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을때 우리 표정)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 조만간 개봉 하길레, 수다 삼아 올립니다. 별로 재미 없을 수도 있으나, 일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조만간 개봉하는 영화 명량........이순신 장군의 불굴의 의지와 충절이 보인 왜란중 단연 클라이 막스라 할 수 있는 이 전투는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투임에 틀림 없으나, 일본넘들은 그리 생각 안한다는 사실......(뭐..지네들 박살난걸 좋아 할리 없으니...)
일본 수군과 단 한차례의 패전도 없었던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과연 일본넘들은 어찌 평가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명량해전에 관한 위키피디아에 적힌 글을 그대로 퍼왔습니다.
번역하기 귀찮아 네이버 번역기 돌리고 일부 이상한 부분만(잘못된 번역부분) 수정했습니다.
특히, 평가 부분을 보시고 일본넘들이 왜 한국인이 경계해야 할 넘들인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특히 평가 부분에서는 한국측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교묘히 적어 넣음 으로써 왜곡질 고수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체 우리나라 어느 교과서에 그때 일본 왜넘 희생자가 9천이라고 되어 있는지? 아시는분?)
鳴梁海?(명량해전)-일본어판(번역)
(개요)
(중략)
한국에서는 명랑
대첩으로 불리며 이순신이 이끄는 소수의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선봉을 지리를 살려 격파한 후에는 피아의 전력 차이에서 그 이상의 공격을 하지 않고 철수하고 있다. 이로써 싸움터의 제해권은 일본 측으로 넘어가면서 조선 수군 기지인(호남)오른쪽 수영이나 대안의 진도 공략을 허락하는 결과만 보면 일본 수군의 침공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배경)
문록의역(왜란의 일본식 표기)이후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서 계속된 평화 협상은 결렬되어 재정벌이 결정되었다. (하략)
(전투의 경과)
(앞부분 일본넘 뻘소리 중략함)
도도 다카토라들은 적의 대선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고 그 포획하려
9월 16일, 수로의 위험성을 고려해 전군 중 세키부네(중형 선박)수십척(조선
측 기록에서는
130여척)만
뽑아 명량도로 향했다. 이에 대한 조선 수군은 대선(판옥선)12~3척(그 외 후방으로 병력을 과장하기 위해 동원된 피난민의
배 백척이 요격 대기 했다. 당초 다른 배들이 물러나고 잠시 이순신의 배 한척만 싸울 때도 있는데, 요선을 공갈하여 불러들이는 전투는 계속됐다. 일본 수군에서는 내도 도리 총 이하 수십명이 전사,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하고
몇척이 침몰하는 등의
피해를 받았다(조선 측 기록에서는 31척 격파). 모리 고정(毛利高政)은 적선에 공격할때 반격을 받고 바다에 떨어졌다. 이것을 토도 수군의 손팔랑(孫八? )과 감해유이(藤堂勘解由)가 구원나와 조선 선박을 물리치고 모리 고정을 구한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손해는 경미했지만 결국 중과부적 이어서, 저녁이 되자 급속히 퇴각을 개시했고 그 날 안에 당사 섬(신안군 바위 타이면)까지 후퇴하여, 일본 수군은 수로에 생소하기 때문에 돛을 달고 전장을 이탈하는 조선 수군을 추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았지만, 다음 17일에는 도도 다카토라, 와키 사카 야스하루 등이 전날의 전장을 둘러보며 적선의 전무를 확인했다.
이 날 이미 조선 수군은 멀리 있는 외도(신안군 사토시 도읍)까지 퇴각했다.
이에 의해 명량 해협은 일본 수군의 제압 하에 놓이게 되었다.
(평가)
조선 수군 중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의 선봉을 때리는 것에 성공했지만, 일본 수군 본대의 압력을 지탱하지 못하고 주력함의 온존하게 대응해 전라도 북단까지 철퇴했기 때문에 제해권을 잃고 조선 수군은 비주력함과 근거지를 잃었다. 조선 수군의 다시 진출은 일본 육군과 수군의 철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명량 해전은 전국의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국지적 승리에 불과 하다.
한국 측은 이 싸움을 "명랑 대첩"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일본에 대승한 해전"라고 인식하고 있어, 일본 수군의 참가 병력이 "군선 133척, 운송선 200척"손실이 "침몰 31척, 대파 92척, 8000~9000명이 전사"로 하는 등의 전과의 과장이라고 생각되는 주장이 보인다. 실제로는 선수의 무리로 좌군에 뛰어든 일본 수군의 병력은 도도 다카토라(2,800), 가토 요시아키(2,400), 와키 사카 야스하루(1,200), 구루 시마 미치 후사(600)간 평우위문들장(200)의 7,200명이다[13][14]이에 약간의 남의 수군을 가했다고 해도 8,000명에 못 미치는 것 같았고, 명량 해전에서는 대형 선박(아타 케부네)을 쓰지 않고 중형 선박인 세키부네를 선발해 공메카카쯘 사실이 "타카야마 공실록"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이런 한국 측의 기록 숫자에 무리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 이순신이 스스로 저술한 " 난중 일기"에는 "해적선 3십척 격파"라고 있을 뿐이다.
한국은 이 해전은 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국민에 널리 알려졌으나 내용으로서는 "서진 하려던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것을 저지했다"라는 것만이 강조되어, 전투 후에 이순신이 북쪽으로 퇴각하고, 일본 수군이 서쪽 해안에 진출해 전략 목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는 거의 인식되어 있지 않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밖에 못봤는데, 스페인어 버젼이나 프랑스어 버젼을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