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목요일엔 수다다- 영화로 나올법 한 이야기

얼륙말궁뎅이 작성일 15.06.25 14: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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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속에서 맺어진 영화보다 극적인 헌신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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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당시 사진병으로 참전했던 미국인 폴 굴드 슐레징거와 그의 아내가 된 김명숙 이야기

 

 

 

1952년 2월 18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명문 앰허스트 칼리지를 졸업한 폴 굴드 슐레징거는 

21세때 한국전에 참전했다. 군 통신중대 소속 사진병으로 한국의 전장을 누볐다.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1학년때 풋볼 경기를 영화로 제작하는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사진에 심취했던 폴은 

입대해서도 특기를 살려 한국전쟁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는 역할을 맡았다.

 

중부전선의 사지(死地)를 넘나들던 폴은 1953년 봄 대구에 주둔한 미 육군 226통신중대에서

타이피스트(타이핑 치는 사람)로 일하던 19세 김명숙을 처음 만났다. 

명숙은 그해 3월 대구 효성여고를 졸업하고 타이핑 기술을 익힌 후 이 부대에 취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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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75센트의 급여를 받았던 명숙의 주된 일은 통신중대내 사진반에서 사진 설명글을 타이핑하고,

등사판으로 인쇄하는 것이었다. 사진병인 폴과 같은 사무실 옆자리에서 나란히 일을 했다.

 

명숙은 함경도 함흥에 살았지만 해방후 공산체제가 들어서자 

제재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결정으로 월남하면서 서울에 정착, 경기여고에 입학했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가족들과 피란을 다니면서 부산을 거쳐 대구 봉덕동으로 옮겨 살았다. 

 

 

폴을 똑똑하고 일처리가 야무진 명숙과 가까워졌다. 명숙의 고교 졸업성적이 107명중 3등으로 

우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폴은 명숙에게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서울과 대구를 기차로 오가면서 폴은 계속 명숙을 만났고, 서울에 올라갈 때면 자취를 하던 명숙을 위해 미군부대의 먹거리들을 놋쇠그릇에 싸서 갖다주고 소풍도 함께 다니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이듬해인 1954년 1월 29일 폴은 군 복무기간이 끝나 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이별에 앞서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명숙은 폴에게 고무도장 하나를 선물했다. 

이 도장에는 명숙이 사는 곳의 당시 주소인 '서울 성동구 신당동 67-236'이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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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똑바로 쓰기 어려웠던 폴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이 고무도장을 편지 겉봉투에 찍어 

착오없이 명숙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폴은 편지를 통해 명숙에게 미국 유학을 계속 권유하는 한편 직접 여러 대학을 찾아 다니면서 

자신의 부모를 후원자로 한 추천서를 내보이며 명숙의 입학 여부를 타진했다. 

 

웰슬리대, 스미스대, 휘턴대, 베닝턴대 등 여러 대학에 입학을 신청했고 명숙은 그해 7월 명문 터프츠대의 엘리엇 피어슨 사범대로부터 4년 전액장학금 입학허가를 받았다. 

 

폴은 명숙이 그해 가을 학기부터 유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당장 미국까지 오는 여객선비용을 

전신환으로 보냈다. 하지만 출국에 필요한 복잡한 절차들 때문에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명숙은 이듬해이 1955년 2월 12일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때 텍사스 휴스턴대에서 석사과정중이던 폴은 낯선 이국에 첫발을 디딘 명숙과 

이날 하루동안 다섯차례나 전화 통화를 주고 받았다. 

 

명숙은 며칠후 미국 동부 보스턴에 도착해 터프츠대에서의 학업을 시작했고, 이 사실을 휴스턴대에 있던 폴에게 알리기 위해 신입생인 자신의 사진이 실린 학보 3월호를 보냈다. 

 

명숙은 학보 여백에 "이화여대는 내 삶에서 당신이 내게 선물한 향학을 위한 출발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나를 위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했는지 아세요? 내게는 너무도 아름다운 삶이에요" 라는 글을 

적어넣어 폴에게 절절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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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명숙은 그해 여름 방학깨 폴의 부모가 살고 있는 보스턴 교회 도체스터 집에서 

서울에서의 이별후 1년반만에 재회했다. 

 

보스턴과 휴스턴에서 떨어져 지낸 폴과 명숙은 보다 많은 시간을 같이 하고 싶었다. 명숙은 1956년 7월 폴이 있던 휴스턴대의 여름학기를 수강하기로 했다. 명숙은 영어 교양과정을 이수하면서, 일본어로 된 영화 관련 책을 번역해 폴의 석사학위 논문작업을 도왔다. 

 

그해 8월25일 폴과 명숙은 '영원한 동반자'를 약속하며 휴스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둘은 휴스턴대에서 같이 학업을 계속했다. 

 

이듬해인 1957년 8월 아들 데이비드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ㅇ낳아 명숙은 폐결핵에 걸려 6개월 넘게 병원생활을 했지만 폴의 극진한 간호덕에 완쾌됐다. 1961년에는 딸 게일이 태어났다. 

 

1959년 영화예술 분야의 석사학위를 취득한 폴은 휴스턴대 시절 미국 최초의 공영방송국인 KUHT-TV(현재 미국 공영방송인 PBS의 계열사인 '휴스턴 PBS') 가 개국할 때 주도적 역할을 했고, 미주리, 미네소타 등에서 TV, 라디오 광고를 제작하면서 방송광고계에서 활약했다. 

 

대학 졸업후 육아에 전념하던 명숙은 취미로 시작한 스키에 심취하며 미네소타주 블루밍턴의 스키 스쿨의 강사로도 일했고, 스키장의 최고경영자 비서로도 근무했다. 

 

성장한 아들, 딸을 결혼시키고 은퇴한 후 폴과 명숙은 미네소타 번즈빌의 웰치 빌리지 스키장 인근에 

집을 구해 다시 둘만의 생활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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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심장 대동맥판막 교체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스키를 타곤 했던 명숙은

이듬해인 1993년 12월 31일 59세의 나이로 심장이상증세로 폴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폴은 명숙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후 그녀가 살아온 일생을 정리하는 

장문의 글을 기록해 '영원한 동반자'를 추모했다. 

 

폴은 이 글에서 "명숙! 당신의 나라를 떠나 나와 평생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워요. '나'와 '너'가 ''우리'가 되도록 두 사람의 최고의 문화들을 잘 융합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선량함, 개성, 열정의 대사(Amvassador)였소, 우리는 당신의 삶이 던진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있어요. 그리고 그 본보기를 따라 갈거예요. 이제 당신의 일은 끝났어요. 편안히 쉬어요"  라고 사별한 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했다. 

 

명숙이 숨진 후 딸이 살고 있는 텍사스 타일로로 거처를 옮긴 폴은

2009년 4월 14일 파킨슨씨 병으로 78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미네소타주의 유력일간지 스타 트리뷴은 부고기사를 통해 그의 한국전 참전 경력 등을 전하면서 "온화하고 친절했던 폴의 삶은 여행과 모험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회고했다. 

 

 

 

 

영화로 나올법 한 이야기 

다그닥 다그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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