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고 생각나는대로 썼더니 제 이해에 문제가 있는것 같네요. 그래서 엔하위키 미러에서 일부만 긁어와 봤어요. 찾아서 보시면 더 있음..
이러한 획기적 변화(농경의 시작)는 서아시아 지방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지역에서 기원전 8000년 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기원전 8000년에 농경이 시작된 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한정이었다.
한반도와 중국동북지방에 거주하던 여러집단이 공동체로 조직화 되고 황허문명의 확장에 따른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원전 1천년 동안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민족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한민족 형성과정의 중간에 황허문명의 확장을 집어넣어서 의미를 뒤틀어버렸다. 저 내용대로라면 한민족은 황허문명권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건 청동기 발달사만으로도 납득불가능한 소리가 된다.
삼국유사(1281년)→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1281~1283년 사이에 완성되었을 것이란 추정만 가능할 뿐, 정확하게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여는 산과 언덕 넓은 강물이 많아서, 한반도 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하였으며→ 22페이지의 서술. 부여의 위치가 넓고 평탄한 지역인 것은 맞지만 그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이다. 더구나 산과 언덕이 많은데 넓고 평탄하다는 서술은 단순한 사실 오류마저 포함하고 있다. 최종 수정본이라고 맨 위에 제시된 링크에서는 '한반도 지역에서는'이라는 표현이 삭제되어있다.
그 후 고구려는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였고, 한군현을 공략하여 313년 경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고, 요동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는 등 동쪽으로도 정복사업을 벌여나갔다.→ 태조왕 시기에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였고, 미천왕 시기에 낙랑과 대방을 정복한다. 여기에는 거의 200년의 시간차이가 있고 옥저의 정복이 더 이르다.
"고구려 건국 초기에 연맹 국가 형성에 참여한 5개의 부족으로..." "거서간 - 혁거세 - 족장"→ 고구려의 5부와 신라의 6부는 부족이 아니다! 이미 40년전의 학설로, 폐기된 이론을 그대로 싣고 있다.
(안시성 전투) "양만춘 장군을 중심으로 군민이 합심하여"→ 양만춘이란 이름은 후대(조선 후기)의 첨부이며, 당시 안시성 성주의 진짜 이름은 불상(不詳)이다.
신라하대에는 최치원을 포함한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골품제를 비판하고 중앙집권적인 유교 정치 이념의 실현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었다.→ 그냥 전부다 엉터리. 최치원의 골품제 비판 의식부터 한계가 있었으며, 새로운 유교정치는 신라시대에 대두된 적이 없다. 유교정치는 조선시대에서야 이뤄졌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애초에 신라 하대의 6두품은 중앙집권적인 것이 아니라 호족과 연결되면서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하게 등장하며, 이걸 순수하게 유교의 정치 이념화로 본다고하면 학계의 대세는 신문왕 시기이므로 신라하대라고 볼 수 없다. 대놓고 이대로 배우고 시험치면 오답을 고를 것이다라고 꼽힌 부분중 하나.
(고려시대의) 이부=관리의 인사, 병부=군사→ 고려시대의 이부가 담당한 인사는 문관뿐이다. 무관의 인사는 병부가 담당했다.
(서경반란에) 차별에 불만을 품은 서북 지방의 농민이 호응하였으나→ 묘청의 서경반란 장면인데, 고려시대에 서북지방민의 차별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조시대 이후 폐허가 된 평양을 재건한 것도 고려왕조이다. 조선시대의 서북지방 차별을 고려에도 획일적으로 적용한 구문.
최승로의 상소문을 인용하여 중국중심의 천하관이라고 설명→ 최승로 시기는 중국중심의 사대적 천하관이 유입되던 시기가 아니다.
일부 조창에서는 전쟁과 재난에 대비하여 곡식을 비축하였다→ 전혀 근거가 없다.
향리 출신으로 중앙의 권력자와 줄이 닿지 않았던 이규보는→ 이규보의 부친은 이미 호부 낭중을 역임한 중앙 관료였고, 이규보 본인도 최씨정권의 비호를 강하게 받아 순탄한 관직생활을 했다. 이규보가 권력자와 줄이 닿지 않았다면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이 최우의 책임하에 간행된 것도 설명할 수 없다.
향도는 종교행사 외에도 제방을 쌓는 등 마을 공동 작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향도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내용. 향도가 제방을 축조한 흔적은 없다.
몽골의 영향으로 일부다처제가 나타났다.→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을 한 재상이 여자들에게 손가락질 당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나온다. 공식적으로 한국에서는 처첩제라면 몰라도 일부다처제는 실시된 역사가 없다. 교학사 교과서서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권한이 남성과 완전히 동등하였다는 식의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여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틀리고 있다.
고려는 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1125년)→ 고려는 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적이 없다. 처음 금이 형제의 맹약을 맺고 했을 때는 묵살하였고, 이후에 이자겸이 맺은 것은 사대의 맹약이다. 그리고 형제의 맹약을 맺자는 제의가 온 것은 1117년이고, 사대관계가 형성된 것은 1126년인데 1125년은 어디서 나온 연도인가?
조선초기 역사 서술에서 편년체를 왕권강화적 입장, 기전체를 신권 강화적 입장이라고 서술.→ 역사 서술 방법은 역사서 편찬자의 의도와 아무 상관 없다. 오히려 본기와 세가를 사용할 수 있는 기전체가 왕의 활약을 대놓고 언급할 수 있기 때문에 세종은 오히려 고려사 편찬에서 기전체 사용을 선호했고, 신하들은 고려사 절요에서 편년체 사용을 선호했다.
이 밖에 백정, 무당, 창기, 광대 등도 천민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 천민은 노비 뿐이다. 창기도 천민이기는 하지만, 이건 원래 천민중에서 선발하여서 창기가 되기 때문이지 창기가 되어서 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는 고려시대의 화척과 재인, 양수척의 신분을 양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양인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오히려 천민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역사의 전개와는 정반대의 서술이다.
강원도에는 대동법을 반대하는 이가 없다고 서술하다가 다른 곳에서는 대토지를 소유한 토호들이 충청도와 강원도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반발로 대동법이 잘 시행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모순되는 서술을 하고 있다.
이양법은 모내기할 때 줄을 맞추어서 심기 때문에 벼와 잡초가 쉽게 구별이 되어서 김매기를 쉽게 할 수 있었다→ 줄을 맞추어서 모내기를 하는 것은 일제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명성황후는 조선 조정에서 시행되는 모든 정책에 관여하였고 더불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권한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결정권은 공식적 권한을 의미하므로 말이 안된다. 당시 조선에서 정책의 최종 결정권은 원칙적으로 왕 혼자만 갖는다.
양전사업. 당시 무분별한 거래로 소유권 관련 분쟁이 빈번하였는데... 지계를 발행하여 분쟁 조정 비용과 경제적 거래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또한, 소지소유자에 대해 임시적 한시적 주인이라는 뜻의 시주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대한제국의 모든 토지는 황제 소유였다. 따라서 사적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주라는 개념을 만들었던 것이다.→ 중대오류, 대놓고 중대 오류라고 지적되었다. 왕토 사상은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토지사유제가 한참 전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오래전에 확립된 이론이다. 더구나 이 부분 앞에서는 지계의 발급이 공식적인 소유권의 인정이므로 지주제를 강화시켰다는 내용도 있다. 왕토사상과 관련된 부분은 식민사관에서 정체성론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나오는 부분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근대국가의 바탕에는 자본주의 경제가 존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저건 현대 국가이다. 저 기준이면 프랑스[25], 프러이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러시아 등은 중세국가이다. 근대국가 성립 기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확립은 되면 좋은거지 안된다고 근대국가로 안 부르지는 않는다. 이건 황제권을 언급한 대한제국을 까기 위해서 써먹은 표현이다. 대놓고 이 단락 제목이 근대국가 수립운동과 좌절이다.
방곡령의 선포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다.→ 방곡령 자체는 조선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지방관리들의 고유한 권한이다.
식민지 국가에서 독립으로 가는 길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길과 레닌의 반제 민족 해방 투쟁의 길로 언급.→ 민족자결주의는 원래 "주의"가 아니며, 민족주의의 필수요소에 가깝다. 더욱이 레닌의 반제 민족 해방 투쟁과 같은 독립운동의 방법은 아니다. 더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베르사유 체제에 의해서 패전국의 식민지에게만 적용이 되었는데 당시 승전국이었던 일본 제국의 식민지인 조선이 독립을 할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이건 미국 대통령 윌슨과 소련의 레닌이라는 이후의 냉전체제의 구도에 맞춰서 미국식 독립운동방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허구적 방법론을 집어넣은 것이다. 실제로 독립운동의 방법론이라면 국제정세에 따른 외교독립론, 무장독립투쟁론, 사회주의혁명론 등으로 분류해야 한다[26].
일본은 식민지를 자신들의 체제와 문화에 일치시키는 '동화주의'를 실시하였고, 나아가 '융합주의'를 적용하였다.→ 일반적인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저걸 기만적 문화통치와 민족말살정책이라고 부른다. 동화주의와 융합주의라고 하면 가르치는 교사도 알아듣기 어렵고, 일본의 의도를 비교적 온건하게 표현하게 된다. 물론 중립적으로는 "(강제)동화정책"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융합주의"라는 말은 내선일체의 섬뜩한 뜻을 미화한 것이나 다름 없다.
연표를 넣으면서 1919년 상해 임시정부수립과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제외하고, 대신에 18개 밖에 없는 항목에 물산장려운동과 진단학회 조직을 포함.
일제시대에 학도병제와 지원병제, 징병령으로 30만을 징집 하였고, 강제 징용령을 통해서 70만을 징용하였다.→ 일본측 자료보다 적은 숫자로 축소 언급.
미주지역에서는 장인환 전명훈 의거를 계기로 대한인 국민회가 만들어져 신한민보를 발간하고 해외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터무니 없이 과장된 서술로, 이 서술대로면 대한인국민회는 상해임시정부나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던 단체보다 더 주도적인 단체가 된다. 미국내에서의 활동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승만을 띄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27]
스티븐슨은 1904년 우리나라의 외교고문으로 임명된 인물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찬양하던 인물이었다.→ 스티븐슨이 제1차 한일협약(한일의정서)에 의해서 일본의 의도로 임명된 인물라는 것이 제외되었고, 당시는 대한제국 시기였으므로 "우리나라"라는 애매한 표현도 문제가 된다. 스티븐슨이 사망하던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행되기 전이므로 식민지배를 찬양한다는 대목도 잘못되었다.
3.1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었다. 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미주지역의 동포들도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고 시가행진을 벌이며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통치를 국외에 알렸다.→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투쟁이 축소되고, 상당한 분량을 미국 필라델피아의 독립선언식에 투자하였다. 사진까지 넣어서 언급한 이승만 등이 참여하였다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인대표자 회의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사진으로 정한경, 서재필, 이승만 등의 참여하였다.→ 이건 한인 대표자 회의의 사진이 아니라 한인 자유대회의 사진이다. 그래서 수정권고를 받았으나 무시하고 그대로 대표자로 수록했다.
베이징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군벌 타도와 친일 관리 축출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5.4운동의 격문으로→ 5.4운동의 가장 큰 이유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산동반도(산동성)의 독일 제국 식민지 등을 차지한 것(21개조 조약)에 대한 반일 운동이다. 일본 이야기를 싹 빼고, 중국 내부 불만으로 일어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남의 나라 역사도 왜곡하고 있다.
이후 1948년 7월 17일 선포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명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명시한 것은 1987년 개정된 현행헌법의 전문이다. 제헌헌법의 전문에서는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다. 현행헌법과 제헌헌법의 전문도 확인하지 않고 실은거다.
임시정부는 미국 워싱턴에는 구미위원부(대표 이승만)을 두고 필라델피아에는 한국통신부(대표 서재필)을 두어→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를 정식으로 설립한 적이 없다. 구미(외교)위원부는 이승만이 독단적으로 설립한 것이고, 초기 대표는 이승만이 아니라김규식이었다. 그러나 조직 개편으로 김규식이 한달만에 부위원장으로 물러나고, 이승만이 선출되었다가, 5개월 만에 임시정부와의 갈등으로 다시 물러나고 현순 목사가 대리 1년, 서재필이 대리 7개월을 재임했다. 특히 현순 목사는 이승만의 독단(공채금과 애국금 문제, 주미대사관 문제)과 대립하다가 사임한 이후에야 완전히 무력화된 구미위원부에 이승만이 다시 취임했다. 그는 무려 1948년까지 재임하고 후임자로 심복인 임병직(후에 외교부장관)을 임명했다.[28]
(이승만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청원서에서) 그리하여 한국을 극동의 완충국 혹은 1개 국가로 인정하게 되면, 동아 대륙에서의 침략전쟁이 없게 될 것이며→ 사실은 '그리하여 한국은 극동의 완충국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느 일국 이든지 동아대륙에서 침략전쟁을 쓰지 못할 것이며'이다. 본문에서는 완충국으로 두는 것과 함께 독립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언급하는데, 이것은 띄어쓰기를 자기 맘대로 해서 의미를 조작한 것이다. 위임통치청원에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방법도 있다는 식으로 물타기 한 것.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고자 임시 정부는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지, 임시정부가 개최한 것이 아니다.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이 알려지면서 임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 이후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을 탄핵하고...→ 이건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지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이 아니다.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 이후 이승만을 탄핵하는 이유를 빼고 임시정부의 침체를 강조하여서,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가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 이승만을 탄핵하였다'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서술을 하고 있다.
3.1운동을 통하여 독립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였으니, 이제는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역량을 기르고 외교활동을 통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 독립을 하자는 새로운 전략이 제기되었다→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이 하나의 틀에서 함께 이루어졌다는 듯이 언급하고 있는데,말도 안되는 조합이다. 특히 3.1운동 이후에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은 외교독립론보다는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지침에 더 큰 영향을 받았었다.
윌슨 : 미국의 28대 대통령으로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교수이기도 하였다.→ 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독립운동의 한 축으로 격상시켰는지(즉 이승만 띄우기)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이것도 잘못되었다. 우드로 윌슨은 이승만의 학위 논문 제출 당시 총장이었을 뿐, 지도교수는 아니었다. 어느 대학교 총장이 모든 학위 논문의 첨삭지도를 하는가? C학점을 준적은 있다.
이승만은 국제연맹회의에서 만주지역 한국인들의 삶을 추적한 저서인 '만주의 한국인'을 제출하여→ 만주에는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이승만이 무슨 수로 만주지역 한국인의 삶을 추적하는 저서를 쓰겠는가? 저 글은 리튼 보고서를 발췌한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이런 세부적인 내용을 왜 교과서에 실어야 되냐?
이승만은 당시에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방송을 함으로써 국민들과 더욱 친밀하게 되었고, 광복후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이승만어천가. 애초에 이승만은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한국내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라면 국내에 머물고 있었던 여운형(33%)이지 이승만(21%)이 아니었다.[29] 이승만이 방송한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은 듣는 것만으로 체포될 수 있는 문제인데다 애초에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민적 영웅 운운은 애초에 교과서에 실을 수 있는 표현도 아니다. 이순신에 대해서도 교과서에서는 국민적 영웅 이야기는 안한다. 물론 이승만이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도 당수를 요청하며 접근할 만큼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었던건 사실이다. 그러나 김일성도 그런 인지도는 높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대 들어서 국제 사회로부터 승인을 받으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승인 획득 운동의 주역은 이승만이었다.→ 1940년대 임시 정부 승인이 논란이 되었고, 임시정부를 승인하려고했던 주요국가는 중화민국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임시정부 승인운동을 주도한 것은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이다. 반면 이승만이 거주하던 미국의 경우는 미군정이 이후에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점령군의 위치를 유지한 것처럼 승인운동? 그런거 신경도 안 썼다. 이 교과서에서 임시정부 승인운동을 다룬 항목에서 이승만은 자그만치 독자적인 항목("이승만의 임시정부승인획득운동")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수시로 등장한다. 이 본문이 있는 페이지(293P)에만 이승만의 이름은 9번이나 등장한다. 기승전승만
1943년의 카이로 선언과 OSS 부대와 한국 광복군의 협력 등은 ... (이승만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즉각적 독립을 주장한 것은 중국의 장제스이다.[30] 당연히 장제스에 영향을 준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이 아니라, 충칭의 김구, 조소앙, 김규식 (어쩌면 윤봉길의 의거)등이다.한편 이승만은 OSS와 연줄이 있었고, 임시정부와의 연결통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OSS 부책임자였던 굿펠로와 호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OSS 대원들에 한국인들을 추천하는등 여러 활동을 했다. 다만 그가 혼자서 다했다고 볼수는 없다.
일제시기 고등 교육기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일제와의 협력도 필요하였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고등교육을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의 의미가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전형적인 친일파 물타기 논리. 더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총독부가 어떻게 했더라?
우리민족에 의한 전문교육기관 설립에 명륜전문학교를 포함→ 명륜전문학교는 조선총독부가 성균관을 접수한 후 개명하여 설치한 경학원, 경학원에서 설립한 명륜학원에서 다시 명륜전문학교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후신인 학교에서도 이걸 인정한다. 조선총독부 관련 이야기만 빼고.[31]
레닌의 피압박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지원은 국제 공산당 운동에서 러시아 공산당이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하여 지도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서유럽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본문에서 러시아 공산당은 코민테른으로 바꿔야 하며, 코민테른 대신에 러시아 공산당을 쓰는 것은 UN 대신에 미국 공화당을 사용하는 것 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공산주의 운동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나 사실 왜곡 측면이 매우 크다. 여하간 레닌이 분량상 강조가 되긴 했네
1920년에 결성된 조선청년연합회의 장덕수의 그른→ 해당 글은 장덕수의 글이 아니라 조우의 기사로, 전혀 다른 사람의 글을 읽게 하고 사료해석까지 시키고 있다. 애초에 단체명칭도 조선청년연합회가 아니라 조선청년회연합회이다. 교학사 교과서에는 장덕수의 활동을 조선청년회연합회 활동과 동아일보 주필경략만 강조하고, 친일경력은 누락하고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신간회의 지원활동에 힘입어 전국적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이것 역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다. 신간회가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여서 항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광주학생운동의 발발과 확산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현재는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와 사회주의계 단체의 영향력이 강조되는 입장이지만, 여기서는 신간회의 활동을 강조하느라 이걸 모두 신간회의 공로로 돌리고 있다.
코민테르에서도 노선이 전환되어서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파기와 독자적 운동을 지시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였다. 결국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신간회 해소의 이유를 코민테른의 지시로 돌리고 있다. (이는 과거 금성교과서 등에서도 나왔던 부분임.) 실제로 신간회가 해소된 이유는 광주학생운동 이후에 신간회의 지도부의 붕괴에 있다. 허헌 등이 체포된 이후에 지도부가 된 집행위원장 김병로는 좌파와 (물리적 충돌수준으로) 대립했던 송진우나 최린 등 훗날의 자치론자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32]. 이는 신간회의 강령인 일체의 기회주의를 배격하고라는 부분에 배치되는 측면이라고 여겨져 사회주의자들이 반대했다. 이 때문에 신간회는 해소후 재창당이라는 목적으로 일단 해소되는데, 이 과정에서 반대한 주류가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민족주의자들이다. 교학사에서는 최린 등을 이 시기의 민족주의자를 대표한다고 보고 싶은 것일까?[33]
이병도와 손진태 등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는 실증 사학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풍을 세웠고, 이들의 역사연구는 일제 식민 사학을 배격하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병도의 실증사학을 한 순간에 민족주의 사학으로 만드는 서술이다. 이병도의 실증사학은 민족주의 사학과의 관계가 오히려 적다.[34]
주제열기 - (1930년대 명동거리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시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명동 거리의 생활 모습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 왔을까?→ 식민통치를 긍정하고 미화할 우려가 큰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시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고? 더구나 명동은 일본인 거리였는데?
이에 일제는 곤궁해진 농민을 무마하기 위해서 자작농 육성을 목표로 하는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 일제도 자작농지 설정사업을 강화하여 지주에게 소작지를 팔도록 강요하기도 하여 지주제도 쇠퇴하였다. ...(박스 자작 농지 설정 사업은) 총독부가 종전의 소작제도 개선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소작농 1 가구당 5단보의 농지를 소유하도록 저리의 정책자금을 대출하여 자작농을 육성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총독부의 농촌진흥책을 자작농 육성사업인 것처럼 왜곡해서 그 의도와 내용을 미화하고 있다.
경성의 경우 한국인들은 청계천 이북의 북촌과 마포 등을 중심으로 거주하였던 반면에, 일본인들은 청계천 이남의 남촌과 용산 등에 거주하였다. 즉, 한국인들을 내쫓은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신시가지를 조성하였다.→ 일본인들의 침략이 별 것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대목.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하고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각급학교에서 황국 신민화 정책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고, 일반인들도 징용이나 징병에 응해야 했다.→ 강제로 수탈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다라는 식으로 수동적 인정을 더하면서 일제의 수탈을 약화시켰고, 동시에 친일파의 논리인 당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다른 계층을 통해서 되풀이하고 있다.
현지 위안부와 달리 한국인 위안부는 전선의 변경으로 일본군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249페이지에 나와있는 서술. 끌려갔다는 서술을 단순히 따라다녔다는 서술로 바꿈으로써 위안부를 단순히 창녀라 폄하한 것도 폄하한 것이지만, 만약 현지 위안부가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같이 끌려가지 않았다는 저 설득력 없는 서술이 진짜 거짓이라면 외교적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다! 추가로, 저 '한국인 위안부' 용어도 일본측의 용어인 '조선인 위안부'에서 고쳐진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해양 국가인 일본은 일찍부터 해양 개척에 노력하였다. 서구 열강의 동북아시아 진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일본은 국력을 신장시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중략)... 1896년에는 일본에서 1.800km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미나미토리시마에 개척단을 파견하여 1898년 자국 영토로 선포하였다. 1922년에는 일본의 최남단 섬 오키노토리시마에 측량선을 보냈다가 1931년 영토로 편입하였다.참고로, 오키노토리시마는 일본에서만 영토로 주장할뿐, 전세계적으로 암초로 섬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히 일본측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격. 도리어 오키노토리시마를 왜 일본이 섬으로 만들려고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 정체성 또한 의심되는 노릇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