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문 고치던 노인 (펌)

똘츄No3 작성일 16.12.28 00: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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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 고치던 노인

벌써 3년 전이다. 내가 갓 대선을 이긴 지 얼마 안 돼서 삼성동에 살 때다. 청와대 들렀다 가는 길에, 최순실 선생님을 알현하기 위해 강남에서 일단 차를 내려야 했다. 강남의 고급 빌라에 앉아서 연설문을 고쳐 주는 그분이 계셨다. 연설문을 하나 고쳐 가지고 가려고 '빨간펜' 부탁을 했다. 값을 몇십억 단위로 굉장히 비싸게 부르시는 것 같았다.

"기업들에게서 강제모금하게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없겠나요?"

했더니,

"연설문 하나 가지고 새누리하겠니? 비싸거든 다른 데 가 해."

최선생님의 말씀은 거역할 수 없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고쳐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분은 잠자코 열심히 빨간펜을 굴리고 계셨다. 처음에는 빨리 고치시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고치고 계셨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말을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시크릿가든>이 방영할 시간이 빠듯해 왔다. 오늘밤 현빈 얼굴을 못 볼 생각을 하니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최 선생님…… 연설문에서 말해야 할 것이 그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도 에너지를 분산시키기에 이미 충분하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뜯을 만큼 뜯어야 돈이 모이지, 생돈이 재촉한다고 거금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표준어가 막 튀어나오며,

"연설할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바꿔요? 선생님, 제발이에요. 드라마시간이 없다니까요."

선생님은 퉁명스럽게,

"그럼 다른 데 가서 해. 난 안 해줄거야."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드라마 보기는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고쳐 보세요."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손보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빨간펜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테블릿 PC로 셀카를 찍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연설문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연설문이다.

본방을 놓치고 재방으로 가야 하는 나는 속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빨간팬을 해 가지고 의뢰가 들어올 턱이 없다. 내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드라마(drama)도 못 보게하고 불친절하고 나쁜 사람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선생님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위대한 도둑다워 보였다. 느끼한 눈매와 팔자주름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선생님에 대한 나쁜 감정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돌아와서 연설문을 내놨더니 환관 내시들은 이쁘게 바꿨다 야단이다. 전문 비서가 쓴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 내시의 설명을 들어 보니, 연설문을 너무 인간의 언어로 쓰면 내 닭 두뇌 용량이 처리하기가 벅차서 잘 읽지를 못하고, 너무 우주의 기운을 담으면 우매한 개돼지들이 이해하지 못한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최순실 선생님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우리 아빠 때는 나쁘고 불순한 사람이 나오면 물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곧 뜨거운 인두로 지지면 그런 사람이 다시 잘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요새는 불순한 사람이 한 번 선동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사람을 다룰 때, 질 좋은 물수건을 잘 적셔서 얼굴을 흠뻑 덮은 뒤에 물을 부어 조진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떼준다. 이것을 물 고문(拷問)한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대통령마저도 법을 신경써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일이 견고하지가 못하다. 뭘 조금 하기만하면 야당 빨갱이놈들이 찾아서 의혹을 제기한다.

공작(工作)만 해도 그러다. 옛날에는 빨갱이들을 잡으면 아랫 것은 며칠, 윗놈은 며칠, 고문 일수로 구별했고, 인혁당(革命黨)같은 것은 공작하는 시간이 몇 배나 걸렸다,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까지 변조한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증거는 모조리 인멸해서 다섯 번을 쳤는지 열 번을 쳤는지 증명할 수가 없었다. 단지 말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 의혹이다. 지금은 그런 장인정신이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깔끔히 증거를 인멸하고, 또 그것을 감시하고 처리해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그 위대한 지도자 앞에서, 공작을 하는 그 순간만은 오직 누군가를 깔끔히 잡아 족친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권력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다같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만들어 냈다.

이 연설문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18대, 19대를 넘어 이어질 최순실-박근혜 공화국의 무궁한 영광에 기여한다는 장인 정신으로. 나는 우리 최순실 선생님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연설문따위 때문에 중요한 드라마를 볼 수 없잖아." 하던 말은 "그런 분께서 마음껏 힘을 휘두르지 못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훌륭한 권력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선생님을 찾아가서 미르에 K스포츠재단이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순실 선생님을 찾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앉았던 자리에 선생님은 있지 아니했다. 압수수색 당한 선생님의 강남 빌라에서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분했다. 내 마음은 이 비참한 사단에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다음해 열릴 평창 동계올림픽을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 진행되는 개발 끝으로 돈다발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최순실 선생님이 저걸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연설문을 고치다가 유연히 올림픽에 걸린 몇십조원을 바라보던 선생님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대한민국은 (對寒民國恩) 제정사회다 (諸丁士會多)!" 박공주헌정시(朴公主獻呈詩)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늬우스에 들어가보니 이정현이가 비박계를 물어뜯고 있었다. 전에 비박, 친이를 공천으로 쿵쿵 두들겨서 쫓아냈던 생각이 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나를 여왕처럼 찬양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통일대박(統一大舶)이니 준비된여성대통령(準備之女性大統領)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하야하라는 소리에 덮여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아무것도 상관없다. 국정도 상관없다. 내가 충분히 숨기지 못해 이렇게 된 이상 모든 일이 그냥 빨리 끝나고 마음껏 드라마나 봤으면 좋겠다. 다만 40년 동안 나만 보살펴준 착한 최순실 선생님이 그립다. 

 

출처 : 고려대 대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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