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홍준표후보 대구대첩

쥐새도 작성일 17.04.27 10: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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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통령후보는 4. 26(수), 대구 서문시장에서 개최된 대구 지역 거점유세 자유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대구 대첩에 참석했다.


홍준표 후보의 서문시장 유세에는 수많은 유권자들로 서문 시장을 가득 메워 대구대첩의 한 역사를 장식했다. 이곳 서문시장은 홍준표 후보의 정신적 고향이다.

이곳에서 홍준표 후보의 어머니가 좌판을 놓고 미나리 등 나물을 팔았다. 출마선언 후 벌써 5번째 방문이다. 오늘 서문시장 유세에서는 다른 때와 달리 국민의례를 했다.

홍준표 후보의 선창에 시민들은 같이 애국가를 부르며 감격해 했다. 서문시장 노점에서 목기와 제기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무대에 올라 후보와 포옹하였고 홍준표 후보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할머니 목에 감아 드렸다. 홍준표 후보가 어렵고 힘들었던 가족사를 얘기할 때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목이 메었다.

마지막으로 홍준표 후보는 "조선소 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이 한번 됩시다. 까막눈 엄마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합시다"라고 외치며 유세를 마무리 하였다.

존경하는 대구 시민여러분, 오늘 사실 유세로는 두 번째다. 다섯 번째 서문시장 온다. 제가 어제부로 TV토론을 하고, 오늘 아침에도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창녕 남지에서 태어났다. 7살 때 우리 집안이 망해서 리어카 끌고 이틀 걸어서 대구 신천동으로 왔다. 신천동에서 신천초등학교 다녔다.

그때는 동사무소 다니면서 미군 구호물자 강냉이죽 그것을 타다가 먹고 살았다. 그 이듬해 신암초등학교로 갔다. 신암동으로 왜 옮겨갔냐면, 저희 아버지가 대구로 올라와서 막노동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신암초등학교 3학년을 다녔다. 그때 제 기억으로 신암초등학교 3학년 21반이었다. 그 당시에 27반까지 있었다.

신암초등학교 1년 다니다가 도시에서 막노동하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리어카에 짐을 싣고 이틀 걸어서 창녕읍으로 갔다. 거기서 창녕초등학교 4학년 다니다가, 또 리어카 끌고 합천 산골로 들어갔다.

거기서 5학년, 6학년 다니고 아버지에게 “아무래도 우리가 살 길은 이렇게 빚에 쪼들리고 매일 굶고 이렇게 사는 것보다 공부라도 열심히 하겠다.”고 했더니 보리쌀 두말 줘서 그것을 가지고 대구로 올라왔다.

내당동에서 영남중학교 다녔다. 마침 공부는 잘해서 그 당시 공납금을 안냈다. 석 달에 1,650원으로 기억하는데, 공납금을 그것 안내는 맛을 작은누나는 올라와서 섬유공장에 다니면서 제 공부시켜주고 자취했다.

6년 동안 대구 내당동에서 살다가 그다음 비산동에 갔다가 대명동에 갔다가 남산동에 갔다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비산동에 살 때는 사보이극장 뒤에서 살았다. 지금 사보이극장 없지 않나.

제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 당시 문과, 이과 나눠서 공부했는데 이과로 갔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가면 의사 워낙 돈도 많이 벌고 의사하면 존경도 받는다 싶어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가고 싶었다. 갈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우리 영남고에서 그 당시에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갈려고 하면 하늘에 별따기다. 지금은 학교가 아주 좋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아버지가 육군사관학교를 가라고 했다. 줄 돈도 없는데 등록금이 없다고, 육군사관학교 시험쳐서 합격했다. 합격했는데 그 해 12월 되어서 우리 아버지가 도둑 누명을 썼다.

비료를 훔친 사람으로부터 장물취득 누명을 써 경찰에게 붙잡혀가서 이틀을 고생한 것을 보고 경찰보다 더 높은 직업이 무엇이냐고 보니까 검사를 하면 경찰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육사 안간다. 검사를 해야겠다.’고 해서 고려대 법과대 가려고, 그때는 이과에서 문과가기 하늘의 별따기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에게 가서 원서를 써달라고 하니까 선생님이 하는 말씀이 영남고에서 고려대 법과대학 간일이 없는데 육사되었으면 1년에 한, 두 명 되는데 거길 가지 그 학교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다. 설득해서 입학원서를 받아냈다.

그래서 25일 동안 문과공부해서 2월초 대학시험을 봤는데 그것이 덜컥 되어 버렸다. 대학시험 되니까 우리 아버지가 걱정이 태산이다. 그때 등록금이 56,000원이었다. 등록금이 없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이웃집에 일해서 돈을 빌린 것이 7만원을 빌렸다. 56,000원 등록금 주고 14000원 남은 돈으로 한 달 하숙비 주고 서울로 가라고 했다. 동대구역에서 밤기차 타고 서울 올라갔다. 올라가서 그때 18살이다.

그때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친척 없고 형제 없고 내 혼자 올라가서 공부하면서 지냈다. 합천에서 살다가, 내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정치이야기는 좀 더 있다가 하겠다. 정치이야기보다 홍준표 라이프스토리를 듣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서울 올라가서 고학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는데 합천 우리 집이 강변에 오두막살이 짓고 살았는데 뒷집사람이 자기 집에 불 질렀는데 자기 집은 안타고 우리 집에 옮겨 붙어 홀랑 다 탔다. 그러니까 살집이 없어졌다.

그때는 울산이 공업지대가 막 생기면서 굉장히 사람이 몰려들 때다. 울산으로 가자고해서 대학교 2학년 때 저는 고학을 하고 우리 집에 재산을 전부 파니까 74년도 돈으로 32만원이다. 그 32만원 가지고 울산에 가서 달셋방 하나 얻고 누나와 여동생은 공장에 다니고 저희 아버지 현대조선소에 밤에 야간경비원이 있다. 그때 현대조선소가 담이 없었다. 그냥 전하동 바닷가에 철조망 쳐 놓고 배 처음 지을 때다. 철근 떨어진 것을 사람들이 밤에 훔쳐간다고, 밤에 배짓다가 남은 철근을 지키는 백사장에서 야간경비원을 하는데 그때는 제 기억으로 전하동 바닷가 바람이 영하 18~20도 되었다. 추운데 회사에서 바람막이 하나를 안 해줬다. 백사장에 조그만 의자 하나 두고 밤새도록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쳐다보면서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우리 집은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힘들게 사냐.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 세상이 한 번 뒤집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도 잘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내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하며 살고 있는데 세상이 진짜 뒤집어 져봤으면 좋겠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 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제 아버지는 일당 800원 받던 경비원이다. 내 엄마는 글을 모른다. 까막눈이다. 경비원의 아들도, 까막눈의 어머니를 가진 아들도 열심히 노력하고 정말 바르게 살고 노력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세상이 대한민국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한다. 바르게 살았다. 내가 그렇게 힘들고 가난하고 밥 굶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았어도 삐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내 부모님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는 40년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20년 전에 돌아가셨다. 저를 낳은 것이 어머니는 39살 때, 아버지 41살 때 아들 하나 보려고 낳은 것이다. 늦게 낳다보니 저희 아버지 61살에 돌아가셨다. 전하동 바닷가에서 추운데 견디려고 회사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하루저녁에 막소주 한 병씩 마셨다고 한다. 먹다보니까 8개월인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대학교 2학년 때였다. 학생운동도 해봤고 세상을 뒤집어보자는 생각도 해봤다.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길로 학생운동 하는 것 발 끊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정말 세상이 불공평하고 어렵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나는 밑바닥부터 경험했다.

내 평생을 살면서 그 어렵게 살던 그 시절 잊지 않는다. 그래서 홍준표가 서민대통령이 한번 되어보겠다. 이 땅에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힘없고 빽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대통령이 한번 되어 보겠다고 나왔다.

제 각시가 제가 대학 다닐 때 군산여상을 나와서 국민은행 안암동지점의 행원이었다. 돈 찾으러 가다보니까 달덩이 같은 아가씨가 있어서 제가 200원, 300원 찾으러 매일 갔다. 넉 달 동안 아가씨 한 번 쳐다보려고. 하숙집에서 점심 먹고 올라갈 때 꼭 200~300원 찾아서 얼굴 한 번 보고 오려고 하고 넉 달 동안 올라가다가 그 해 사법시험이 연기되는 바람에 마음이 좀 풀려서, 안 그랬으면 제가 사법시험 일찍 됐을 것이다. 그래서 눈이 맞아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법시험은 5년 뒤에 된다. 제가 그거 아니었으면 일찍 되었을 텐데. 그런데 처음에 사법시험 되기 전에 졸업할 때 전라북도 부안으로 저희 장인을 찾아갔다. 장인어른이 인사를 받더니 30분 말을 시켜보더니 “부모님은 뭐하시나?”하셔서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울산에서 달세방 삽니다.” “집도 없냐?”하시니까 “집 없습니다.” “군대 갔다 왔냐?” 하시니까 “지금 가야합니다.” 그리고 “고시공부 하냐?” 하시길래 “합니다.” 그 이야기 하고 나왔는데 우리 집사람이 30분 더 있다가 나와 가지고 “너희 아버지 뭐라 카드노”이렇게 물어보니까 “저거 구름 잡는 놈이다, 저 택도 아닌 놈이다. 저게 사법시험되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극렬 반대를 했다. 저희 장모님은, “너희 엄마는 뭐라 카드노”하니까 “홍서방 참 착한 사람 같다. 그러니까 잘 좀 보살펴라.” 했다. “좋다, 내가 너희 아버지는 평생 안 본다.” 그래가지고 군대 갔다 와서 이제 사법시험 됐다. 되어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홍서방 사법시험 됐다고 하니까 그 때는 2차되면 사실 3차는 면접이었다. 그런데 신문에는 3차 되어야 나온다. 신문에 안 났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서 제가 합격하고 난 뒤에 부안에 찾아갔다. 찾아가서 “딸은 데리고 간다. 대신 제가 딸 절대 속 썩이지 않는다. 제가 공주처럼 모시고 살 거다. 대신 장인어른은 우리 집 오지마라.” 제가 26년간 못 오게 했다. 대신 장모는 깍듯이 모셨다. 용돈을 장모님께 드리면서 영감하고 같이 나눠 쓰면 그때부터 장모도 없다, 근데 장모님 임종할 때도 아들이 셋이지만 제가 했다. 그리고 장인 임종도 제가 했다.

저는 참 인생이 행복하다. 요즘 대통령 선거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두 아들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존경하는 인물란에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안 쓴다. 홍준표라고 쓴다. 진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 서른여섯이 됐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쓴다. 그래서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제 아들이 곧 결혼식을 하는데, 작년 9월에 둘째아들이 이제 결혼하기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제가 4월 29일 결혼식에 못 간다. 유세 때문에 못 간다. 그래서 영상편지 하나 띄워주고, 장가가서 잘 살아라하고 오늘 제가 내려왔다.

정말 제가 서민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걸은 것은 정말 이 땅의 70%에 달하는 대한민국 서민들을 위해서 5년 동안 홍준표가 서민들의 마음을 알고 서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걸 한 번 알고, 그리고 서민들을 위해서 이 나라를 한 번 이끌어보자는 그런 취지에서 제가 ‘서민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어젯밤에 JTBC에서 대선후보 토론회를 하는데 제가 문재인 후보에게 물었다. 당신 책을 보니,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의 132페이지에 이렇게 되어있다. ‘미국의 월남전 패배와 월남의 패망은 진실의 승리고 희열을 느꼈다.’ 이렇게 썼다. 그러면 그것이 공산주의가 이긴 전쟁이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거기서 5,000명이 죽었다. 그런데 그 전쟁, 월맹이 이긴 것이 그렇게 희열을 느꼈는가. 공산주의가 이긴 것에 희열을 느꼈냐고 하니 대답을 못한다.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했다. 앞에도 당선되면 북한에 제일 먼저 가겠다고 하고, 북한 개성공단에 2000만평 만들겠다고 했다. 개성공단 2,000만평 만들면 북한 청년일자리가 백만 개가 생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중 상당수가 다 넘어 가야 한다. 창원 국가산업단지의 3배에 해당하는 공장부지다.

북한에 그렇게 퍼주고 그렇게 하면 5년간 100억 달러를 북한에 주게 된다. DJ, 노무현 정부 때 10년 동안 준 게 70억 달러다. 8조 3천억 원이 된다. 그 돈을 줘서 그 돈이 핵이 되어 다 내려왔다. 그랬는데도 또 10년 뒤에 당신이 집권해서 북에 이렇게 퍼주기 하려는 것이냐고 물어보니까 자꾸 말을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해서 당신 여태 여섯 가지 거짓말 한 것이 있다.

오늘 일심회까지 거짓말 하면 일곱 번째 거짓말을 한다. 절대 한 나라의 지도자는 잘못을 했으면 국민 앞에 용서를 구해야지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 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길 했다. 당신이 집권하면 좌파정부라서 미국이 북한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대한민국을 내가 지킨다.

두 번째, 우리 3번 후보를 한번 자세히 보면 TV토론하면서 보니 초등학교 반장선거 하는 것 같다.

안철수 후보하고 문재인 후보 둘이서 싸우는 거 옆에서 가만히 보다가 제가 그런 얘기를 했다. ‘이것이 무슨 대통령 후보 선거 토론인지, 초등학교 반장선거 토론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떻게 조잡스럽게 그런 토론을 하는가. 그러니까 어제 토론 끝나고 난 뒤에 그런 얘길 했다. ‘안 후보, 오늘 토론은 조금 나았다’는 소리를 했는데, 문제는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문제다. 3번 후보의 포스터 사진을 한번 자세히 보시라. 그 사진 합성한 것이다. 목하고 몸통을 합성한 사진이다. 그래서 한번 물어봤다. 사진을 왜 합성을 했느냐 물으니 그것은 디자이너가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어봤다. ‘목 위로는 안철수 후보가 맞는데, 몸통은 그럼 박지원이냐’ 물어봤다. 몸통은 누구냐고 하니 자기라고 한다. 혹시 박지원 대표 아닌가하고 그렇게 물어봤다. 그만큼이나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 그래서 박지원 의원이 자기는 임명직을 안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절대 임명직 안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어젯밤에 또 토론 할 때 물었다. 박지원 씨가 임명직 안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상왕도 임명하는 건지 물었다. 상왕은 임명하는 것 아니다.

안철수 후보가 되면 자기는 초대 평양대사 간다고 했다. 평양대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북한이 고려연방제를 할 때 서로 대사 교환을 하는 것이다.

고려연방제라는 것이 무엇이냐. 북한이 한국을 적화하기 위한 대남전술전략으로 내세운 것이 고려연방제다. 그래서 3번 후보는 도저히 안 되겠지 않나.

그러면 4번 후보는 좀 그렇지 않나. 정치적으로 배신하고, 정책적으로 배신하고, 인간적으로도 배신했다. 원래 홍준표 세탁기에는 대부분 들어갔다 나오면 깨끗해진다. 저는 한번 들어갔다 나왔다. 그런데 다 깨끗해지는데 배신한 사람은 들어갔다 나와도 배신자라는 글자가 안 지워진다.

그래서 남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 제가 경남지사를 하고 그만둬도 되는데 제 인생 성공한 인생이다. 제 주제에 밑바닥에서 자라서 무지렁이 같은 부모 밑에서, 까막눈과 무학인 부모 밑에서 경남지사까지 국회의원을 네 번하고 또 검사를 하고 그 정도 했으면 내 인생 성공했지만 제가 경남지사를 그만두고 나온 것은 여기 적혀있는 것처럼 홍준표가 나와야 자유대한민국을 지킨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것 말씀드리고 가겠다. 중국과 북한 국경에 10만 명의 중국군이 집결해있다. 러시아와 북한의 국경에 러시아 군대가 속속 집결하고 있다. 서해안에 중국의 이지스함대가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중국의 수호이 전투기가 전투훈련을 하고 있다. 동해상에는 칼빈슨호와 일본함대가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상원의원 100명을 불러서 북핵의 실태를 상원의원에 다 얘기했다. 안보리 이사국을 전부 초청해서 북핵의 문제점을 다 얘기했다. 왜 그랬겠는가.

북의 핵시설을 선제타격하기 위해서다. 이미 이라크 핵시설을 미국이 타격한 일이 있다. 그리고 이란핵시설은 이스라엘군이 선제타격 한 일이 있다. 핵시설을 선제타격 하는 것은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비난받지 않는다. 미국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북한 핵시설을 선제타격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핵 시설을 선제타격하게 되면 우리 한국에는 지장이 없겠는가. 북은 지금 한국을 공격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미국이 한국정부와 의논을 해야 한다. 지금 의논을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을 ‘코리아패싱’이라고 한다. 한국을 무시하고 일본, 중국, 미국 이렇게 세 나라만 의논을 하고 있다. 긴박하게 의논하고 있다. 외신에도 이것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 언론만 이것을 중요기사로 취급을 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러겠는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한다. 문재인 후보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안보대선으로 긴박감이 더 해지게 되면 야당이 집권하는데 불리하기 때문에 홍준표가 될까 싶어서 그래서 중요기사로 보도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오늘 주한미국상의에 가서 제프리존스에 그런 얘기를 했다. 한국에 만약 좌파정부가 들어오게 되면 미국이 우리나라와 의논하고 북을 치겠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 미리 얘기를 해주면 좌파정부는 바로 북한에 알려줄 것이다. 그렇다면 선제타격이라는 것이 기습공격인데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제타격을 하더라도 한국과 긴밀한 협력을 하려면 보수정권이 들어와야 미국이 안심하고 의논해준다.

홍준표가 집권하면 미군의 전술핵을 한국에 배치하겠다. 핵은 핵으로 상대를 해야지 북핵을 없앤다. 지난 20년 동안 외교를 통해 핵 제거를 한다는 것이 전부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 사이에 북의 핵기술은 미국 동부해안까지 갈 정도로 고도화되었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핵은 핵으로 제압해야 한다. 미국의 전술핵 들어오게 되면 북은 절대 핵으로 한국을 위협할 수가 없다. 같이 다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핵협상을 미국과 하려면 좌파정부는 할 수가 없다. 핵 도입을 반대한다.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에게 굽실거리면서 돈을 상납하며 살아야겠는가.

대통령은 오천만의 이 나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배짱과 뱃심이 있어야 한다. 강단과 결기가 있어야 한다. 배짱과 뱃심, 강단과 결기가 있는 사람 누구인가.

홍준표가 대통령 되면 절대 북의 어린애한테 굴복하지 않는다. 북의 어린애를 제압하겠다. 역대 대통령이 김정일 눈치보고 상납하고 또 문재인 후보가 되면 아마 김정은이 눈치보고 돈 들고 올라갈 것이다.

홍준표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전술핵을 도입해서 한반도에 같이 배치해서 북의 핵이 제거되면 우리나라 전술핵도 다시 돌아가면 된다. 더 이상 핵공갈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벌벌 떠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하겠다.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다. 우리 서문시장에 또 야시장을 해야 될 시간이다. 우리가 이제 비켜드려야 한다.

정말 고향여러분들, TK는 원래 화끈하지 않나. 어제인가 대구방송을 보니 30몇 퍼센트밖에 안 나온다. 그것 말이 안 된다. 고향분들이 적어도 박근혜 전 대통령 할 때만큼은 붙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대구경북에서 홍준표에게 80%만 모아주면 홍준표가 청와대 들어간다.

호남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지원하는 것만큼은 못하더라도 그래도 한 80%는 해주셔야 한다. 조선소 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해보자. 까막눈 어머니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해보자. 그래야지 대한민국 젊은 청년들의 꿈과 희망이 있다.

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야기하고 가겠습니다. 대구의 고향 선배, 후배 여러분 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하자. 까막눈 어머니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통령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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