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필름 1부

hogoro 작성일 06.08.07 16: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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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필름



이번 여름의 절반은 비와 함께했던 나날들이었다.

하늘에 구멍 뚫린 양 거침없이 오던 비-

모두를 집 안으로 꽁꽁 묶어 놓기 충분했다.

하지만, 푸른색 빗방울들이

내 이마를 두드리던 나날들이 더 많았으랴.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느낌은 굉장히 길었다.

혼자 있는 시간도 꽤 많았었다.

황량하고 서늘한 느낌.

부재의, 어디 마음 붙일 곳 없는 느낌.

길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명의 길동무도 만났었다.

진주 근방에서의 20대 중반의 절실한 기독교 신자 형

내내 자기얘기만 하면서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약간의 애정결핍의 상태에 걸린 30대 아저씨

그리고 통영의 가출여고생

그녀는 눈도 동그랗고 코가 동그랗고 입술도 동그랗다.

머라고 말할 수 없이 달착지근한 향내를 품고 있는 사람.

얇디 얇은 투명화장에 새침스러운 분위기가 어울리는 사람.

제법 멋대로였긴 했지만 그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각 자 갈길이 있기에

만남이 있듯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찾아온다.

헤어지는 순간엔, 헤어짐의 절대적 고독.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뒤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후

나는 여행을 했는지 며칠동안 잠을 잔 채 꿈을 꾸었는지

햇갈릴 정도로 그 여행의 기억들이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니깐 밑그림 단계에 있는 그림들을 보는 듯한 기억

내머리속에 지우개가 있는건가.

실제로 이런 제목의 영화가 있다.- 제목은 끌렸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전지현이란 여배우가 나와서 예고편만 봤다.

예고편을 보면서 시종일관 이 생각 뿐이었다.

그럼 남은 지우개 똥들은 ?



며칠이 지난 후 사진관에서 인화가 다 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 여행 확실히 갔었나봐?.. 재밌는 사진들 많네. 기억안난더니 >

집에 오자마자 내손에서 잽싸게 사진이 담긴 봉다리를 가져가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동생은 말했다.

< 응. 그런데 흑백 필름은 이렇게 되버렸어. >

엉망이 되버려 투명해 질대로 투명해 져 버린 필름을

손가락으로 풀었다 돌렸다 하면서 말했다.

< 통은 칼라필름통이지 내용물은 흑백필름이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말이지 >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한테 한 4번은 이야기 했을거다.

나라도 햇갈릴것 같아. 꼭 주의 해야 한다면서 신신당부했건만

파리를 잡은채 그 시체 조각을 치우지 않은 아저씨를 보며 느낀

불안감은 괜한게 아니었다. 필름은 여행 가기전 슬기한테

사진 찍는 법을 배우면서 받아 둔 필름들이었다. 사진과전공인

녀석이라 잘가르쳐 주더라. 조리개며 셔터스피드며 구도며

사진은 이 3박자의 조화라던가, 그림은 세상을 더하는 개념이며

사진은 세상에서 빼오는 개념이라고 한 점이 인상에 남는다.

< 어쩔수 없네. 근데 그렇게 말하니깐 흑백 필름 보고 싶은걸? >

사진을 들춰 보던 중 또 그 특유의 표정으로 말했다.

< 그러게, 일단 인화된 사진들이나 볼까나 >

동생이 다 보고 난 몇 장 안되는 사진들을 들쳐보았다. 아.. 아

이거 기억나는데, 이때- 그래 그때의 느낌 비가 전쟁터의 총알

처럼 왔을때 그리고 우산마저 부러져버린 그 거센 바람들의 흔적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기억들이

살아나는 느낌이랄까. 사진을 보면서 하나 둘 씩 생각이 나는것이

었다. 어느 책에서 인간의 뇌는 필요이상의 정보는 기억의 저편

으로 내놓기 떄문에 다시 재기억하기 위해선 어떠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 사진은 기억의

연결고리였다. 기억이 지워진후 남겨져버린 지우개똥들...

그 남은 지우개 똥은 이 사진들을 뜻하던 거였나.

< 아 그럼, 흑백필름의 기억들은 ..? >

갑작스럽게 되살아난 기억때문에 소리쳐버렸다.

< 깜짝이야. 갑자기 무슨 말이야. 흑백필름의 기억이라니 >

< 아, 아니다 >

좀 더 생각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동생과 짧게 대화를 끝낸 후 나는 방안으로 들어

왔다. 지우개똥이 없었다. 3통이나 되는 흑백필름이 허황된 투명

필름들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들에 대한 연결고리는

사라져버린거였다. 아 머리 아퍼 .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칼라사진

들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들을 조금이나마 떠 올려보려고 했지만

머리만 아플뿐 , 희미하게 기억나기는 한다. 하지만, 희미하게

나는 기억은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든다. 마치 흐릿한 영상을 오랫동안

쳐다보면 눈이 아프듯이...... 그런상태로 침대에 그냥 누워버렸다.

어떤 일이 있었던걸까. 흑백필름 속에 담겨진 그 기억들은 어떤걸까.

보통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특별한 사고나 충격으로 기억을 잃는

다고 하는데, 그런 상태는 전혀 겪지 않았는다. 대학 들어오더니

놀고 먹자판속에서 술만 마시고 흥청망청 백수처럼 지내서

머리가 돌이 되어버린건가. 여전히 포커스에 중심을 못맞추는

기억은 내 머리를 뱅글뱅글하게 돌려버리고 있었다.

정말로 꿈을 꿨던 걸까? 왠지 느낌이 그 날 신기한 꿈을 꾸었는데

다음날 그 꿈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그 느낌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웠으나 잠도 안오고, 약간 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하고 부엌으로 나왔다. 동생은 거실에

앉아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 라면 먹을래? >

라면 봉지를 으깨다가 동생과 눈이 마주치자 묻지 않을수 없었다.

< 아니, 별로 배고프진 않은걸 근데, 여행 중에 무슨일이라도 있었어? >

동생은 얼굴을 다시 티비로 돌린채 희미한 눈동자로 말했다.

< 왜? >

내 얘기에 대해선 관심도 별로 없는 녀석이 갑자기 질문이라니.

< 여행 다녀오면 보통 사람이 변해서 돌아 온다고 한다잖아

그런데, 형 다녀와서 좀 많이 변한것 같아. 유치한 장난도

요즘은 잘 안하고, 여튼 분위기가 그래 >

말도 잘 안하는 녀석이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어렸을때는 분명

오늘처럼 말이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서로

말을 하는 시간이 줄어 들었다. 그냥 아주 일상적인 대화들뿐

고등학교도 꽤 차이가 나는 곳을 들어가자. 집안에선 일종의

차별대우도 생기고- 관심분야도 달라졌기 때문에, 어쨌든

이녀석 오늘따라 말이 많다. 이상하다.

먼가 달라진게 정말로 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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