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아픔 서린 정동길을 가다

가자서 작성일 13.09.06 15: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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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아픔 서린 정동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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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때 정동 모습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시청역 대한문에서 출발해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정동사거리에 이르는 정동길.  


이 길을 중심으로 한 정동 일대는 자체로서 우리 근대역사이자 건물 하나하나가 그 아픔과 긍지를 고스란히 간직한 스토리 창고다. 

 


"구한말의 아픔을 지킨 정동"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정릉이 있었던 곳.  그래서 정릉동(貞陵洞)이라 불리면서 생긴 이름이 '정동'이다.  정릉은 태종 2년 들어 현재의 성북구 자리로 옮겨졌으나, 정동은 그 이름을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1905년 11월17일, 정동은 우리 역사에 가장 아픈 기억을 간직하게 된다.  


그 날, 지금은 덕수궁(德壽宮) 담장 밖으로 밀려난 중명전(重明殿)에선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광명이 그치지 않는다'는 이름엔 맞지 않게 종말로 치닫는 왕조의 단말마 고통을 이 작은 2층 벽돌집이 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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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 위키트리 DB]


조선조 내내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렸던 덕수궁에서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로 고종황제가 이 중명전에서 집무를 보게 되면서 정동의 역사에 새로운 운명을 예고한 것일까?

 


"정동, 대한제국 중심에 서다"


구한말 역사를 읽는 것은 정동이 간직한 기억을 거슬러가는 것과 같다.  도읍 한양의 중심인 경복궁 남쪽에 자리잡은 정동은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역사의 중심무대에 선다.


경복궁 남쪽 변두리에 속한 조용한 마을이 근대화를 향해 달려가는 제국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것이다. 고종의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선포가 이 곳 정동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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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 문화유산국민신탁 제공]


어쩌면 정동은 그보다 더 먼저 조용한 변화를 준비해 왔을 것이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12년 전인 1885년에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배재학당이 그것이다. '인재를 키운다'는 뜻인 '배재(培材)'라는 이름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된 점을 봐도 황제 역시 일찌기 이 정동에 근대화 의지를 묻어두었던 건 지도 모른다.


이는 1899년 정동에 설립된 이화학당과 함께 한국 근대교육의 텃밭을 일궈 왔다.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까지도 근대화 물결에 빠르게 편승했을 때, 그들 사이에 낀 조선은 마치 나들목 없는 고속도로변 시골마을 같았다.  그 나들목 구실을 한 곳이 바로 당시 정동이었다.

 


개방과 외교의 나들목 - 정동


배재학당이 세워지기 2년 전인 1883년, 정동엔 미국공사관이 먼저 자리 잡았다.  이어 이듬해 영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이 속속 들어온다.


외교 공관에 이어 종교시설도 정동에 자리 잡는다.  1887년에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가 들어섰고, 1890년에는 대한성공회가 영국공사관 동쪽에 세워진다.  또 경향신문사 옆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는 1894년 외교관들의 사교모임인 외교구락부가 있었다.  정동교회는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되기도 한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지였다.


이 시기, 불과 7년 안에 정동은 외교와 서구 종교, 그리고 신교육 중심지로 변모한 것이다.  이는 소용돌이 치는 구한말 민족사 격랑이 이 작은 마을 정동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정동은 다이나믹한 근대화를 이끈 민족 리더들의 교류공간이 됐다.


이 곳 정동에 들어온 것은 단지 공관과 예배당만이 아니었다.  거기엔 수많은 서구인들과 또 서구 건축문화, 그리고 정신문화가 묻어나면서 정동에 새옷을 입혔다.  

 

그래서 정동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물이 즐비하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는 최초의 민간 신문사인 독립신문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과 함께 정동을 근대 언론의 발상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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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일대 3D지도<상>와 이화여고 부근 정동길<하>]


그리고 지금 정동은 언론과 문화의 중심지로 남았다.


이 정동길 좌우에 늘어선 수많은 근대 유적들이 바로 우리 민족에겐 '근대 문화유산의 정수'에 다름 아니다. 


오늘도 이 돌담길을 거니는 수많은 행인들에게 정동이 지닌 아픔과 역동성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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