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환풍기 청소까지 국정원이 지시?
세월호 객실 증설공사 끝 무렵 작성된 ‘국정원 지시사항’
<두달 동안 바닷물에 잠겼다가 건져 올려진 청해진 직원의 업무용 노트북>
지난날 23일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노트북과 디지털영상저장장치가 발견됐다.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가 두달 만에 발견된 것으로 청해진 직원의 것으로 추정된다. 증거물 보전신청을 해놓았던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 측에 의해 노트북이 복원됐다.
세월호 객실 증설공사 끝 무렵 작성된 ‘국정원 지시사항’
가족대책위는 25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세월호에서 발견된 노프북을 복원한 결과 국정원이 세월호 구입, 증개축, 운항, 관리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있다”며 한글문건을 공개했다. 2013년 2월27일 작성된 문건의 제목은 ‘선내 여객구역 작업 예정 사항’. ‘국정원 지적사항’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문건이 작성된 시점은 청해진해운이 일본 마루에이 페리사로부터 퇴역 선박을 매입(2012년 10월)해 개보수 작업을 포함한 객실 증설 공사를 마무리할 무렵이었다. 세월호의 ‘인천-제주’ 간 첫 출항이 2013년 3월 15일이니 출항 20일 전에 작성된 것이다.
이 문건에는 ‘칸막이 도색작업’ ‘자판기 설치’ ‘분리수거함 위치선정’ ‘타일 교체’ ‘CCTV 추가 설치’ ‘환풍기 청소’ 등 100여건에 달하는 작업 내용이 적혀 있다. ‘국정원 지시사항’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으니 이런 작업을 지시한 곳이 국정원이라는 말이 된다.
휴가계획, 작업수당 보고가 ‘보안측정’?
가족대책위는 “국정원이 세월호 실소유주이거나 운항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국정원은“국토해양부(해양수산부) 요청으로 세월호를 국가보호장비로 지정하기 위한 ‘보안측정’을 지난해 실시했을 뿐”이라며 가족대책위의 주장을 일축한다.
국정원은 세월호를 전쟁, 테러 등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대상으로 지정하기 위해 보안점검을 실시한 뒤 미비점에 대한 개선을 지시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해명과 문건의 내용은 크게 동떨어진다. 문건 내용은 첫 출항에 박차를 가하던 책임자가 직원들에게 내린 보완작업 지시서 성격이 강하다.
가족대책위는 “세월호 실소유주는 국정원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문건에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는 게 아님을 말해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3월 휴가계획서 작성 제출’ ‘2월 선용품 사용현황 제출’ ‘2월 작업수당 보고서 작성’ 등의 지시 항목이 눈에 띤다. 경영자 아니면 이런 지시를 할 권한도 없다. 국정원이 주장하는 보안점검과는 전혀 다른 카테고리다.
경영자-공사책임자가 내릴 지시를 왜 국정원이?
경영자나 개보수 공사책임자가 내릴 수 있는 지시인데도 국정원은 보안측정이 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설득력 있는 해명 없이 “도색작업, 자판기 설치, 타일 교체, 직원 휴가 계획 제출 등은 국정원 보안측정 대상이 아니다”라는 극히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국정원 지시 사항을 정리한 문건이 나왔는데도 딴소리다.
문건에 적시된 대로 국정원이 직원 휴가, 작업수당, 용품 사용현황 관련 보고서를 요구할 정도로 운영에 깊이 관여한 게 맞다면 “세월호 실소유주는 국정원이 아닌가”라는 가족대책위의 항변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뿐이랴. 국정원이 세월호와 각별한 관계임을 뒷받침해 주는 정황이 한두 가지 아니다.
국내 대형선박(1000톤 이상) 중 세월호만 유일하게 해양사고가 발생할 경우 국정원에 보고하게 돼 있다.왜 그럴까. 세월호를 제외한 16개 선박은 국정원 보고 의무가 없다.
국가보호장비 지정에도 세월호만 ‘특별대우’를 받았다. 국정원은 “일정 규모 이상(2000톤) 이상의 선박·항공기는 비상사태시 적의 공격으로부터 우선 보호하기 위해 보안 측정을 통해 국가보호장비로 지정한다”며 세월호가 지정된 것도 이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별한 관계 뒷받침해주는 정황들
거짓 해명이다. 세월호(총톤수 6825톤, 전장 145m, 최대정원 921명)보다 몇 배 큰 씨스타크루즈호(총톤수24000톤, 전장 185m, 최대정원 1935/목포-제주 운항)는 국가보호장비로 지정돼 있지 않다. 당연히 지정돼야 할 선박은 빠지고 세월호가 지정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세월호 취항 직전에 보안측정 조사를 실시한 사실을 국정조사 기관보고에 누락시켰다. 첫 출항 직전 세월호의 상태를 면밀히 확인한 데이터라면 이 정보는 세월호 진상조사에도 유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입을 닫고 이 사실을 숨긴 이유가 뭘까.
규정도 지키지 않았다. 보안업무규정에 의하면 국가보호장비가 파손될 경우 국정원이 ‘전말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런데도 세월호 침몰 100일이 넘도록 이 규정에 의한 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 국가보호장비가 침몰해 회복 불능의 손상을 입은 사고다. 전말조사도 하지 않는 건 일종의 직무유기다.
정부는 세월호 증개축을 유병언이 지지했을 거라는 추측만으로 ‘세월호 실소유주는 유병언’이라고 주장해왔다. 유병언이 증개축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물론 관여한 정황도 없다. 그러면서도 실소유주로 단정했고 박 대통령은 그를 ‘살인마’라고 불렀다.
국정원은 세월호 경영에 관여할 위치에 있었다?
가족대책위가 공개한 문건이 청해진 직원에 의해 작성된 게 맞다면 이 문건은 세월호 증개축에 국정원이 관여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정부는 이 증거물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세월호는 1994년 일본에서 건조돼 2012년까지 규슈 남부에서 18년 동안 운항됐다. 여객선 수명이 15년 안팎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미 수명 다한 선박을 사들여 적당히 개보수를 해 사용하다 사고를 낸 것이다. 정부는 개보수를 마치자 사용기간을 2018년까지 연장해 줬다.
청해진해운은 산업은행으로부터 100억원을 대출해 배를 샀다. 사용연한이 다 된 선박을 구입하고 무리한 개보수를 진행하는데 드는 비용(146억원)의 2/3를 대출로 충당한 것이다. 의혹이 제기될 만 하다. 이것 또한 국정원-세월호 관계와 연관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