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 (指鹿爲馬)

황제네로 작성일 13.07.23 21: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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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란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긴다는 뜻이죠. 진나라 2세 황제 치하에서 실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가 사슴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이것은 말입니다”라고 우깁니다. 황제가 “어떻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 당신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황당해 하지만 조고를 무서워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말이 맞다고 조고에게 맞장구를 칩니다.

이 고사에서 유래한 지록위마는 윗사람을 농락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인용되지요. 지록위마는 환관이나 간신처럼 국정을 농단하는 아랫사람한테만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국정원 논란에도 의연하게 침묵을 지키던 박근혜 대통령이 오랜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최고 권력자한테도 지록위마란 말이 쓰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정원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주기를 바란다.”

국정원은 댓글이라는 야비한 수단을 동원해 야권 대선후보를 비방하며 대선에서 ‘선수’로 뛰었습니다. 대선 개입 의혹이 검찰 수사 결과 사실로 드러나자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라는 판도라의 상자까지 거침없이 열어젖혔습니다.

워싱턴포스트나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주요 외신들조차 국정원을 “정치적 앞잡이” “누설자”라고 비아냥대고 있는 판국에 박 대통령의 상황 인식은 태평스럽기 그지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일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말하는 유체이탈화법의 진수를 보는 듯합니다.
사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국가안보국(NSA)의 전방위적 도청 사실이 폭로되면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전 세계 어느 정보기관이든 다 하는 것 아니냐” “테러 방지를 위한 약간의 사생활 침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던데, 참 군색해 보이더군요. 오바마가 대통령이 아니라 변호사였다면, 야당 정치인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해 보십시오.

그래도 오바마에겐 국익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박 대통령에겐 무슨 명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박 대통령의 한 마디로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국정원은 갑자기 개혁의 주체로 바뀌었습니다.

‘셀프 개혁’이라니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란 비난은 점잖은 축에 속합니다.

도 둑질하다 잡힌 도둑놈한테 ‘앞으로 도둑질 안 할 방법을 너 스스로 찾아봐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에게 ‘네가 알아서 수술해라’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이쯤되면 국정원 개혁은 보나마나 뻔하겠지요.

대통령의 격려에 힘이 났는지 국정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취지의 해석을 담은 성명까지 발표했습니다.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며 대놓고 정치에 뛰어든 것입니다.

조고는 황제를 농락했지만 박 대통령은 국민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위에 국민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이었는데 국정원에 관해선 왜 이러는 걸까요.

참, 깜박한 게 있네요. 조고는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나중에 죄를 씌워 다 죽여버립니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307161452181&pt=nv

 

주간경향 논평

 

 

 

 

 갑자기 네이버 검색어에

 

지록위마가 오르길래 뭔가했더니 이것이었나 보네요.

 

(1:100 문제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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