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도 여지없이 캠퍼스엔 벚꽃이 흩날렸고 내 마음은 되려 울적해졌다.더없이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이었지만, 나에게 그것은 기쁨이라기보단 차라리 잔인한 비수였다.스물 다섯살 봄, 피기 시작한 청춘이 있으면 지는 청춘도 있는 법.김광석의 "서른즈음에"을 흥얼거리며 청승떨기에는 아직 어렸지만,슬슬 피부로 느껴지는 취업난은 청춘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 했다.그래서그런지 유독 그 해 벚꽃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지는 청춘에게 주어진 마지막 벚꽃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며칠 후, 그것의 낙화는 마치 청춘과의 작별인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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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것 같았다.지는 청춘과 함께 모든 것이. 지는 벚꽃과 함께 내 삶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이 메마른 매미 번데기마냥 바스라지는 느낌이었다.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떠들면서도, 공부가 삶의 목적인 것마냥 살아왔다.책상 앞에 앉아 보내는 청춘 속에 가슴 벅찬 행복은 실종되어 있었다.나에게 행복이란, 마치 신기루처럼 인생에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품과도 같은 무엇이었다.대학졸업반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중2병적인 감수성에 혼자 피식 웃다가도 다시 또 우울해지는 것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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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봄은 그랬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같은 성공, 그리고 청춘을 즐기지 못한 데서 오는 회한의 그림자.그 안개와 그림자는 나를 끈덕지게 옭아매며 괴롭혔다.딱히 부족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힘든 삶을 살지도 않았건만,인생의 무료함과 막막함은 역경과 고난이라는 이름 아래 날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다.그해 봄은 그랬다. 특별한 슬픔도, 특별한 기쁨도 없는 백지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중요한 무언가가 빠져있는 것 같았다.조미료 빠진 장국이 된 기분이었다.
그해 봄은 그랬다.햄스터 쳇바퀴 굴러 가듯 돌아가는 하루,비단 나만이 겪는 특별한 운명도 아니건만 유독 그 상황이 몸서리쳐지는 계절이었다.꼭 저 벚꽃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꼭 지난시간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터진 것때문만도 아니었다.그저 지구 저 편에서 기아로 하루에 수십수백씩 죽어나가더라도 자기 손에 난 생채기가 더 아픈 것이 사람이었기에 그랬다.그래서 그 누구나 겪은 무료함과 막막함이 거대한 벽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그래서 그토록 그 벽이 단단하고 높아보였던 것 같다. 아, 그해 봄은 참으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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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변화가 말이다.갑자기 절실하게 필요해졌었다 그 변화라는 것이.그것이 어떤 식의 변화든 상관없으니까 그저 변화 그 자체로 의미있을 정도로 변화가 필요했다.변화, 변화, 변화. 변화. 변화.삽시간에 그렇게 무언가 바뀌어야 하는 강박이 머리에 가득찼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캠퍼스를 걷다가 문득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참 많이. 웃길 노릇이었다.
(1화 끝)
(2화)
스물 다섯 남자가 새롭게 사람을 만날 기회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다들 알다시피 남자가 스물 다섯쯤되면 만나는 사람과 아는 사람의 범주가 보통 정해진다.그때부터는 새로운 그룹에 편입되는 경우가 아니면 새롭게 사람을 만날 일이 전무하다.끽해야 새로운 기회라고 해봤자 아르바이트, 스터디 그룹, 해외봉사활동, 각종 국내외 프로그램 참여 정도였다.하지만 "여자친구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대외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보상금 받기 위해" 구해준다는 것과 다른 게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그것은 어딘가 삭막했다.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해외 봉사 활동을 간다? 사상부터가 불손했다.
그래서 나로선 소개팅이 꽤 바람직한 탈출구였다.
마음 같아서는 아는 여자사람 중, 마음 맞는 이가 있다면 잘 되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슬프게도 아는 여자사람은 죄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성을 가진 유기체정도로만 느껴질 뿐이었다.그렇다고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에게 손을 뻗치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같았다.유기체와 사귈 수도, 인간이기를 져버릴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결국은 소개팅이었다.그것은 애초부터 정해진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그렇게 나는 무엇을 선택하려 했으나, 결국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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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12년 5월, 나는 그때부터 몇 번의 소개팅을 거듭했다. 하지만 연애와 담쌓은지 4년 숙성된 남자에게서 나오는 매캐함은,애써 향수와 옷으로 가린다고 다 가려지는 게 아니었나보다.일단 내가 마음에 드는 여성분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그들은 코가밝아 나의 매캐함을 한 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분들은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참으로 세상에 성녀가 납신 것이었다.이 매캐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에게 관심을 던져준 것 자체만으로도, 이 여성분들은 감히 천사의 반열에 올려도 부족한 분들이었다.당장 정화수 올리고 엎드려 절을 드려도 부족할 분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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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마음을 어쩔 순 없는 노릇이었다.마음이 안 가는 것을 정녕 어쩔 순 없는 노릇이었다.마음은 이성이 어찌저찌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지나가는 사람에게 100억을 줄테니 날 사랑해달라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100억으로 그 사람의 몸과 시간과 웃음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마음은 살 수 없는 것이었다.마음은 애초부터 우리의 관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늘 제멋대로다.그는 늘 스스로 움직인다. 늘,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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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말, 가을하늘 광활한데 슬프게도 내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연거푸 마신 고배에 멘탈은 쓰라리다 못해 아작이 났다.연애 전선에는 빨간 불이 켜졌고, 최후의 자존심만이 방어전선을 구축하며 힘겹게 좌절의 맹공에 버텨내고 있었다.사실상 소개팅을 시켜줄 인맥도 고갈된 상황이었다.물론 조르고 조르면 한두 다리 건너서라도 사람을 소개받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자고로 인간이란 염치를 아는 동물이고,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슬슬 체력도 의지도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돈은 이미 바닥을 너머 지하수와 반가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인연은 노력하면 생긴다는 말.고작 4~5개월 노력해보고 할 소린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상황상 너무 헛소리 같이 느껴졌다.주구장창 인연을 찾는 데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곤, 사라진 적금통장과 몰락한 자신감, 어색해진 인간관계, 그리고 어느새 남자친구 생긴 옛소개팅녀들의 전화번호와 떨어진 어학 성적 따위뿐이었다.참으로 많은 걸 얻어서 기뻐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냥 개잣같이 빌어먹을 세상 엿이나 쳐먹으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본디 나는 너무나도 고운 심성이기에 차마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너무 바보같이 착해서 여자들이 싫어한 것이라고 애써 자기위로했다.물론 그냥 키가 덜 커서, 덜 생겨서, 말주변이 부족해서겠지만, 그렇게 자기합리화하는 편이 멘탈을 수호하는 데는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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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접자.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취업 준비나 하자.갈길이 멀다. 하고 책을 폈다.
2012년 10월 30일 밤이었다.
(2화 종료)
2012년 10월 31일. 내가 여친이 생기든 말든, 소개팅에서 차여 찌질거리든 말든,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그날도 어김없이 아침이 되고 눈이 떠졌다.탁상 시계는 거의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미친듯이 울어제끼기 전에 미리 꺼두었다.여느때와 다를 거 없는, 참으로 대단할 거 없는 아침이 밝았다.기계처럼 눈을 떴고 기계처럼 씻고 기계처럼 밥을 먹었다.낮 수업 달랑 하나 있는 날이었지만, 과제도 해야했고 공부도 해야했기에 조금은 서둘렀다.
그날은 조금 특별한 일정이 있었다.그 특별한 일정이란 것이 "군인과 술마셔주기"라는 점에서 뭔가 통탄을 금치 못할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스물 다섯 먹고 군인과 술마셔주기라니.(술마시기의 오타가 아니다. 술마셔주기가 정확한 표준어이다..)마치 내 스스로가 부처의 현신같았다. 자비심이란 단어는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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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도 절친한 친구의 휴가를 무시하기에는 미안하기도 했다.귀찮아서 안 만나야겠다싶으면 우정이 양심을 가차없이 찔렀다.한편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이기에 만나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기도 했다.훈련은 어땠는지, 보직은 적성에 잘 맞는지. 군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다들 그렇게 게이가 되어가는 것이라는 또다른 친구의 비웃음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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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군인 친구와의 술자리는 유쾌했다.친구는 그간 알코올을 마시지 못한 것에 한이라도 맺힌 것 같았다.아니, 술을 마셔야 한다는 약간의 광기마저 서려있는 것 같았다.술 마시는 꼬락서니가 나라 잃은 사람에게 해방이란 선물을 안겨준 것만 같았다.마치 지키지 않으면 자기자신의 소명의식을 져버리는 것마냥.몸소 부어라마셔라를 힘써 실쳔하셨다.태극기만 쥐어주면 대한독립만세라도 외칠 것 같았다. 그렇게 부어대는 친구를 보니 나도 덩달아 호기가 일었다.사실 나또한 가슴 속에 맺힌 멍울을, 술이라면 풀어주지 않을까 싶었다.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는 성격인데 유독 그 날따라 과하게 들어갔다.식도는 타들어가는데, 꺽이는 술잔에는 거침이 없었다.참 과하게도 들어갔다.주량을 한참 넘겼다.
당연하지만 몸은 비명을 질렀고, 먼저 눈에서부터 지진이 왔다.시선이 초점을 따라가지 못해 숨을 헐떡였다.그리고 귀에는 해일이 덮쳤다. 달팽이관이 균형을 잡아내지 못해 숨을 헐떡였다.고막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몸을 제대로 못 가누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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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니 지하철 안이었다.잠시간 필름은 끊겼으나 내 몸은 기특하게도 집에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주인이 멍청해서 매번 고생하는 몸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하진 못할 망정 술으로 빅엿을 먹였다.나도 참 대책 없이 죄스러운 사람이었다. 어찔거리는 머리를 애써 부여잡으며,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다행히 시간 여유는 있었고, 집에는 무리 없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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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차창 밖으로는 외로운 가로등과 외로운 전봇대들이 줄지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외로운 전봇대들은 전선으로 각기 이어져 외로운 건물 위에 참으로 외롭게도 드리워져 있었다.그 외로운 건물 아래로 외로운 그림자가, 그리고 그 아래로 왠지 외로워보이는 사람들이 또 스쳐지나가고,외로움 뒤섞인 네온샤인은 차창에 내 얼굴을 외롭게 비추고,그리고 왠지 외로워보이는 사람이 내 옆에, 그리고 저 의자에, 또 저 차창 옆에 서있었다.
...
그냥 왠지. 뭔가, 이 외로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는 사실에,이 세상, 왠지는 모르겠는데 참으로 외롭다는 사실에,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 참으로 견딜 수 없다는 사실에, 괜히 울적해져서,또 그렇게 울적해져서,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외롭다...아, 이 내 청춘도 진짜 이렇게 끝나는구나.진짜 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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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술먹고 일찌감치 정신 놓은 듯한, 옆자리 여자가 나와 엮이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