군사독재에 반대했던 자유주의자들. 보수성향에 맞서 열린 사상을 갖고 민주주의를 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들이라고 생각했어. 군사독재와 유신체제와 대조하면서 마음으로 늘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민주당을 이젠 완전히 노무현 사람들이 잡았잖아. 민주당의 정체성은 이제 친노야. 그럼 노무현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좀 길어. 들어볼래? 내가 1970년대 초부터 해외에서 민주화운동 소위 반정부운동을 했다고. 그 시절 동경에 <동아일보> 특파원이 넷 있었는데 그 중 셋은 중앙정보부야.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그때 소위 북한의 대남공작에 걸린 친구들이 있었어. 친북파라고 하지.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은 정말 대단했다. 어느 정도냐. 내가 제네바에 10년 살았는데 타블로이드 신문이 둘 있었어. 그 두 신문에 매일 1년 이상 두 페이지씩 고려연방제와 김일성은 위대한 리더다, 광고를 내. 이거 대단한 거라고.
1974년 북한이 UN가입을 계속 거부하다가 세계보건기구에 가입하겠다 했어. 대한민국은 당시 난리났었지. 저거 막아라 했는데 결국 만장일치로 결의됐어. 제네바 호숫가에 요란하게 큰 집을 사가지고 제네바 대표부를 설치했지. 그때 우린 뭐 저 어디 싸구려 동네 구석에 대한민국 영사관 있을 때인데 북한이 그때 그렇게 대단했다고.
그런데 이때부터 민주화운동 같이 했던 사람들이 갈라지는 거야. 통일부터 하자, 이른바 선통일 주장론이 나오고 북한에 왔다갔다 하면서 대접받는 놈들이 생긴 거야. 그러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이 둘로 쪼개져 깨졌지.
그때 민주화운동 세력이 갈라지면서 송두율이가 북한에도 가게 된 거야. 송두율이 꽤 똑똑한 친구야. 그러니 개중 일찍 박사를 했지. 1973년인가 1974년인가 독일 유학생들이 당시 수도였던 본에 모였어. 그걸 주도한 게 이삼열(숭실대 교수)이야. 3.1절 날 우리가 한 200명 모였지. 그때 나도 제네바에서 본으로 갔었어. 우리가 만든 조직이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1974년 결성)'야. 우린 그냥 '민건' 이렇게 불렀지. 뭐긴 뭐야? 반정부 민주화운동 조직이지.
다 학생들인데 그때 박사학위 끝낸 송두율이가 남보다 좀 여유도 있고 자유로우니까 학생회장을 맡았어요. 박사 땄으니 독일에서 직장도 구할 수 있고 딴 놈들보다는 여유가 있잖아. 그때 평양에서 송을 모셔가고 난리친 거라고.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졸렬한 게 있다. 뭐냐, 저 새끼 갔다왔어? 왜 지가 가? 뭔데? 뭐 이런 정서가 있었던 거지.
결국 그렇게 우리끼리 다투다가 독일에서 결성된 반정부 민주화운동 조직이 깨졌지. 그 다음 동경에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 생겨요. 나중에 명칭은 한민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바뀌지. 1977년에 미국과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동경에 모여서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을 결성해. 그런데 이 조직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 그러면서 1978년 반국가단체로 지목됐고 이 사람들은 한국에 오지도 못했어.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야 일시 귀국이 허가될 정도였으니까 꽤 오랜 기간 한국에 못 왔지.
여하간 그렇게 친북파와 중정 사이에서 우리처럼 기독교를 기반으로 조국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낀 거야.
내가 왜 이 긴 얘기를 하느냐. 바로 노무현이가 뭘 잘못했냐 그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2006년 정동영이가 통일부 장관을 할 때 내가 대통령 통일자문위원이었거든. 그때 통일은 다 됐다고 막 풍선을 띄웠어요. 그때 이북에서 150명 왔어. 6.15 공동선언 기념한다면서 이쪽에서 요란하게 접대했지.
그때 일산 킨텍스에서 송별 만찬을 하는데 복도에서 누군가 "박 선생 나 왔소?" 해. 나는 그 목소리를 알지. 내가 저 사람을 서울에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그가 어떻게 왔지? 그가 누구냐. 조총련 대남공작 보스. 1984년부터 북한기독교도연맹 사람들이 해외로 나오기 시작하거든. 그때부터 그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초청으로 2년에 한번씩 나와 만났던 사람이야. 무슨 자격으로 나왔냐고? 조총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나왔던 사람이야.
그 사람한테 잘못 걸려서 사형 당하고 감옥에 17년씩 갇혀 지낸 사람도 있다는 걸 내가 뻔히 아는데, 저 사람은 절대로 서울에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그가 왔더라고. 바로 노무현정부 때 북한에 우리 문호를 다 개방해버린 거야.
그때 생각했어, 아 이건 문제 있다. 북한에 우리 문을 완전히 다 개방해버리는 건 문제다. 나는 노무현의 사람들이 안보문제에 무식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저지른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우린 분단국가야. 그렇게 다 열어버리면 이건 곤란하다 이거야. 난 노무현이가 제일 잘못한 게 그거라고 생각해.
[이야기 셋] "왜 박근혜를 지지했냐고?"
박근혜는 유신 두목 딸이지. 그렇다고 두목의 죄를 딸이 다 짊어져야 한다? 그게 연좌제지 뭐야? 민주사회에서 그런 연좌제는 옳은 태도가 아닌 것 같아. 왜 박근혜한테 박정희의 모든 짐을 지우려고 해? 그런 태도는 나쁜 거야. 민주적이지 않아.
새누리당이 싫으면 새누리당이 싫다 이러면 되지. 박정희의 모든 과오를 왜 박근혜에게 뒤집어씌우느냐 이거야. 그건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거야.
그런데 내가 곰곰이 생각했지. 박근혜가 국민통합을 얘기하네? 게다가 당도 과감히 바꿔. 반면 민주당은 두루뭉술 도대체 뭘 하고 앉았는지 알 수가 없어. 내가 왜 노무현의 꼬붕을 지지하냐?
민주당의 정체성이 뭐냐? 난 친노세력이라고 봐. 민주당이 도통 새로워지지 않으니 나는 박근혜를 찍겠다 했더니 날더러 전향했다고 난리야. 그런데 난 전향 안 했어. 나는 시종일관 중도좌파야. 평생토록 암말 않고 투표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내가 떠들어야겠다, 작정한 까닭이 있어. 뭐냐고?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우리 교단 장로야. 황 대표가 다니는 교회 목사가 내 제자거든. 그 목사를 통해서 자꾸 만나자 그래. 그게 작년 10월초쯤이야.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내 제자 목사, 황우여 대표를 만나 점심 먹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 박근혜가 쓱 들어와.
깜짝 놀랐지. 도와달라고 그러더라고. 처음에는 내가 관심 있는 듯 얘기하다가 빨리 수습했지. 대선 앞두고 힘을 보태는 것은 곤란하다. 왜 그랬냐고? 가만 생각하니까 새누리당에 내가 아는 놈이 없어. 최소한도 의논할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하나도 없어.
그래서 이틀 후에 사람 시켜 취소 했어. 그랬더니 밤늦게 박근혜가 직접 전화했더라. 왜 도와준다고 했다가 안 하겠다고 하느냐고. 그래서 그랬어. 다음에 좋은 기회가 또 오기를 기대한다. 이해하리라고 생각하고 미안하다, 그랬지. 그걸론 끝이야.
(그 이후) 내가 <조선일보> 유도심문에 걸려서 고만 박근혜 지지한다고 얘기해버렸는데, 내가 그 얘기를 하길 잘했다 싶은 대목이 있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신학자들이 꽤 되더라. 내가 놀랄 정도로 박근혜 찍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더라는 거야. 박근혜를 나보다 더 반대했을 법한 사람들이 박근혜 찍었대. 그러니까 그 3.5%(박근혜-문재인 후보가 얻은 득표율의 격차--편집자주) 중에는 적지 않은 수가 소위 우리가 진보다, 중도다 했던 사람들이 많이 옮겨간 거야. 민주당 놈들이 이걸 알까? 나 참.
박근혜가 제3공화국처럼 한다고?
글쎄. 내가 정부조직 개편안 같은 거 전문가도 아니고 잘 모르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 어떻게 제3공화국으로 돌아가겠니? 그건 말도 안 돼. 시비 걸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면 그건 말 안 돼. 그러나, 나조차도 박근혜가 어휴 이거 큰일났네, 유신시대로 돌아가네, 이러면 내가 한마디 해야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느낌은 없어.
[이야기 넷] "무너진 민주진보 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냐고?"
진보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민주화 투쟁했다는 자기 신념을 갖고 있는데 이제 그거 다 소모됐어. 잔고 다 뒤져봐야 땡전 한푼 없는 거 그만 들여다보고 이제는 노력해서 국민들에게 존경심을 얻어야 돼. 나 민주화운동 했다, 그런데 뭐? 이런 시대야. 그러니 자기들의 노력으로 국민적 존경을 쟁취할 생각을 해야 돼. 이제 그놈의 민주화투쟁 경력 다 써먹을 만큼 써먹었어. 이제 제발 민주화 투쟁을 했네 생색내지 마.
그리고 제발 그 '거지 같은 NL-PD 싸움 좀 관둬.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그런 훌륭한 조직도 그 놈의 NL-PD 싸움으로 완전히 망쳐놨어. 그거 내가 복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가 보수는 잘 몰라. 내가 놀았던 물이 늘 진보였지. 그런데 진보를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 내가 같이 살아왔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신차려라, 신랄한 비판을 해야하겠다, 관성적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야.
민주당 뭘 혁신했니? 새누리당이 더 개혁적 아니니? 진보라는 사람들이 그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려고 말이지, 에이 진짜. 거기서 무슨 혁신이라는 게 나와? 실현 가능성도 없는 보편적 복지나 떠들고 앉았고.
시민운동에 무슨 정당 지분이 있냐? 참여연대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이태호(사무처장)가 너무 외롭게 보이더라? 고참들 다 정당으로 떠나고 혼자 있는 게 참 외로워보여. 그래서 내가 물었지. 너는 언제 가냐? 이제 보수파가 참여연대 점령하겠다?
이건 안 돼. 어디서는, 누군가는 브레이크를 걸어야겠다 싶어서 내가 막 떠들기 시작한 거야. 이 늙은이가 건방지게 뭘 하겠어. 그러나 나는 참여연대 개조론을 떠들고 싶었어.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아니? 저 영감, 박근혜 찍더니 돌았나? 허허허.
내가 안병직 교수(뉴라이트재단 이사장)랑 같이 국민통합시민운동 한다니까 날더러 전향했대. 허허. 나는 그런 거 안 해. 난 죽을 때까지 중도좌파야.
[이야기 다섯] "민주당엔 희망이 없다?"
무슨 소리야. 민주당이 잘돼야 이 나라 정치가 되는 거야. 새누리당이 독주한다고 절대로 잘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민주당이 좀더 자유주의 정당으로 갔으면 해. 이념적으로 경직되지 않은 중도좌파면 되는 거 아니야? 보수 제대로 하는 새누리당 있고, 민주당이 자유주의정당 노릇 제대로 해주면 민주주의 사회로서 남부럽지 않은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