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제: 우리 시대의 불행한 정신상황에 대하여

바투칸No1 작성일 13.05.07 01: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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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제: 우리 시대의 불행한 정신상황에 대하여

 

박명림(KPI 연구위원, 연세대학교 교수)

 

 

 

차례

- 사실과 의견

- 진실과 관용

- 정의의 이행 또는 이행적 정의

- 보편적 인간문제로서의 친일문제와 과거(사)문제

- 이 시대의 참된 영웅을 기다리며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전3권) 간행과, 정부의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보고서>(종합. 전25권) 발간을 계기로 친일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언제나 그렇듯 한국사회에서 친일문제는 가장 뜨거운 민족·반민족 논쟁 구도의 핵심의제인 동시에, 현금의 논의지형이 보여주듯 지극히 전도된 이념문제이기도 하다. 21세기에 아직도 지난 세기 식민주의 유산과 과거극복 문제를 놓고 이토록 갈등하는 선진국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우린 빠른 물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류보편의 과제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남긴 범죄와 잔재의 극복에 너무도 오래 소홀히 해왔다. 이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과 의견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사실의 우위’, 즉 사실에 대한 인정과 승복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가치이다. 성찰, 비판, 용서, 관용은 객관적 사실을 인정한 뒤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통찰처럼 세계사에서 전체주의-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포함한-가 남겨놓은 유산은 ‘사실’과 ‘의견’의 비중을 같게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다. 부정할 수 없는 엄정한 ‘사실’을 말할 때조차 우리는 ‘의견’으로 간주하려는 행태에 익숙해 있다. 그리곤 다른 ‘의견’으로 이를 반박하려 한다. 그 결과 ‘진실’보다는 ‘주장’이 앞선다. ‘사실’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덮기 위해선 ‘의견’으로서의 민족이나 애국이나 이념문제를 들이대면 된다. 그러면 공방은 즉각 ‘사실’ 차원이 아니라 ‘의견’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객관적 사실조차 크고 작은 여러 의견의 하나로 간주될 뿐이다.

 

 

 

지금의 우리 시대가 그러하다. 한국에서 식민주의와 분단, 이념대결의 역사는 ‘사실’과 ‘의견’의 비중을 서로 엇비슷하게 만들거나, 후자를 더 크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따라서 사실이 어떠하건 일단 ‘완강한 사실 부인’, ‘강력한 의견개진’, ‘거센 이념공격’을 통해 담론의 대결구도를 진실과 허위, 참회와 용서, 정의와 관용, 과거극복과 미래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단번에 뛰어넘는 좌 대 우, 진보 대 보수, 애국 대 매국의 전선으로 바꾸어버린다. 가치판단 이전에 사실 자체의 타당성과 진실성 여부를 직시하는 ‘독립사고’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이념과 진영에 따라 사실을 접근하는 이른바 ‘진영사고’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을 말하려는 세력들을 특정 이념진영이라거나 매국세력이라고 공격한다. 객관적 역사이해를 위해서는 사실의 범주들이 더 본질적임은 언급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2선으로 물러난 채 의견과 이념이 전면에 나와 논쟁을 주도한다. 도덕적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집단일수록 더욱 강력하게 가치판단적 이념공격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거극복의 문제는 어느 진영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민족과 이념과 애국의 고리에 포획된 민족문제나 이념문제가 아닌 인간문제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과 관용

 

 

 

과거극복의 문제가 이념문제나 민족문제를 넘어 인간문제인 이유는, 이념과 민족의 이름으로 그러한 악행이 미래에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 생명과 인권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인간적 가치의 존중이란 점에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보수정부와 진보정부가 따로 있어서도 안 된다. 인간 실존의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넘어 존재하며, 이것이 우리가 ‘진영사고’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극복문제가 보편적 인간문제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존재하고 지향해야 할 최소한의 기저가치인 한 인간과 생명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존중과 보호의 책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한 공동체가 존재하는 근본 이유로서 얼마나 인간과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금번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보고서>는 일체의 폭력이나 처벌, 재판이나 고소·고발 행위를 배제하고 최소한의 진실 드러내기와 사실복원을 시도하였던 바, 이 정도의 행위를 이념문제나 민족문제로 공격하고 매도해선 안 될 것이다. 이 진실 드러내기는 외려 대한민국 공동체의 인간에 대한 책임을 제고할 것이다. 때문에 선정기준, 행위지목, 협력정도, 명단공개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 신중해야 하며, 철저한 사실 확인과 검증, 사후 고려가 있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진실복원이 현재적 낙인찍기가 되어선 안 된다.

 

 

 

또한 지금의 의견공방, 정치대립, 이념논란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그 와중에 우리 사회가 정말로 중요한 핵심논점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금번 친일인사로 지목된 인물들 중 일부가 보여준 반인도적 반인간적 범죄행태가 너무도 심각하다는 점이다. 몇몇 유명 인사들 중심의 보도행태나, 그들을 둘러싼 정치공방으로 인해 정작 가장 중요한 이 문제가 간과된 것은 의견과 이념 공방이 얼마나 진실을 덮는 해악적 기능을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진상보고서>의 경우 25권, 약 2만 쪽에 실려 있는 일부 인사의 반인도적 범죄 가담과 협력의 정도, 범위, 지속성, 반복성, 골수성(骨髓性), 악랄성, 반(反)인도성, 철저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훗날의 동일한 범죄의 재연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또 오늘의 바른 교육을 위해 우리 시대의 반인간적 범죄 열전이자 행록인 그러한 행위들은 여러 형태의 교육자료로 요약, 정리, 출판, 배포되어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동 보고서들이 일체의 보복이나 처벌을 주장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나치가 종료되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에게 협력한 자들을 재판하고 처벌하지 않는다면 우린 과연 미래에 누구를, 어떤 범죄를 재판하고 처벌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두 세대가 지난 오늘의 한국에서 사법적 물리적 처벌과 징치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현시점에서 보복과 응징, 재판으로 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대신 진실을 드러내고, 참회와 관용을 교환하여, 미래를 향해 화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며 보다 현실적이다. 따라서 진실의 공개라는 최소한의 과거극복 노력에 대해서조차 우리가 정치적, 이념적 이유로 거부하고 저항한다면, 미래 세대의 교육은 물론 관용과 화해라는 공통의 가치는 시작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정의의 이행 또는 이행적 정의

 

 

 

노태우 정부 이래 지난 20 년간 단속적으로 진행된 과거청산 노력은 무엇보다 민주화에 따른 때늦은 사실복원과 자기반성·자기교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민주화는 이른바 ‘이행적 정의’, 또는 ‘정의의 이행’(transition of justice)을 통해 정의를 독점하며 저항세력을 탄압하던 지배집단이 민주화로 인해 외려 불의의 행사자로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는 변전의 과정이었다. 특별히 한국에서 민주화는 과거문제들이 미해결된 채 누적된 결과 독특하게도 정의의 이행 시점에서 3중의 과거극복, 곧 3중의 정의교정을 요구하였다. 건국과 분단과정에서 유산된 식민통치 협력문제, 한국전쟁에서 자행된 국가폭력과 살상문제, 그리고 독재시기의 인권유린 문제가 그것들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노태우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오면서 최근 것부터 옛날 것으로 ‘거꾸로 올라가는’ 과거청산과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노무현 시기 들어 식민협력문제를 극복하려하자 세 과제들이 3중으로 중첩되어 나타났고, 부분적 연속성을 갖고 있던 친일·국가폭력·독재 세력들이 연대하여 반대하는 접점이 형성되었다. 이 점이 노태우에서 김영삼, 노무현으로 오면서 더욱 강력한 저항이 가능했던 이유이며, 민족주의 정서가 매우 강한 한국에서 군부청산보다는 친일청산이 훨씬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강한 길항과 교착을 보이고 있는 연유이다.

 

 

 

이들 각각의 세력이 근대화나 국가수호,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친일협력의 문제가 사실이 아니라거나 불가피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최소한의 사실 확인과 인정 없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인식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독일문제와 일본문제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상이하게 전개된 과정에서 보듯, 과거악행의 극복 문제와 사후 기여의 문제는 동일선상에서 교환될 수 있는 ‘역사적 등가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의와 범죄를 구분하는 보편적 인간규범과 법률들은 존재하기 어렵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 역시 다만 하나의 교환재로 전락할 뿐이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치협력문제와 관련해 하이데거를 포함한 일부 지식인들이 “더 나쁜 사태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변명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태연한 ‘의견’에 반대하여 “도대체 나치 이상의 더 나쁜 사태란 무엇을 말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의견보다 사실이 중요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한 시대가 종결되는 역사적 이행의 국면에서 유혈과 보복이 없는, 보기 드문 이행과정을 보여주었다. 오랜 식민주의의 종식 이후, 한국전쟁의 종료 이후, 민주화 이후, 이 세 번에 걸친 ‘이행적 정의’의 시기에 한국민들은 과거청산을 둘러싼 정면충돌과 폭력적인 청산절차 없이 평화롭게 과거를 통과하였다. 즉 ‘정의’보다는 ‘관용’을 택하였던 것이다. 최소한의 친일파와 군사 쿠데타 주모자들을 제외하고는 법적으로 처벌받은 범죄자도, 가담자도 거의 없었다. 진보정부로 불린 김대중, 노무현 시기에조차 이 문제로 인하여 특정한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으며, 김영삼 시기에 처벌받은 두 군인 출신 대통령과 핵심 연루자들 일부가 있을 뿐이다. 과거문제에 관한 한 한국은 기본적으로 관용적인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용에 바탕 한 이러한 평화로운 통과 과정에서 정의와 진실은 묻혔고, 국민들을 포함해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반영될 수 없었다. 식민통치와 전쟁이라는 최고도의 반인도성과 폭력성, 잔인성을 고려할 때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정의를 인정한 토대 위의 자발적 관용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이념에 의한 강제적 침묵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진실 없는 관용, 사과 없는 공존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법적 물리적 처벌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최소 정의(正義)로서의 진실 드러내기와 최소 양심(良心)으로서의 사실인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보편적 인간문제로서의 친일문제와 과거(사)문제

 

 

 

그것은 국경을 넘는 범죄의 문제인 경우에도 동일하다. 보편은 경계를 넘어야 한다. 내부의 보편범죄를 규명하지 않고 외부의 그것에 대해 사과와 처벌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민족주의의 틀로 갇혀버린다. 우리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통합에 앞장서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적 보편의 주창에 앞서 한국이 먼저 내부적으로 보편적 가치를 확립하는 것은 선결요소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20세기 세계전쟁과 전체주의의 범죄는 민족에 대한 범죄인 동시에 인간들을 전쟁과 폭력과 살상으로 몰아넣은 반인간적 범죄였다. 유태인 학살이 민족문제를 넘어 인간에 대한 범죄였듯, 나치에 대한 협력의 문제 역시 보편적인 전쟁범죄이며 동시에 반인도적 범죄였다. 이제 전 아시아적 차원에서 반인도적 범죄 청산과 극복의 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곧 동아시아 화해와 협력, 공동체 건설의 정신적 토대가 될 것이다. 학살, 징용, 징병, 위안부, 강제노역, 야스쿠니 참배, 창씨개명 등의 문제가 일본문제인 동시에 무엇보다 인간의 생명과 이상과 가치를 파괴했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식민주의의 보편적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아시아는 일본 제국주의, 군국 전체주의, 식민주의의 유산을 보편적 차원에서는 거의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일본 군국전체주의에 협력했건 저항했건 그것은 민족을 고리로 한 민족문제인 동시에 더 근본적으로는 반인간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치와 일본의 전체주의와 2차 세계대전과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에 그들이 자행한 전제, 억압, 폭력, 학살은 근대 인간 역사의 “어두운 시기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시기”의 범죄행위들이었으며, 그에 맞선 저항은 자유, 해방, 자주, 인권, 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향한 투쟁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일본 군국주의에의 협력은, 특히 적극적 협력은 최악의 반인간주의적 학살과 폭력에의 가담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념의 차원을 넘어 북한 공산체제의 전체주의와 반인권, 억압, 폭력에 대한 엄정한 비판도 중요하며,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의 전체주의, 폭력, 반인권 및 그에 협력과 가담한 것 역시 준열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친일’ 극복을 ‘반공’ 이념으로 상쇄하려 해서도 안 되지만, 북한 전체주의를 민족의 이름으로 포용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 둘을 떼어서 설명하는 것은 동일 범죄를 민족이나 이념을 근거로 가르는 이중 기준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둘 어느 것도 생명과 인권, 평화와 화해라는 보편적 가치 지평에서 해결될 수 없다. 금번 명단 공개를 계기로 친일과 반공을 대비·역전시키려는 시도는 우리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다.

 

 

 

보편적 차원에서 정의와 동시에 친일협력에 대한 관용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진실과 사과, 공존과 화해를 교환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 둘을 연결해주는 용서와 관용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용서하고 관용하지 않는다면, 특정한 상황이 도래하였을 때 인간들은 또 다시 가공할 악행을 반복할 것이다. 누군가의 선제적 관용을 통해 악순환이 단절되지 않을 경우 인간들의 악행은 보복의 힘과 계기가 주어졌을 때 다시 드러나는 속성이 있다. 이른바 보복의 연쇄고리인 것이다. 현재가 평화와 이성의 시기라고 해서 미래의 악행 가능성이 영구히 사라졌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한 반인간적 범죄가 우리 시대에 광범하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또 하나의 현실적 이유는 한반도에 아직도 상존하고 있는 또 다른 전체주의체제와의 평화·협력·공존·통일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행했던 반인도적 범죄는 처벌해야 하지만 동족의 인권유린은 허용될 수 있다는 이중기준은 통용되어선 안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각각 보편이 아니라, 민족과 이념의 계선을 따른 자의적 준거이다. 우린 이 이중논리를 넘어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대의 참된 영웅을 기다리며

 

 

 

이제 우리는 미래를 향한 자발적이며 건설적인 과거극복 방안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금번 인물선정에서 주목할 것은 언론, 교육, 문화, 종교, 문학, 예술 등 특별히 우리의 영혼과 정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영역들과 인물들이 많이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이들이 타인의 삶에 억압과 고통을 가한 해악을 반성하고 그에 버금가는 속죄나 사과를 표명하거나 용서를 구하였다면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지수와 영혼품위는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어느 기관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백’, ‘무관’, ‘변명’, ‘회피’, ‘반격’, ‘불가피’, ‘침묵’ 등이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반응과 담론들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시대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이번에 커튼이 내려지면 우리는 ‘그건 우리가 안 했어요.’라고 외치는 속물들의 합창을 듣게 될 것이다.” 개인이 되었건, 언론, 학교, 종교 등 단체가 되었건, 누군가 먼저 사실에 승복하고 관용을 구한다면 그는 자기의 양심, 역사적 진실, 인류의 보편가치 앞에 겸허히 무릎 꿇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넘는 영웅이 될 것이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누가 먼저 이 길을 갈 것인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민과 동아시아인들과 온 인류의 정신을 맑게 씻어주고 우리 영혼의 청정지수를 높여줄 영웅들을 기대해 본다. 한국에서 발원한 보편가치 회복을 통한 관용과 화해의 도정은 일본과 동남아를 넘어 아시아로 퍼져나갈 것이고, 마침내는 온 아시아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안중근, 이회영, 신채호,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 그리고 수많은 무명 저항인사들이 한반도와 만주, 일본열도, 중국관내, 연해주, (......)에서 당했던 극한의 고통과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단지 그들의 민족주의와 항일에 대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이를 넘어 이들이 일생을 통해 자기 영혼과 보편적 가치, 인간애를 지키려다 겪었을 절망, 슬픔, 고뇌, 유랑, 고독, 빈곤, 이산,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이 금번에 공개된 사람들이 누리거나 자행했던 지위, 호의호식, 권력, 비양심, 물질, 곡학아세, 반인도적 범죄 등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 중 어떤 삶이 옳은 것이었는가를 묻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적 선택을 결행하거나 평가할 때 그 어떤 순간에도 최소한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금번 공개된 많은 개인, 학교, 종교, 언론, 기관, 조직, 집단들이 반성과 회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먼저 영웅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 관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 자기의 눈을 찔러 스스로 실명하였다. 친일문제와 관련한 반인도적, 반인간적 범죄의 진실이 드러났다고 하여 우리는 결코 타인의 눈을 찔러선 안 된다. 오히려 그들과 우리 사회가 찔러야 할 것은 진실이 안내하는 자기 양심의 눈이다. 그것도 깊고 멀리.

 

 

 

(KPI칼럼 게재일 : 200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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