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인원을 철수시키기로 한 박근혜 대통령의 결정을 두고
일부는 그것을 [강(强) 대 강(强)] 운운 하며 “이래서 되느냐?”는 투의 뉘앙스를 은근히 풍기곤 한다.
일부 기사(記事), TV 진행자, 출연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따져 보자. 개성공단 사태를 어떻게 [북 50%], [남 50%]의 똑같은 강(强)이 만든 것으로 포장하는가?
때린 자와 맞은 자의 차이를 몰라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각색하는 것인가?
북이 먼저 자기 측 인원을 철수시키고 우리 측의 회담제의를 묵살했기 때문에,
우리가 별 수 없이 철수하는 것 아닌가?
북이 저렇게 공장을 떠났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공장을 돌린단 말인가?
그리고 철수시키는 게 [강(强) 대 강(强)]이라 나쁘다면,
그럼 우리더러 달리 어떻게 하란 말인가?
텅 빈 공장 안에 무한정 죽치고 앉아 북이 제발 덕분에 돌아와 줍시사,
백일기도-천일기도라도 드리란 말인가?
우리에겐 지금 개성공단을 정상화시킬 별 뾰족한 대책이 없다.
그야 지난 날 한 때처럼,
달라는 대로 주고, 하자는 대로 하고, 밀면 밀려주고, 당기는 대로 당겨주면,
북이 저런 행패를 멈출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두 번 다시 안 된다.
그렇게 끌려가 주면, 끝이 없다.
아니, 끝이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끝이다.
이럴 수는 없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도발과 협상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인간 세상의 보편적 법도에 비추어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원칙 천명이다.
일부는 이런 당연을 일컬어 [강(强) 대 강(强)]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북은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대도
우리는 오직 유화(宥和) 일변도로만 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왜?
각자 나름의 그럴듯한 명분,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린 각자 나름의 바람과 의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원하고 추구해 왔다.
그러나 대화란 무엇인가? 공정거래다.
북은 일방주의적인 불공정 거래로 일관해 왔다.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란 식이었다.
그리고 북에 있어 도발과 대화는 반대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즉 같은 것이다.
같은 혁명전략, 전술이다.
그들의 대화란 그래서 전장(戰場)에서 취하려 하는 것을 탁상(卓上)에서 취하겠다는 의미의 대화, 바로 상대방의 투항을 받아내기까지의 꼼수의 과정인 것이다.
이래서 공산당과는 이런 그들의 전략전술을 잘 알고서 대면해야 한다.
힘의 우위에 기초해서 당당한 자세로 공정한 딜(deal)의 제안을 하고서
“이건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것이다, 합의 할래 안할래?” 하는 식으로 임해야 한다.
만약 그런 공정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그리고 일방적인 억지와 생떼와 궤변으로 끝내 뻗대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난 세월, 북의 버릇을 잘못 들였다.
그리고 우리 내부의 버릇도 잘못 들였다.
당당함을 포기한 채 만남을 연연히 간청하며,
북의 혁명전략-전술에 마냥 끌려가기만 해 주는 게 마치 [평화]인양,
그렇게 하는 것만이 마치 [민족적]이고 [통일지향]이고 [수구냉전이 아닌 것]인양,
사회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북의 행패에 대해 “너 왜 이러느냐?”고 피해자자로서 당연한 화만 내도,
[강경]이니 [강(强) 강(强)]이니, 무(無) 경우 한 소리들을 해댄다.
때린 자와 맞은 자를 50% 대 50%로 똑같이 간주하는 게 [평화]인가?
얻어맞아도 그저 헤헤헤 해줘야만 [평화]인가?
북이 행패를 부릴 때마다 의례 단골 메뉴처럼 튀나오는 상투적인 관용어(慣用語)가 있다.
[남북 영수회담] [특사파견] 같은 게 그것이다.
이런 걸 지금 국면의 北이 들을 계제도 아니지만,
“주먹 말고 말로 해라” 하는 그런 소리는 우리 대통령에게보다는,
김정은 집단에 해야 제격 아닐까?
출처: 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