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정원장, 대체 무엇을 노린 걸까? [늙은도령님 글]
남북정상 간의 대화록 전문을 공개한 이유로 ‘국정원의 명예와 직원들의 사기’ 때문이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댄 한 남재준 국정원장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아무리 국정원의 궁지에 몰렸다 해도 이명박 정부에서 현재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씹어대고 문재인 의원을 확인사살 하는데 이용했던 것들을 이렇게까지 형편없는 이유로 공개했다면 이를 과연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 것일까?
남재준 국정원장이 바보란 말인가? 윤창중이란 희대의 갑질 성범죄를 저리는 자를 수석대변인으로 발탁한 박근혜 대통령이지만, 통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국정원장까지 국익과 정권의 보위 및 국정원의 이익을 공적인 자리에서도 구분할 줄 모르는 자를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임명했단 말인가? 멸공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군 출신이라해도 이번의 자폭은 이해할 수 없다. 뭔가 이상하다.
▲ 박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남북정상 간 대화록 전문을 전격 공개한 이후에 자신들이 상상했던 내용이 나오지 않고, 왜곡·과장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은 것만 밝혀지자 거대한 여론의 역풍에 직면한 새누리당이 서둘러 국정원 사건의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이는 마치 국정원의 행태가 잘못됐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너무 어이없지 않은가? 아직 정권의 안위를 걱정할 만큼의 여론이 일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도 빨리 국정조사에 합의했단 말인가?
여론의 역풍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화록 공개의 숨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한중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 정상 간의 대화록을 공개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한다. 대체 세계 어느 정상이 한국 대통령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겠는가? 혹시라도 말실수를 하거나 상대를 높여 분위기를 띠운다고 하면 그것이 한국 정보기관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공개돼 자국 야당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등 해외언론에서 국정원의 행태를 비난하는 기사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듯이 이번 국정원장의 폭거는 박 대통령의 외교성과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국정조사와 검찰의 수사결과에 대한 국정원 내부에서는 조직적 반발이 컸을 터, 신임 국정원장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란 대화록 전문 공개 외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정부와 새누리당, 보수 언론과 종편들로 이루어진 이 땅이 보수 세력들을 믿고 대화록 공개를 강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도 4.3항쟁을 좌파의 폭거로 생각하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극도로 편향된 정체성도 한몫 했겠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혼자만의 결정으로 이런 일을 강행했을 리는 없다. 결국 나름의 해결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고 보면 지독한 음모론이라 할까?
▲ 국정원의 내부 반발을 잠재우고 조직을 장악하라
검찰의 수사결과로 일부가 드러났듯이 국정원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정치 및 선거 개입이 원세훈의 국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이명박의 통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박근혜의 당선에도 목적이 있는 일관된 흐름이었다. 보수 정권의 반대 세력들을 모두 다 종북으로 몰아가면 국정원의 불법적인 행태도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이 생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북한의 호전성은 남한의 최대 위험요소가 아닌가?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의 성공을 위해서 빨간색 덧칠을 통한 종북 몰아가기만큼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는데 유용했던 것이 어디 있었던가. 국가의 보위를 핑계로 국익도 저버리는 자가 수장으로 있는 국정원이면 이 땅의 합리적 좌파와 진보 진영마저 무력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그들이 떠받드는 영원한 국시는 반공이고 멸공이지 않은가. 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보다 더한 권한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믿는 자들의 집합소가 국정원이다.
헌데 박 대통령이 국정원과 분명히 선을 긋는 발언을 하자 내부 반발이 상당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반발의 강도가 세지 않겠는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사회경제적 평등만 외쳐도 빨갱이로 보는 자들이 박정희(이 시대의 헌법보다 우위에 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의 딸이자 보수의 아이콘인 박근혜의 당선을 위해서 전력을 다했는데 팽을 당했으니 그 분노의 크기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남재준 국정원장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으리라. 내부의 반발을 무마시키지 않으면 박 정부의 통치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터,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면서도 더 이상의 반발도 잠재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최상의 시나리오 중 하나가 대화록 전문을 공개하면서 그 이유를 국가의 보위를 담당하는 최전선에 있는 국정원의 명예회복을 들면 이만큼 좋은 것도 없다. 벌써 어버이연합과 각종 전쟁 관련 전우회 같은 극우단체의 광기가 느껴진다.
▲ 국정원 개혁과 내부 장악의 명분을 잡아라
새누리당이 국정조사에 전격 합의한 것으로 박 대통령의 한중정상회담 성공의 걸림돌은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면 아직도 넘어야 할 장벽이 태산같지만 일단 물꼬는 텄고 소나기는 피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자신의 자리를 내걸지 않고서도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걸었으니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내부의 반발도 일정 부분 사그러들 것이다. 자신의 수장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조직논리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국정원 직원들의 반발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차피 NLL 대화록에 대한 해석은 자의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정파의 이익에 맞춰 토론한다면 전통의 지지층 이탈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북한과의 타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은 6.25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분들이나 보수적이고 마초적 성향이 강한 자들이니 이들의 노무현 비판은 멈출 가능성이 없다. 만에 하나 여론의 향배가 노무현에게 쏠리면 박 대통령이 구국의 결단으로 10.4선언보다 한 발 나아가는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을 전격 제의할 수도 있다. 시진핑이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국 정부에 무엇을 요구할지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한중정상회담에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어쩌면 권력의 삼각편대는 이것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한중정상회담에서 뜻밖의 성과를 거둔다면 박근혜 대통령 책임론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킨 국정원의 반발도 제압하며 남재준(설사 다른 사람이 임명된다 해도)의 국정원 장악도 보다 수월해 질 것이다.
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오르는 것은 불보듯 뻔하고 진보 진영의 반발은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게다가 현 민주당의 능력으로는 남재준 국정원장을 타의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책임을 물어 남 원장을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할 일도 없을 것 같다.
▲ 모든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는 남재준 국정원장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대화록 전문을 공개했다고 말한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야당의 공세가 거세고 여론의 향배가 악화돼도 국정원에 함부로 칼을 댈 수는 없다. 결국 여야가 국정조사에 합의했으니 적정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질 터, 남재준 원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하면 국정원에 돌아갈 책임은 최소화되고 박 정권에 대한 충성심은 강화될 터다.
당연히 국정원을 공격한 야당과 시민단체, 지식인과 대학생, 교수와 종교인들을 비롯해 필자 같은 형편없는 논객들에 대한 국정원 직원들의 불만과 증오는 커 가리라. 이번 사건이 잠잠해지면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다고 복수심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보복이 진행된다고 해도 이명박의 민간인 불법사찰처럼 허술하게 일을 진행할 국정원도 아니다.
물론 이런 일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다들 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대화록 전문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 이것이 공개되면 새누리당에 유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었을 국정원 직원이란 별로 없을 것 같다. 정문헌과 서상기 등 새누리당 의원들이 대선 승리를 위해 충분히 이용했으면 됐다. 전문 공개로 거대한 혼란이 야기되고 극단적 분열이 일어난다고 해도 보수화된 남한에서 우파에게 불리한 것은 없다.
국정원에 대한 처벌 여론이 높을수록 반대하는 여론도 높아질 것이다. 전통의 수구·반공 세력들에게는 이번 대화록의 핵심이 노무현의 NLL 포기 선언을 확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문맥을 따져 합리적인 해석을 할 자들도 아니다.노무현 대통령의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굴종적인 자세만 부각되리라.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협상의 귀재로서의 노무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승리를 속단하지 마라
대화록의 불법적인 공개가 우파 진영에 불리할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너무 빠르고 한가한 것일 수도 있다. 천하의 국정원과 불리한 여론을 뒤집고ㅡ그 방법이 민주주의에 반한다 해도ㅡ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한 보수 세력이 이렇게 허접한 전술을 들고 국정원 사건의 물타기를 진행했으리라 생각하면 너무나 순진한 것은 아닐까? 이명박 정부도 초반에 크게 휘청거렸지만 결국 그들의 반격에 의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아닌가?
정권 교체의 여론이 훨씬 컸음에도 정권 재창출로 이어진 지난해 총선과 대선의 결과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꿰뚫지 못하면 잠깐의 승리는 만끽할 수 있어도 최종 승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돌+아이 짓은 어쩌면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발언일 수도 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이 보수화된 대한민국이다. 종북 척결을 부르짖는 국정원과 검찰, 경찰과 기무사, 방송과 언론, 보수와 관변 단체들로 우굴거리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안철수와 최장집이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해서 보수 세력들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진보적 자유주의(그 실체를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땅의 보수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장악된 상태에서, 아고라와 뉴스타파만으로 거대한 보수화 메커니즘을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남은 것은 새로 유권자가 될 10대들과 투표에 불참하는 것을 정치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저항으로 생각하는 20대들 뿐이다. 민주주의를 당연시여기면서도 권위주의 시대의 전략과 전술에 익숙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논리에 거부감이 적은 이들이 저항의 전면에 설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언제나 의로운 혁명의 주역은 불의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이었다. 늙은이는 그들의 분노에 비로소 궁둥이를 뗄 뿐이다.
분노하라, 어떤 매개도 없는 순정한 분노만이 정의를 이룰 수 있다. 분노하라, 이 땅의 민주 세력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