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불구속기소, 악마와 거래한 검찰 [다람쥐주인님 글]
<황교안 법무부장관(左)과 채동욱 검찰총장(右)>
'예상했던 불행'에서 느껴지는 무력감
2005년 당시 김종빈 검찰총장은 천정배 법무장관의 수사지휘에 대한 항명의 뜻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그가 지키려했던 가치는 비록 낡고 비루한 것(국가보안법)이었으나, 적어도 그는 지금의 검찰처럼 정치적 타협은 하지 않았다. 권력과 타협한 지금의 검찰에게서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어제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 혐의와 함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고도 불구속기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심대한 증거인멸의 우려가 살아있고, 그가 매우 중대한 선거법위반 사범임을 고려할 때 원 전 원장에 대한 불구속기소 결정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당초 검찰의 의견은 <공직선거법 위반-구속기소>였고, 황교안 장관의 입장은 <국정원법 위반-불구속기소>였다. 결국 각자의 패를 하나씩 주고 받은 결과 <공직선거법 위반-불구속기소>라는 타협안이 나왔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검찰이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타협안에 굴복했다. 비겁한 정치적 타협이다.
예상했던 비극이 현실로 다가왔을때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낀다. 알고도 어찌할 수 없었다는, 앞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 말이다. 지난 2주간 원세훈 원장의 구속여부를 둘러싼 황교안 법무장관과 채동욱 검찰총장간의 대립은 선악의 구도가 비교적 선명해 보였다. 비난의 화살은 주로 황교안 장관에게 맞춰져 있었고 검찰은 구속기소에 반대하는 황 장관의 전횡을 언론에 흘리며 정의감 넘치는 '투사'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런 2주간의 '밀당'끝에 나온 결과물이 고작 불구속기소라니 대단히 실망스럽다.
채동욱 총장은 지난 4월 취임사에서 "준사법작용인 검찰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공정성이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고 양보해서도 안된다"며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강조한바 있다. 채 총장은 취임후 불과 두달만에 악마와 거래했고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검찰, 정말 불가항력이었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장은 어제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총선·대선에 개입하라고 지시한 것은 명확한데도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지금 수사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며 황 장관의 수사방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했다.
국정원 중간간부들도 검찰 수사에서 이미 윗선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라고 시인을 했고 그 지시와 관련된 녹취록도 제출했다. 장관이 저렇게 틀어쥐고 있으면 방법이 없다. 이런 게 수사지휘권 행사가 아니면 뭐냐? 채동욱 검찰총장도 자리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 사건을 최소한 불구속기소라도 해서 공소유지를 해보려고 참고 있는 것. - 윤석열 판사 -
검찰을 위한 그의 변은 "최선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로 들린다. 일정부분 이해되는 부분도 있으나, 정권의 수사방해에 맞선 검찰의 태도가 그리 강경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거칠게 말하자면 지난 2주간 검찰이 한 일이라곤 황교안 장관의 시간끌기에 놀아난것 뿐이다.
그동안 언론에서는 주로 황 장관과의 갈등이 부각됐지만 검찰 내부에서도 원 전 원장의 구속여부를 두고 찬반양론이 치열하게 맞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찬반대립이 나타나자 수사팀은 모의변론이라는 역할극까지 치른 끝에 구속기소라는 결론을 내려 채동욱 총장에게 전달했다. 이처럼 구속사유가 명백한 사안에 대해 반대의견이 비등했다는 것 자체가 한국검찰의 비정상성을 증명한다. 운좋게 몇몇 '정상적인' 수뇌부가 사건을 맡아 타협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렸을 뿐이다. 2005년 수사지휘권 파동 당시 고작 국가보안법 따위에 직을 걸었던 김종빈 총장의 결단력(?)에 비하면 국가중대사를 두고 권력과 타협한 채동욱 총장의 선택은 아쉽기만 하다.
채동욱 총장은 취임이후 전두환 재산환수와 재벌비자금, 국정원사건에 대해 이따라 강력한 수사의지를 천명하면서 개혁드라이브를 걸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반신반의했지만 검찰의 자정노력에 내심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타협으로 인해 그 기대감은 물거품이 되었다.
<불구속수사를 한다해도 이분은 중형을 피할 길이 없다>
엄정한 구형으로 명예 회복해야
악마와 거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혼을 파는 것이다. 검찰은 원세훈 원장 구속을 놓고 권력과 거래함으로써 영혼을 팔았지만, 그것을 되찾아올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재판이라는 본게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불구속기소를 한다해서 원세훈 원장이 징역형을 피하는 것은 아니다. 불구속으로 인해 수사에 차질이 예상되긴 하지만 구속을 한다해도 원 전 원장의 '입'에서 나올 것은 많지 않아 보이며, 핵심 증거는 이미 확보된 상태다. 검찰은 국정원의 옛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활동한 인터넷 사이트 15곳에서 그들이 작성한 게시글과 댓글 1만여건을 찾아냈고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문재인 후보에게 불리한 글 수백건을 확인했다. 또 진선미 의원이 입수 공개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자료 등을 국정원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하여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올린 글들과 원 전 원장의 지시 사이의 연관성도 밝혀냈다.
검찰은 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법 제9조(정치 관여 금지) 및 제11조(직권 남용의 금지), 공직선거법 제85조(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금지) 1항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국정원법 9조를 위반할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 11조 위반 시 7년 이하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정지, 선거법 85조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6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된다. 외계인이 재판을 하지 않는 이상 원 전 원장은 중형을 피할 길이 없다. 재판의 관건은 그의 선거법위반 혐의를 입증하고 그 배후와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건드릴 수 있느냐에 있다.
이제 검찰이 명예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법정에서 엄중하게 혐의를 입증하고 배후를 밝혀내는 일이다. 증거는 충분하며 남은 것은 해석과 양심, 의지의 문제이다. 검찰이 법정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빼앗긴 영혼을 되찾아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