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군대에 보내던 날의 박정희 일기

이밥에고깃국 작성일 14.04.15 0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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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대통령 아들 志晩(지만)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1977년 1월 30일. 朴 대통령이 쓴 일기장에는 이날 前後(전후)의 4일간이 모두 아들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1977 년 1월 29일(土) 맑음. 지만이가 내일 육사에 가입교하게 되어 저녁 만찬을 들며 육사 이야기를 하면서 격려하다. 이제 19세 고교 졸업생이라고 하지만 아직 집을 떠나 혼자 客地(객지)생활을 한 경험이 없어서 애처롭기도 하고 불안스러운 생각도 들지만 이제부터는 국군의 장교가 되려고 하는 남아의 出關(출관)이기에 부모의 자정에 쏠리는 표시는 하지 않아야지 하고 호쾌한 나의 경험담들도 들려주면서 약한 마음을 먹지 않도록 애썼다. 낮에는 국립묘지에 참배하고 왔다기에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이 없더냐고 농담을 했다. 자식을 길러 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는 옛말이 새삼 실감 있게 느껴졌다.
  
  1940년 3월 하순 어느 날, 쌀쌀한 봄바람이 옷자락으로 스며드는 고향 구미역 북행선 플랫폼에서 멀리 이국땅 북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하여 북행열차를 타고 떠나는 나를 전송하기 위해 칠순 노구의 어머니께서 나오셔서 나의 옷자락을 붙잡으시며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고 하느냐” 하시며 老眼(노안)에 눈물을 흘리시던 그 모습이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고 어머님의 흰옷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흔드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완연하다. 그날 어머님의 심정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하셨을까. 어머님 너무나 불효막심하였습니다. 이제 용서를 빌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1977년 1월 30일(日). 6시 반경 기상, 7시에 지만이를 깨우다. 영하 14, 15도의 혹한이다. 8시 반 지만이와 조반을 들다. 지만이는 아침에 육사생도 규정대로 짧게 이발을 했다. 식탁에 앉으면서 ‘머리를 깎고 나니 이제 정말 집을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육사와 같은 훌륭한 학교에 가는데 사나이 대장부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찌하느냐’ 하고 타이르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여 간신히 참고 태연한 체하였으나 이 자리에 저희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나도 몹시 마음이 언짢았다. 저것이 저희 어머니 생각이 나서 저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참을 길이 없었다.
  
  9시 20분 청와대를 출발하다.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청와대의 많은 직원들이 현관에 나와서 전송을 해 주었다. 지만이와 한 차에 타고 태릉 육사로 가면서 차 안에서 지만이와 여러 가지 환담을 하면서 격려를 했다. 창밖의 날씨가 매섭게 차기만 하다. 이 추운 날씨에 지만이가 훈련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육사 2期(기) 시절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육사 본관 현관에서 지만이를 내려 주고 ‘몸 건강히 열심히 잘해, 지만이!’하고 신입생 접수장으로 보내고 육사 교장실에 들어가서 교장 `鄭昇和(정승화) 장군과 잠시 환담하다가 歸邸(귀저)하다. 집에 돌아와 아내 영정 앞에 가서 ‘지만이가 오늘 육사에 들어갔소. 내가 지금 데려다 주고 돌아왔소. 당신께서 앞으로 지만이를 보살펴 주시오’라고 고하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란 왜 이다지도 약할까. 오전 중에 지만이 방을 정돈했다. 온 집안이 텅 빈 듯하다. 군에 자식을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다 마찬가지리라.>
  
  <1977년 1월 31일(月). 기침하니 날씨가 매우 차다. 아침 늦잠 잔다고 늘 잔소리를 듣던 지만이가 오늘 아침부터는 6시에 일어나서 혹한 속에 육사 교정을 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군인으로서 병영생활의 첫 아침, 한파 속에서 추위와 싸우며 청운의 大志(대지)를 펴기 위하여 의지를 불태우는 홍안 19세의 젊은 사관생도(물론 아직 정식 입교는 하지 않았으나). 장하다, 우리 지만이. 在天(재천)의 너의 어머니는 더없이 기뻐하시리라.>
  
  <1977 년 2월 1일(火). 오후에 육사교장 鄭 중장이 내방하여 입교한 지만이의 동향과 교육받는 자세를 들었다. 매우 명랑하고 식사도 잘하여 동료들과 똑같이 열심히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무한히 기뻤다. 이날 아침에 태릉 부근은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는데 기상 후 2km의 구보를 했다고 한다. 염려하던 발도 이상이 없는 듯 낙오하지 않고 같이 뛰었다니 기쁘기 한이 없다.>
  
  〈1977 년 2월 22일. 지만이로부터 편지가 왔다. 사관학교에서 처음 보내온 편지다. 반갑기 한이 없다. 깨알 같은 지만이의 독특한 필체로 육사용지에 1매.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시켜서 처음 받아 보는 편지이다.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지만이가 이만큼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대견하기만 했다. ‘학과 출장시 꼭 보게 되는 <내 생명 조국을 위하여>라는 아버지의 휘호를 보면 가슴이 뭉클하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이상한 감정이 듭니다(中略).’ 편지를 아내 영정 앞에 가져다 놓고 ‘지만이에게서 편지가 왔소’ 하고 고하다.>
  
  <1977년 8월 8일. 지만이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엄격하고도 규칙적인 군대생활을 하게 되니 군인의 사명이 무엇이란 것을 점차 깨닫게 되고 조국이 무엇이란 것을 어슴프레 하게나마 알게 되고 조국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땀 흘리며 받는 이 훈련이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흘리는 땀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 그 훈련이 하나도 괴롭거나 고생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보람과 희열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땅에 엎드려 조국의 흙냄새를 맡으며 자신을 돌이켜 보고 휴식시간에 철모를 벗고 땀방울을 손으로 쓱 문질러 먼 산을 바라보면 조국의 산천이 다정히 반겨 줍니다. 책임감이 얼마나 인간을 부지런하게 하는지 배웠습니다.’ 지만이 편지의 한 구절이다.>
  
  <1977년 8월 28일. 지만이가 7개월 만에 휴가로 집에 돌아왔다. 근영이가 차를 가지고 가서 같이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12시 반경 집에 도착했다. 맹훈련으로 검게 타고 체중이 3kg이나 줄었다고 하니 건강하여 무엇보다도 기쁘다. 오늘은 지만이가 돌아와서 집안에 활기가 넘쳐흐른다. ‘집이 이렇게도 좋은 곳인지 몰랐다’며 지만이는 즐겁기 한이 없다. 저녁시간에는 웃음과 화제가 그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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