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읽을거리 : [일본 극우]일본 우파의 사상적 뿌리는 '고구하쿠(國學)'.

mugan 작성일 14.02.10 16: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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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필두로 하는 일본 우파가 발호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핑계는 일본을 정상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파들의 정상국가론은 알고 보면 정상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정상은 일본은 신의 후예인 천황을 중심으로 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나라이므로 전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들 일본 우파의 뇌리를 지배하는 사상은 따져 올라가 보면 이른바 ‘고구하쿠(國學·국학)’이다.

 

일본인의 대외관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일본은 에도막부 초기에는 조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將軍)직을 맡은 도쿠가와 집안이 자신의 권력을 조기에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이웃나라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린(交隣)을 통해 조선의 선진 문물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도 부차적 이유였다.

 

18세기 후반~19세기 초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불교와 유교가 전해지기 이전, 일본 고유의 정신과 문물인 ‘국학’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국수주의는 어느 나라든 있지만 도가 지나치면 반드시 이웃나라에 재앙을 초래했는데 일본의 경우가 그러했다.

 

◇ “일본이 진정한 아시아의 중심 ‘中國’”이라고 주장

 

국학의 싹은 17세기 후반에 나타났다. 에도시대 초기의 양명학자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1619~1691)은 일본 시조신 아마테라스 오가미(天照大神)와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 베푼 은혜를 근거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으로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유학자이자 병법가였던 야마가 소코(山鹿素行·1622~1685)는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아시아의 중심인 ‘중국(中國)’이라며 일본은 중국·조선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조선과 중국은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일본 천황의 혈통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으므로 일본이 가장 안정되고 중심이 잘 잡힌 나라라는 게 근거였다.

 

일본인의 중국에 대한 멸시는 점점 심해져 네덜란드의 선진 학문을 연구하는 일본의 난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중국을 ‘지나(支那·일본 발음은 ‘시나’)’라는 이칭(異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도시대 후기의 난학자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澤·1757~1827)는 ‘중국’이라는 표현이 ‘서양에서 지금의 청나라 땅에 붙인 이름’이라 지적하고 대신 ‘지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은 중국을 아예 지나라고 부른다. 중국인은 지나인, 중국어는 지나어로 바꿨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국학은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국학의 태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는 일본 옛 문헌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면서 삼한이 일본에 대한 조공국이었고 진구(神功·신공) 황후는 신의 계시를 받아 삼한을 토벌했다고 저술했다.

 

이 대목은 동아시아 역사학계에서 거짓으로 판명된 바 있다. 모토오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신의 뜻이라고 정당화했다. 모토오리의 이런 주장은 나중에 정한론(征韓論)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국학자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1776~ 1843)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했다. 신국은 신주(神州)로도 불렸다. 신국 이데올로기는 20세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구호로 채택했던 ‘팔굉일우(八紘一宇·핫코이치우·전 세계가 하나의 집)’ ‘신주불멸(神州不滅·신슈후메쓰)’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국학자들의 사상은 점점 과대망상으로 전개된다.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1769~1850)는 일본은 세계에서 맨 먼저 땅이 생긴 나라로서 ‘세계 만국의 표본’이므로 전 세계를 모두 일본의 군현(郡縣)으로 만들어 만국의 군장들을 모두 일본의 신복(臣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 제패의 방법은 약하고 점령하기 쉬운 나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며 만주를 발판으로 몽골, 조선, 중국, 남방제도 등을 공략하라고 역설했다. 또한 조선은 오키(隱岐)섬과 울릉도, 대마도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동쪽과 남쪽 두 방향에서 공략하면 삼켜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깔끔해 보이는 일본인들 이면의 ‘괴물’

 

막부(幕府) 말의 혁명가로 메이지 정부 실세들을 대거 제자로 배출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은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을 강력하게 주장해 한국에 결정적 해악을 끼쳤다. 그는 일본이 일본다운 이유를 ‘국체(國體)’에서 찾았다. 일본의 독자성을 중국과 대비하여 역성(易姓)혁명의 중국과 만세일계의 일본, ‘천하는 천하의 천하’인 중국과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인 일본, ‘인민이 있은 후에 천하가 있다’는 중국과 ‘신성(神聖)이 있고 백성이 있다’의 일본으로 대비했다.

 

이걸 근거로 중국에서 신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찾아다니는 ‘반년마다 옮겨다니는 노비’와 같은 데 비해 일본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신(家臣)으로 절대적인 군신관계에 있다고 보았고, 이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또 국체로 말하자면 국체가 잘 드러난 천황 친정시기인 고대에는 한반도의 국가들이 천황에게 조공했다고 생각했고 일본의 국체가 쇠퇴함에 따라 한반도 국가들이 오만해졌다고 여겼다. 진구 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황도(皇道)를 아주 명백히 해서 국위를 드높인 사람’으로 ‘신주의 광휘(光輝)’라 할 만하다고 칭송했다.

 

즉 요시다 쇼인에게 한국 침략은 단순히 구미 제국에 빼앗긴 이권을 되찾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본래 모습, 즉 국체의 불가결한 일환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한론은 일본인의 지상과제이며, 이 국체론에 의해 이념화한 한국 침략론이 바로 정한론이고, 이를 아시아까지 확장한 것이 바로 대동아 공영론인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그 말을 실행했다. 논리는 대동아 공영론이었다. 그 밑에는 국학이 있었다. 정한론은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 등과 그들의 후예에 의해 실현됐다.

 

국학파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점점 소수가 됐다. 에도시대 후기의 고증학자 도 데이칸(藤貞幹·1732~1797)은 저서 ‘충구발(衝口發)’에서 일본의 황통이나 언어의 대부분이 조선에서 전래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저서 ‘겸광인(鉗狂人)’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고대 조선의 나라들 대부분은 일본에 복속되어 있었고 언어뿐만 아니라 의복·기재(器材)·풍속도 일본에서 조선으로 옮겨간 것이 많았다. 그것을 반대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옮겨갔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일본인의 동아시아관이 어떠했는지는 계몽주의자를 자처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를 봐도 극명히 드러난다. 후쿠자와는 1875년에 쓴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에서 노골적으로 중국을 경멸했다. “지나인은 사상이 빈곤하지만 일본인은 사상이 풍부하다. 지나인은 하는 일이 별로 없지만 일본인은 일을 많이 한다. 지나는 황제 정부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지만 일본은 무사권력이 왕조를 견제해 왔다. 즉 지나는 일원적 정치였지만, 일본은 이원적이다. 이러한 것으로 문명을 이야기하자면, 지나는 한번 크게 변하지 않으면 일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얼핏 보면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깔끔해 보이는 일본인들의 이면에는 이런 괴물과 같은 사고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1차출처 :20130802 조선일보 주간조선

2차출처 [일본 극우]일본 우파의 사상적 뿌리는 '고구하쿠(國學)' 圭_|작성자 쌈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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