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6월 14일 오후 4시 광주 조선대정문..
한쪽은 쇠파이프, 한쪽은 최루탄을 들고 맞서는 비극적인 상황.
교내에서 정문 방향으로 밀려나던 전의경 대원들 틈에 있던
당시 20살 김인원일경은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고꾸라집니다.
시위대가 투척한 화염병이 왼쪽 발목에 맞아 불길이 일었고,
이에 놀라 고개를 숙인 김일경의 뒤통수를 시위학생이 쇠파이프로 내려친 직후.
그들은 쓰러진 김일경을 끌고 간 뒤 집단 구타를 합니다.
[사진=전남일보/ 1996년 6월 14일 당시 전남일보에 실린 기사]
뇌출혈과 장출혈 증상으로 의식을 잃은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9차례 대수술을 받지만..
17년 간 의식불명으로 긴 투병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제 눈물도 말라 나지 않아요.
행복? 그거 제게는 없어요..
희망 없는 24시간 병수발을 17여년 동안 하니
이제는 아버지는 몸도 마음도 지쳐갑니다.
"아들이 셋 있는데, 인원이가 차남이예요.
세 놈 중 가장 온순하고, 자랄 때도 여성스러워 가장 정감이 가는 아들이었어요.."
전남청 9중대 3소대에 배치되어 입대 두달여 만에 2박 3일 특박..
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마지막 시간이었을 줄...꿈에도 몰랐던 아버지
[사진=전남경찰 / 20살 당시 김인원대원의 모습]
아들이 다치지만 않았다면 여느 가정처럼 희노애락... 화목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다친 이후로 우리 가족은 아들이 일어나기만을 기도하는
하루하루가 모여 17년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20살이었던 아들은 36살이 되었고.....아버지는 어느새 노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 송두리째 빼앗긴 17년........어디가서 호소해야하나요.
아버지는 아들을 간호하며 겪은 가슴 찢어지는 심정을 담은
"노래하는 새들도 목이 타는가"라는 시집을 내기도했습니다.
"최루탄 가스가 숨통을 조이고
쇠파이프에 천 갈래로 찢겨진 채
조국에 바친 너의 살덩이가
휘청거린 보도 위에 뒹굴 때
TV화면이 얼른 주워 비추인 순간.......
또 다른 네 얼굴이 환상 속에 달려와...
야윈 내 가슴께로 아프게 파고든다...."
[사진=전남경찰/추석 위문당시 전남청장과 김인원대원]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심장은 뜨겁게 뛰는 그..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가는 것을 느끼며
외로워했다는 김인원 대원...
.
.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를 뒤로한 채..
오늘 오전 4시경 그 뜨거웠던 심장도 뛰지 않습니다.
심폐소생술이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에
아버지는 그대로 주저앉습니다.........
병수발에 힘들었어도
살아있는것 만으로도 감사했던 내 아들..
그렇게 김인원 대원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를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다시는 이런 시대의 아픔을 안은 피해자가 없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 없이 편안하시길...........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현재 전남경찰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ol.jeonnam에서는
11.16일까지 김인원대원 추모 댓글달기 운동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는길 외롭지 않게 많은 동참바랍니다.
추모의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김인원 대원 부친 김정평님 시집“노래하는 새들도 목이 타는가“를 읽고
한 시인이 SNS를 통해 보내준 추모의 시입니다. 한구절 한구절 가슴이 아파옵니다.
-고 김인원 대원을 추모하며-
채 온기 식지 않은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세상과 마지막 연결고리
흰 침대에 살짝 내려놓고
그대 바람처럼 남도 산야를 쏘다닐
꿈에 부풀어 있는가?
팽팽했던 96년 5월
그대 어깨 넘어
비스듬히 꽂히던 햇살 마지막으로
견고한 17년 시간 따라
말라간 검은 입술
새들도 제각기 돌아가
도란도란 새 둥지를 엮어 가건만,
꽃잎 같은 그대 시간은
한잎 한잎 홀로
떨어져 가고 있는가
여전히 꿈꾸고 있는 그대!
아직 끝나지 않은
당신의 노래
들려주고 싶다면
‘응답하라 1996년 5월의 당신’
젊어 무엇이든 환희에 찼던
하얀 당신 모습 그대로..
위키트리에서 퍼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