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훈 목사 석방, 원세훈의 미래일까? [다람쥐주인님 글]
분하다. 이 엄혹한 세상을 살면서 분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냐만 이건 정말 분하다. 대선기간 사무실에 박근혜 후보의 임명장 수천수만 장을 박스째로 쌓아 놓고 조직적으로 댓글알바단을 고용했던 윤정훈 목사가 풀려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노회찬 의원이 국회에서 쫒겨나던 날에도 비슷한 분함을 느꼈던 것 같다.
<윤정훈 목사 박근혜 후보 선거캠프에서 찰칵. 출처:오마이뉴스>
공직선거법에 사망선고 내린 판결
지난해 9월 방송된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한 대형교회 부목사가 안철수를 공격하고 박근혜를 옹호하는 트윗에 적극적이다. 집중적으로 리트윗하는 계정이 아르바이트로 운영되는 걸로 보인다"며 최초로 윤정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새누리당 불법선거조직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수사결과 윤 목사는 지난해 9월 말 ‘SMC’라는 불법 선거운동사무실을 차린 뒤 컴퓨터 8대 등을 갖춰놓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1월 22일 구속기소됐다.
어제 서울남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김기영)는 인터넷 댓글 알바팀을 운영해 불법 선거운동을 벌인 혐의(공직선거법위반)로 구속기소된 윤정훈 목사에 대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지난 대선기간 최악의 선거법위반 사범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이다. 재판부의 판결은 윤 목사가 선거기간 벌였던 행각만큼이나 엽기적이다.
"피고인의 행위는 후보자 간 선거운동기구의 형평성을 유지하고 선거운동기구의 난립에 따른 과열 경쟁을 막고자 하는 중요한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어서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 다만 피고인이 인터넷상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별도의 위법행위를 했다는 근거가 부족한 점, 피고인이 부정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
윤 목사가 기소된 혐의는 허위사실 유포가 아닌 공직선거법 위반이었다. 그런데 재판부는 그가 공직선거법은 위반했으나 허위사실유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이미 명징한 증거들이 충분히 밝혀진 상황에서 '별도의 위법행위'는 또 왜 필요한 걸까? '부정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는 대목에서는 황당하다 못해 아찔해진다. 판사의 눈에는 윤 목사가 받았던 임명장에 찍힌 박근혜 대통령의 직인이 보이지 않았던걸까?
법원은 맹인(盲人)인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윤 목사의 공식 직함은 '박근혜 후보 새누리당 대선후보 캠프 캠프 SNS 미디어본부장'이었다. 그의 사무실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임명장이 박스째로 발견됐으며, 그가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직접 강연을 하던 동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런 증거들을 통해 불법 선거운동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부정한 이익'을 예상하는 것은 내일 아침 해가 뜰 것을 예상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법원은 대선 후보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사람에게 '부정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저 증거들을 보고도 불법선거운동을 통해 얻어질 '부정한 이익'을 예상 못하는 재판부의 아둔함도 한심하지만, 부정한 이익이 없다면 선거법을 위반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판결은 대한민국의 공직선거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코메디 그 자체다.
불법선거운동에 대한 '보답'은 언제나 선거승리 이후에 돌아온다. 윤 목사의 불법사무실은 선거직전 꼬리가 잡혔다. 선거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 그들에게 '부정한 이익'이 돌아오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재판부는 대체 무얼 근거로 선거뒤에도 그들에게 '부정한 이익'이 없었을거라 단언하는가?
<박근혜 대통령의 직인이 선명한 임명장>
또 재판부는 윤 목사가 직무상 행위를 이용해 직원 7명에 대해 선거운동을 시켰다는 공소 부분에 대해서 “직원들이 윤씨의 지시에 대해 거부한 점이 없고, 선거운동을 위해 채용된 일종의 근로자로 보인다는 점이 선거운동을 강제한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임명장은 받았지만 지시는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말인데 해석이 안된다. 저 판사는 법공부는 차치하고, 국어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임명'과 '지시'의 관계를 모르는거다. 이런 말도 안되는 판결문은 처음 본다.
“윤 목사는 새누리당의 임명장을 받긴 했지만 새누리당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거나 돈을 받고 일한 적은 없다” 작년 12월 박근혜 후보 캠프 안형환 대변인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가 저 말도 안되는 박근혜 후보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권력에 유착하는 사법권력이라지만 이처럼 적나라하게 '여당 2중대'를 자처하는 재판부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혹시 이분의 미래도? >
윤정훈에게서 원세훈의 미래 보여
최근 수년간 SNS를 중심으로 투표인증샷(투표현장 인증사진)을 올리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투표가 '개념인'의 상징이 되는 문화가 조성된 것이다. 이 훈훈한 문화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다름아닌 선관위였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유명인은 투표독려를 해서는 안된다", "사진에 특정 손가락 모양이 나와서는 안된다"와 같은 우스꽝스런 내용이 담긴 '투표인증샷지침'을 발표해 대중의 조롱을 받았다.
선관위의 '깐깐한' 지침의 근거가 되었던 것은 공직선거법이었다. 이처럼 인증샷 한장 찍는데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들었던 무시무시한 공직선거법이 이제 사실상 별게 아닌게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 법원이 지난 대선기간 최악의 부정선거 사범을 석방했기 때문이다. 아예 불법선거사무실을 차려놓고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했던 인물조차 구속되지 않는다면 이나라에 선거법위반으로 구속되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최악의 선거법 위반 사범을 방면했으니 누가 선거법을 지키겠는가. 사람들이 윤 목사의 판례를 신뢰한다면 다음 선거때는 전국에서 수백 개의 'SNS학원'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판결이 더욱 아찔한 이유는 여기서 원세훈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윤 목사의 석방소식을 전해 들었을 원세훈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혹자는 “원세훈에 비하면 윤정훈은 피라미”라고 말한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을 이끌었던 원세훈에 비하면 작은 사무실에서 십알단을 이끌었던 그는 분명 ‘피라미’다. 하지만 피라미는 막 풀려나도 좋은가? 피라미는 법의 그물을 그냥 통과한단 말인가? 고작 윤정훈이라는 피라미를 풀어준 법원에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는 피라미도 못잡는 그물로 대어를 낚을리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을 실행했던 국정원 심리전담반은 십알단의 '공무원버전'이며, 윤 목사가 운영한 십알단은 국정원 심리전담반의 '외주버전'일 뿐이다. 이다. 공작의 목적부터 실행시기, 구체적인 실행방법까지 꼭 닮아 있는 두 조직은 행위만 놓고 본다면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유사하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인물이 국정원수사의 공소시효가 몇일 남지 않은 상황에서 풀려났다. 아주 불쾌하며 아찔하다. 국정원수사 판결을 맡을 재판부가 이 코메디같은 판례를 깔끔하게 무시하길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