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판에게 보내는 서울경찰청 소속 일선 경찰의 편지

광진이다 작성일 13.06.23 23: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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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수사권 조정, 청장님 덕에 물 건너가겠군요”

“대통령-경찰청장-서장-일선 경찰의 연쇄적 갑을관계가 우리를 망쳤다”



청장님, 많이 당황하셨죠? 재임 시절 국민에게 공감받는 치안 서비스를 그토록 주장하셨는데 공감은커녕 많은 국민에게 공분의 대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우시겠습니까. 퇴임 이후 서울과 대구에서 출판기념회까지 열며 저희에게 “새 출발을 응원해달라”고 문자메시지도 보내셨는데, 이제 그 새 출발을 재판정 피고인석에서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견디기 어려우실 겁니다.

엄정한 법집행은 주폭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나 

그런데 청장님, 지난 14일 검찰에서 발표한 수사 결과 발표문을 읽는 저도 참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발표문을 읽다가 심장이 두근거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와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재임 시절 그렇게 강조하셨던 지휘 철학 ‘엄정한 법집행’은 ‘주폭’과 공원 노숙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나요? 또 다른 지휘 철학인 ‘협력’은 국정원과의 협력을 의미한 것이었나요?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참, 청장님이 내신 책 제목이기도 하죠? 책은 많이 팔렸나요? 청장님 재임 시절 서울청 대부분의 간부가 손에 들고 다녔으니 그것만 해도 변호사비는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고받은 내용만 갖고 수사하니까 주폭이 근절되지 않는 거라고, 신고 내용에 국한하지 말고 숨어 있는 피해자까지 낱낱이 찾아내 구속시켜야 한다고 지시하셨지요.

국정원 사건에서도 숨어 있는 댓글을 낱낱이 찾으려면 키워드 100개는 고사하고 1천 개로 검색해도 모자랐을 겁니다. 고발 내용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면 검찰 수사로 이렇게 개망신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경찰 수사의 ‘흑역사’는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더불어 김용판이 장식할 것이란 말까지 나돕니다. 한 개인의 잘못된 판단으로 11만 경찰 구성원들을 시궁창에 넣어버렸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청장님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내딛고 있는 수사권 조정은 ‘개나 줘버리라’는 국민의 야유에 직면해 있습니다. 청장님께서 정치권과 밀거래를 했다는 소문의 진실도 차차 밝혀지겠지요.

청장님께서는 ‘검찰이 짜맞추기 수사로 나를 천하의 흉적으로 몰고 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시더군요. 그런데 아무리 억울하신들 저희보다 억울하시겠습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면서, 묵묵히 경찰 업무만 수행해온 저희가 갑자기 국기 문란의 조연이 돼버렸으니 말입니다. 사실 청장님이 뭘 시키든 충실히 이행했던 저희 아닙니까. 청장님이 하나만 말해도 열을 알아서 해주는 충직한 부하였습니다.

청장님이 주폭 척결을 외치자마자 한 달 만에 100여 명을 구속시켰지요. ‘경찰관 음주운전 금지’를 명하셨을 땐 단체로 일어나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며 ‘음주운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기도 했지요. 청장님이 시를 좋아하신다는 이유로 아침 회의 석상에서 너도나도 일어나 시를 외우는 곳이 서울경찰청이었습니다. 청장님이 강조하신 말씀을 청동으로 조각해 서울경찰청 벽면에 부착할 정도이니 얼마나 흐뭇하셨겠습니까.

시 좋아하는 당신 위해 아침마다 시 읊던 간부들 

그런데요, 청장님. 청장님이 모르신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청장님이 좋아하시는 시를 외우는 간부들을 쳐다보며 “저런 배알도 없는 인간”이라 비웃었고, 청장님 말씀을 새긴 청동 부조를 보면서는 “청장 바뀌면 없어지겠군” 추측했습니다. 심야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국정원 수사 결과 발표를 접한 직원들이 “중대한 사안이라 신속하게 발표한다”는 청장님의 말씀을 정말 믿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청장님 앞에서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정말 저희에게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던가요?

몇몇 간부는 청장님의 불법 (또는 최소한 부당한) 지시에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동참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뭔가 이상하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다만 말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저희는 상급자의 지시에 “예, 알겠습니다”라고 복창하는 것에 익숙할 뿐 “안 되는데요”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배운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으니까요. 아마 청장님은 저희가 만만하셨을 겁니다. 청장님의 어떤 지시에도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리고 실제 그리 됐던 것 같습니다.

불만이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하냐고요? 저희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습니다. 기껏 용기 내어 ‘그건 아닌데요’라고 말해봤자 조직 내 ‘진상’으로 낙인찍힐 뿐이죠. 진상이 되고도 용기를 접지 않으면 결국 징계나 파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찌라시’ 정보를 너무 사랑하셔서 청장님처럼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계시는 조현오 전임 청장님을 기억하시지요? 그분이 갑자기 ‘실적주의’를 도입하며 전국 경찰관을 못살게 굴 때 반대 의견을 표시한 경찰관들은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파면됐습니다. 청장님들이야 퇴임 뒤 또 다른 공직에 취임할 수도 있고, 그게 안 되면 대기업 고문으로도 갈 수 있지만, 저희 같은 하위직들은 어디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저희는 윗사람에게 찍히면 끝입니다. 승진이든 인사든 징계든 모든 게 서장님, 지방청장님, 본청장님 마음먹은 대로이니 저희가 어떻게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청장님은 저희에게 속으신 겁니다. 청장님 칭송이 자자하고, 청장님이 하시는 말씀은 성경 구절이 되며, 청장님의 생각은 솔로몬의 판단이 될 지경이니 청장님도 속으실 만하지요. 그러니 정말 억울하시겠습니다. 청장님의 잘못이라면 직원들의 침묵을 찬성으로 받아들이고 몇몇 간부의 아첨을 직언으로 받아들인 것뿐인데, 조직을 팔아먹은 천하의 ‘배신남’으로 낙인찍혔으니 얼마나 억울하시겠습니까.

용기있게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이 억울함을 벗어날 길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의 후속으로 <청장이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를 출간하시는 겁니다. 청장님의 의견에 용기 있게 반대하는 경찰관, 혹은 마음속으로만 불만을 삭혀온 많은 하위직 경찰관이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조직, 정책결정자의 참모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조직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힘써주시는 것 말입니다.

아마 청장님도 어떤 점에선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청장님에게도 ‘절대 갑’인 대통령이 있었을 테니까요.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임명하도록 돼 있으니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톡 까놓고 이야기하시죠. 법률상 동의를 얻게 돼 있는 경찰위원회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시민의 뜻보다는 절대갑의 심중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집에서 기르는 개도 밥 주는 주인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왜 안 그렇겠습니까.

어디 청장님뿐이겠습니까? 지금도 청장이라는 고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많은 경찰관들이 갑의 심중을 읽어내는 데 전심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수많은 전임 청장이 그랬고, 앞으로의 청장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대통령을 정점으로 경찰청장, 지방청장, 서장, 최일선 경찰관들까지 한 줄로 연결된 수많은 ‘갑’과 ‘을’의 릴레이에서 자유로운 경찰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장님도 중앙집권적 경찰 구조의 희생양이면서 하의상달이 막힌 비민주적 경찰조직의 일원이었을 뿐인데 ‘천하의 흉적’으로 몰리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지시겠지요. 청장님이 시민의 뜻에 따라 시민의 손으로 임명된 서울청장이었다면, 한 사람만 바라보며 경찰 생활을 하다 시궁창에 빠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진 마십시오. 언젠가는 절대갑을 위해 충성하는 경찰이 아닌 시민의 손으로 임명하고 시민의 뜻으로 운영되는 경찰로 거듭나는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경찰관들이 상급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률과 양심에 따라 법을 집행하고, 토의와 토론을 거쳐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경찰, 언젠가는 우리 국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청장님처럼 불행한 서울청장이 다시는 나오지 않는 날 말입니다.

경찰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 청장님이시니, 비록 퇴임하셨지만 그런 경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날이 오면, 청장님과 함께, 다시 한번 외쳐보고 싶습니다. 존·엄·협·공(‘존중·엄정·협력·공감’을 뜻하는 김용판 전 청장의 지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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